109-J1. 아파트
어미 괴물은 아직 우리 버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 옆면을 온몸으로 비비며 어떻게 해보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버스의 쉴드와 수평 기능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물살이 거세어도 강하게 평행을 유지했다.
"흠"
이제 전방 오십여 미터, 조금만 더 가면 보트 모드가 해제된다. 그러면 놈은 이제 코르카 신세다.
그때 놈이 버스를 앞지르더니 아예 우리 앞을 가로로 막아섰다.
퀘에에에에!
놈의 온몸은 아까 블루건에 맞은 상처투성이였고 초록의 핏물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놈의 움직임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위이이이잉!
성희가 힘껏 악셀을 밟았지만, 버스의 보트 모드로 놈의 거대한 몸을 밀어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십여 미터쯤 남았을 때 보트 모드가 해제되는 소리가 버스 뒤쪽과 아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제 됐다!"
난 꺼져버린 [자동 접촉 파괴] 버튼을 눌렀다.
"어라?"
반응이 없다. 그런데 액정에서 보트 모드에서만 나오는 버튼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아직 몸통이 더 많이 물에 잠겨 있어서 그런가 봐"
성희가 여전히 풀 악셀을 밟으며 말했다.
버스가 이제 다시 바퀴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놈의 몸이 물에 잠겨 있는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기 시작했다.
꿰에에엑!
이제 거의 다 올라왔다. 놈은 이제 터져나갈 것이다.
뀌이이이익!
그런데 그때 갑자기 놈이 옆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뒤편 물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뭐야!"
버스가 지면 위로 완전히 올라오자 성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작스럽게 버스가 멈추는 바람에 모두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난 뒤쪽 계단으로 뛰어가 버스 지붕으로 올라갔다.
"헐"
수룡이다. 중형 정도 되어 보이는 놈들이 다수 나타났다. 놈들에게도 맛있는 먹이가 거머리 괴물인 듯싶었다.
꿰에에엑!
"막타를 채갔네!"
나라가 지붕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게임 좀 했나 봐?"
내가 옆통수로 말하자 그녀가 살짝 웃었다. 난 눈앞에서 펄떡이고 있는 수룡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저놈들이 대박이지, 거머리 먹고 쑥쑥 자라라"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블루건 의자에 앉았다.
"성희야 차 반대편으로 돌려줘"
"오케이"
성희가 천천히 차를 돌렸다. 블루건으로 쏘기 좋은 각도가 나오자마자 난 바로 발사 버튼을 눌렀다.
퉁 퉁 퉁 퉁 퉁
파직 파직
어미 거머리를 다 뜯어먹은 수룡들은 갑작스러운 푸른 불빛 난사에 당황한 듯, 마치 그물에 걸린 미꾸라지처럼 난리를 떨었다.
하지만 놈들은 물속까지도 파고드는 블루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부 놈들은 물에 잠긴 학교 운동장을 향해 도망치기도 했고 어떤 놈들은 오히려 버스를 향해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라가 말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거미 도망가겠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놈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다. 좀 전에 물을 건너오면서 우리는 너무 시끄러웠다.
난 근처의 수룡 괴물을 다 잡은 후 멀리 학교 운동장으로 도망치는 한 마리를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블루건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들킨 거 코르카라도 벌어야지"
대략 백여 개는 넘게 번 거 같다. 그냥 어미 괴물만 잡았으면 열 개 조금 넘었을 거다. 열 배다. 난 액정을 살폈다.
코르카 [195/10000]
만개 모으는 건 까마득한 일이지만 적어도 당분간 유지비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저기!"
그때 학교를 바라보던 나라가 외쳤다. 검붉은 형체가 옥상에서 내려와 다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도로에서 진입할 수 있는 다리다.
우리는 다시 버스 안으로 내려왔다.
"성희야 다리 쪽으로!"
그녀도 그 움직임을 봤는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다리인 것 같다.
"쿨럭, 여기 다리가 생겼네!"
할아버지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다리 너머로는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나는 액정의 [투명] 버튼을 눌렀다. 놈이 우리를 인지 했다고 해도 계속 우리를 노출하며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다리 위에 들어서자 놈이 아파트 단지 쪽으로 기어가는 게 보였다.
"막혔는데?"
나라가 전방을 보며 외쳤다. 붉은 눈 거미는 바리케이드와 잡동사니로 막혀있는 길을 가뿐히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다리를 건넌 후 천천히 버스를 세웠다. 셀 수 없는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길 양쪽에 두 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밀어볼까?"
성희가 나에게 물었다. 난 전방을 자세히 살폈다.
"쇠사슬로 묶어놨어···.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성희가 아주 천천히 버스를 움직였다.
위이이이잉! 그그그극 우두둑
바퀴가 헛도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과 무거운 바리케이드가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하지만 우리 버스로 밀어버리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고 단단히 묶여 있었다.
"어 사람이네? 쿨럭"
창밖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외침에 성희는 악셀에서 바로 발을 뗐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
내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숨었어, 저기 위층"
다들 가만히 서서 그쪽을 바라봤다.
"보인다!"
검은 머리가 아파트 베란다에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우리 버스의 소음을 듣고 창밖을 살피는 모양새다.
