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J1. 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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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얼굴이 아프다.
팔도 아프다.
아니 온몸이 아프다.
눈이 부시다.
아직 꿈속인 건가.
눈을 뜰 수가 없다.
조금씩 오감이 되돌아오자 현실이 순식간에 느껴졌다. 난 테이블에 엎드려있었다.
'아! 햇빛'
내 얼굴이 아침에 뜨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침이다. 여기서 이렇게 잠들었나?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고개를 들었다. 밤새 내 얼굴이 닿아있던 양 팔이 붉게 물들어있다. 팔이 저리다.
난 고개를 돌려 문밖 평상을 바라봤다. 어젯밤과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라면 파리 몇 마리가 접시 위에 날아다닌다는 거 정도
아직 어제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미 몬스터, 난 그놈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불편하게 자긴 했지만, 푹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싹 가시긴 개뿔, 더 피곤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라? 잠시만'
물이 미지근하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난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소시지 한 개, 오이 한 개, 바나나 한 개뿐이다.
그런데 냉장고의 작동음이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난 입구 옆에 각종 스위치가 모여있는 제어판을 살폈다. 우측 조명 스위치가 그대로 켜져 있다.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명이 꺼져있다.
'아!'
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괴물 따위가 나타난 거보다 더 두려운 상황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 급하게 운전석으로 가서 계기판을 살폈다.
'어?'
연료게이지가 한 칸이다. 그리고 그 남은 한 칸은 시뻘건 붉은 색이다.
왜? 어제 세 칸이나 남은 걸 확인했는데? 버스는 고작 창고에서 몇 미터 정도밖에 이동하지 않았는데?
난 거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냉장고의 전원이 계속 켜져 있었다. 그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와 인덕션을 사용했다. 냉장고에서 음식과 물을 몇 번 꺼냈다. 환풍기도 돌렸다. 그리고
외부 조명을 밤새 켜놓고 잤다.
'이런 젠장'
연료가 바닥났다.
'그래도 한 칸은 있는데?'
하지만 실내의 전원을 포함한 모든 기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저 한 칸은 그럼?'
아마도 이 버스의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적인 연료량인 듯했다. 저거마저도 사라지면 아마도 난 아주 난처해질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 연휴 전날에 실내등 켜놓고 퇴근하는 바람에 며칠 후 배터리가 방전되어 배달 시간을 지연시킨 적이 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던 신입사원 때의 기억이다. 추석 연휴 내내 켜져 있던 실내등은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트럭의 배터리를 보내버렸다.
'하아'
이렇게 연료가 금방 달아버릴 줄은 몰랐다.
난 혹시 몰라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켜봤다.
아무 반응이 없다.
어제 코르카 한 개를 넣었고 그러면 원래 두 개가 들어있었나? 코르카 한 개에 게이지 한 칸인가?
그건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코르카를 내가 넣기 전에도 버스의 기기들이 작동했으니 원래 연료가 아예 없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연료의 사용 비율을 알 수 없었지만 우선 지금 급한 건 다시 코르카를 구하는 거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디서?'
난 밖의 시골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상의 상황, 아니 지구 생명의 상황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하게 아침 햇살은 평소와 다름없이 쏟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평범하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골의 아침 풍경이다. 너무 평화롭다. 멀리 읍내에서 피어오르던 시커먼 연기도 사라졌다. 소음도 없다. 아침 새소리까지 들린다.
난 냉장고에서 바나나를 꺼냈다. 껍질이 시꺼멓다.
'바나나는 실온 보관 아닌가? 왜 기본 세팅이 냉장고지?'
뭐 상관없었다. 어디에 있든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다.
난 시들었지만 달콤한 바나나를 다 먹고 껍질을 버리려 쓰레기통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문밖으로 그냥 던지자니 기분이 영 찜찜했다. 폐허가 된 집이긴 해도 우리 집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싶진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왔다.
어제 주인을 잃은 그 접시는 그대로 평상 위에 그렇게 놓여있었다. 난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는 거에 계속 신경 쓰면 버틸 수 없다.
가을의 아침 햇살은 매우 강했다. 폐허가 된 집과 담장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고 밝아진 풍경에 멀리 다른 집들도 보였다.
그 집들도 여기와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다. 가로등도 모두 뽑혀 나가 아무렇게나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 날아가는 새가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도 들린다. 자연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단지 인간의 문명만 처참했다.
'사람이 있을까?'
난 바나나 껍질을 멀리 던지며 근처를 둘러봤다. 날씨가 좋아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괴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질적인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밤에만 나타나나?'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놈들이 밤에만 나타나면 밤까지 난 코르카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건 그거대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버스의 연료가 남아있다면 지금 읍내로라도 몰고 갈 수 있을 텐데, 어젯밤에 그냥 잠들어 버린 걸 후회했으나 이내 생각을 접었다. 바꿀 수 없는 건 미련을 버려야 한다.
난 잠시 거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여기 있으면 무한 캠핑카의 능력이 사라진 지금 그나마 남은 식량은 금방 바닥날 것이다. 그럼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음식 없이 버틴다고 해도 언젠가는 버스의 기본 연료까지 바닥날 거다. 그러면 이 버스도 더는 나의 방어막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겠지
난 어제 확인했던 휴대폰을 다시 꺼내 봤다. 여전히 전원은 들어오지 않는다.