"생존자가 있었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액정을 바라봤다.
[ 0 < 7 < 2 ]
근처에 괴물이 있다. 저기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형체도 생존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내가 액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나라가 말했다.
"물속에 남은 괴물일 수도 있고"
난 고개를 돌려 지나온 다리 아래를 바라봤다. 엄청난 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저 깊은 물 속에 다른 괴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탐지 숫자로는 추측하기가 어렵겠어.'
바리케이드 위로는 잡동사니가 높게 쌓여있어 너머가 잘 보이지 않았다. 버스 지붕으로 올라가서 살펴볼까 하다 그만뒀다. 투명 상태에서 지붕에 올라가는 순간 우리가 바로 노출된다.
'근데 아까 도로에서 난리 칠 때도 보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도를 살피니 우리가 지나온 도로가 완전히 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파트였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가 물에 잠긴 도로를 건너는 모든 과정을 다 봤을 거다.
"오픈하자"
내가 말을 꺼내자 성희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차피 다 아는 거 투명은 의미 없고, 괴물이 덤벼도 크게 상관없잖아? 지붕에 일반인도 없고"
난 바로 [투명] 버튼을 눌러서 껐다. 버스에 타고 있는 우리야 시각적으로 알 순 없었지만 아마도 아파트에 숨어있는 누군가는 우리 버스를 바로 볼 수 있을 거다.
난 액정에서 새로 생겼던 또 다른 버튼을 누르고 지붕 계단으로 향했다.
"위험해"
나라가 내 팔을 잡았다.
"괜찮아"
난 바로 지붕으로 올라갔다. 이제 버스와 내 모습이 모두 아주 잘 보일 거다. 완전히 노출된 위치다.
"누구 있나요?"
난 아까 움직임이 보였던 곳으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물 흐르는 소리 이외엔 고요했던 아파트 단지에 내 목소리가 낯설게 울려 퍼졌다.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올라와서 난간 옆에 앉아 몸을 숨긴 후 아파트 건물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앉기라도 해라"
지붕 한가운데 당당히 서있는 내 모습이 정말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탕!"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총소리가 울렸다.
"엎드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총소리가 들린 직후 바로 내 머리 근처에서 뭔가가 번쩍이더니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깜짝이야, 총을 쏠 줄은 몰랐는데'
난 쇠구슬이나 돌멩이 같은 게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총이라니, 멸망하고 나서도 아니 멸망 이전에도 듣기 힘든 소리였다.
게다가 공기총 소리도 아니다. 이건 화약이다. 인간의 문명이 전부 고장 난 건 아니었나?
내가 여전히 여유로운 척 서서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자 나라가 이제서야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새로 생긴 기능이야? 말을 하지"
나에게 다가온 나라에게 팔의 액정을 보여줬다.
광역 방어막 5m [ON]
지붕까지 방어가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총탄은 사실 생각하지 못했다.
혹여 인간의 총탄을 버스의 방어막이 막지 못했다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 번은 봐 드립니다. 또 쏘지 마세요. 경고했습니다."
잠시 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하나만 물어봅시다!"
난 아파트 단지 건물 전체를 천천히 돌아보며 소리쳤다.
"방금 거미 목격하신 분!"
하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흠, 잠시만"
난 버스 아래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삼겹살과 소주를 꺼냈다. 그리고 음식 창고를 열어 햇반과 통조림 몇 개를 꺼내서 작은 박스에 담고 다시 지붕으로 올라갔다.
난 박스를 내려놓고 하나씩 들어 올렸다.
"이건 삼겹살!"
나라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건 소주!"
왼손에 생삼겹살과 오른손에 소주를 들고 흔들고 있으니 완전히 미친놈 같아 보였다.
"그리고 햇반과 참치 통조림도 있어요!"
아니 미친놈이 아니라 장사꾼 같은데?
"거미의 행방을 알려주시면 모두 드립니다! 협조 잘하신 분에게는 생수도 드릴게요!"
내가 박스에 있는 물품을 하나씩 들어 올려 흔들자 아파트 건물 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먹을 거엔 장사 없지'
그런데도 아직 숨어있는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때 성희가 맥주 다섯 개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왔다.
"맥주까지 드립니다! 게다가 시원해요!"
그 순간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으허!"
누군가의 탄성이 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크게 들려왔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 같았다.
"정말 다 주는 겁니까?"
술과 고기는 마다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자 다른 쪽 단지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내가 봤어요!"
"아니야! 내가 먼저 얘기했다고!"
"누구 먼저 주는 겁니까?"
생각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서로 먼저 음식을 차지하려고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음···.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는데?'
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왜 끼어들어!"
"저 새끼가 왜 반말이야! 다들 입 다물고 있으라며!"
"총을 쏠 줄 누가 알았어! 너 무슨 강도야?"
점점 말싸움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왼쪽과 오른쪽은 다른 아파트였다. 한쪽은 좀 오래돼 보였고 다른 쪽은 신축 느낌이었다.
두 단지 사람들의 사이는 원래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탕!
다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광역 방어막에 부딪힌 총알이 번쩍하며 연기로 사라졌다.
"한 번만 봐 드린다고 했는데"
난 천천히 블루건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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