난 일어나 창고를 뒤졌다. 생소한 작은 배낭이 보였다.
'아! 내 가방은?'
어젯밤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내가 메고 왔던 배낭을 깜박했다. 사실 그 안에도 별건 없었다. 무거워서 노트북은 자취방에 두고 왔고, 있는 거라고는 양말과 속옷, 그리고 티셔츠 같은 갈아입을 옷뿐이었다.
아! 지갑도 들어있다. 하지만 지금도 그게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난 마당으로 나가 가방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십 년은 쓴 가방이라 낡았지만 정들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난 다시 버스로 들어와 창고에 있던 작은 배낭에 반쯤 남은 생수병을 넣었다. 그리고 어제 사용했던 중검도 꺼냈다.
'방패가 필요할까?'
그래도 모르니 챙겼다. 팔에 끼울 수 있게 되어있어 왼손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게다가 무겁지도 않았다.
물 펌프가 동작하지 않아 세수도 하지 못했다. 원래 내 가방에 들어있던 물티슈가 떠오르긴 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난 나름의 준비를 마치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십 년이 흐르긴 했지만, 시골은 변한 게 별로 없었다. 아니 변하긴 했지, 어젯밤 부터 제대로 극명하게
난 천천히 우리 집 부근부터 살폈다. 혹시나 땅에 떨어진 코르카 같은 게 있나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지만 그런 행운 따윈 없었다.
난 뒷산 쪽으로 향했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주변 파악이 쉬울 것 같아서다.
산을 오르며 혹시 모를 대피로도 생각해뒀다. 유사시에 버스로 제일 빨리 뛰어갈 경로다. 아직 주변은 고요했다.
야산이라 오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산보다는 언덕이 더 어울리는 낮은 산이다. 오르고 보니 예전에 내가 자주 앉았던 작은 바위가 시야에 보였다. 아직 그대로다.
바위에 걸터앉아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여기 오르면 이 마을 전체가 다 보인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이젠 남은 집이 몇 채 없지만 예전에는 그래도 작은 구멍가게도 있었다.
'망원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을에는 우리 집 포함해서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각 집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긴 힘든 거리였다.
집 하나하나를 상세히 관찰했다. 누구네 집인지 다 기억이 난다. 다들 농사를 주로 짓던 시골 분들이다. 개중에는 읍내에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아···.'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 두 명이 문득 떠올랐다. 중학교에 가면서 다들 도시로 떠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시골에 남았지
'희성이 그리고 뭐더라···. 이름이···. 아 맞다 성희'
둘의 이름을 반대로 부르면 같은 이름이라 계속 놀렸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 우리 셋은 항상 몰려다녔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지'
언덕에 오르니 마을 단위의 추억이 떠오른 것 같다.
'다들 뭐하고 지내려나, 살아는 있을까?'
도시로 갔으니 아마 그 도시는 서울이겠지, 어렸을 땐 그냥 도시로만 불렀다. 아이들의 지역 단위는 단 두 개였다. 도시 아니면 시골
그렇게 추억에 빠져있을 때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저 새가 뭐였더라'
멀리서 볼 때는 그냥 매 정도로 봤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니 독수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동네에 독수리가?'
아 참 독수리는 맹수 아니던가? 난 벌떡 일어서서 방패를 들고 놈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런데
그놈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난 그제야 알게 되었다.
놈은 독수리도 아니다.
괴물이다.
난 아까 생각해둔 도피 경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놈과의 거리는 오십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또 그렇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버스를 향해 뛰었다.
그 와중에도 저놈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잡아야 할까, 코르카는 얼마나 나올까 하는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심장은 미칠 듯이 뛰고 있었지만, 생각은 의외로 그렇게 여유 있게 떠올랐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놈의 공포스러운 기운이 내 뒤통수 근처에서 느껴질 때쯤 난 가까스로 버스 입구를 향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끼이이익!
놈의 괴성이 뒤에서 들렸다. 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열린 버스 문 너머에 놈이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놈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평상 위에 올라서서 날 노려봤다. 놈의 발에 주인을 잃은 밥상이 엎어졌다.
'이 새끼가'
나도 놈을 노려봤다.
생긴 건, 마치 펠리컨 같기도 하고, 저어새 같기도 했다. 아···. 익룡의 모습도 있었다. 어쨌든···.
놈은 괴물이었다.
저 붉은 눈동자는 어젯밤 본 꺽다리와 못난이 괴물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이상한 느낌의 기운을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 나쁜 느낌,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괴기? 아니면 마기?
놈은 날 뚫어지게 노려보면서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버스 안에서는 검으로 놈을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다.
저놈만 잡으면 최소한 코르카 한 개는 나올 텐데, 그러면 방전된 버스를 다시 가동할 수 있을 테고, 이젠 연료도 아껴 쓸 텐데
그렇게 놈과 나는 서로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며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생명체지만 목표는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공통점이 있었다.
'아!'
난 문득 창고에 있던 활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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