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J1. 생존 본능
검은 그림자는 버스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다시 나에게 느리게 흘렀다.
놈의 날갯짓으로 일어난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머리칼도 흔들렸다. 성희의 머리칼도 날려 내 얼굴에 닿았다.
정수리 부근까지 접근한 칼날 발톱이 느껴졌다. 난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내 눈앞에 놈의 잘린 발이 초록의 피를 날리며 떨어졌다. 난 동작을 이어서 놈의 왼쪽 날개를 잘라냈다. 놈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버스 우측으로 떨어지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네 놈은 대체 뭐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그 질문에 대답하듯 놈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머리와 몸은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을 한 아이들의 몸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어른들도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아이들의 심정이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괴물 새끼들은 왜? 왜 이렇게 달려드는 것일까? 그냥 살생 본능? 지구의 생명에게 무슨 원수라도 진 건가? 아니면 외계 식신이라도 되나?
버스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날개가 다시 보였다. 방패를 성희에게 쥐여줬다. 그녀는 방패로 아이들을 보호하며 웅크렸다.
난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날개가 잘린다. 하지만 그사이 놈의 발톱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윽!"
난 짧은 신음을 냈다. 하지만 아플 겨를 따윈 없었다.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초록의 액체가 내 얼굴로 뿜어져 나온다. 하필 눈으로 쏟아졌다. 따갑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얼굴에 묻은 액체를 닦아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 검에 목이 찔린 놈은 버스 지붕 위에서 아직 버둥거리고 있었다. 난 눈을 감은 채 놈에게 연속해서 검을 찔렀다.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그렇게 계속 내 질렀다.
"죽었어"
성희의 음성이다. 난 두어 번 더 찌르다가 멈춘 후 발로 놈을 버스 아래로 밀어버렸다.
얼굴과 눈을 겨우 닦아내고 눈을 뜨려고 애썼다. 흐릿하지만 시야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야에 다시 그림자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오는 또 한 녀석이 보였다. 하지만 날 다시 공포심에 빠트리는 건 그놈 뒤 먼 하늘에 잠시 보였던 형체들이다.
십여 마리···. 아니 백여 마리는 넘는 것 같은 놈들이 높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 시발, 너무 많아!"
젠장, 어린이들 앞에서 말조심해야 하는데
그 사이 바로 머리 위까지 놈이 접근했다. 많아도 한 놈씩만 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코르카는 버스가 알아서 주워 먹을 거고 어찌 보면 이것도 개꿀 패턴일 수 있다.
난 다리와 날개 그리고 머리 순으로 생닭 분리하듯 그렇게 잘라냈다. 아 왜 갑자기 치킨이 생각나지?
"이 새끼들아 덤벼!"
내가 소리치며 위를 노려보자 이번엔 두 놈이 동시에 달려든다.
다수의 멧돼지 괴물을 동시에 상대한 적이 있다. 두 마리쯤이야
기름 데워라, 생닭 나간다!
라는 어이없는 생각으로 다시 놈들을 조각냈다. 그리고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난 검을 쥔 손목을 천천히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젠장
이번에는 시커먼 놈들이 동시에 여러 마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성희와 아이들도 위험하다.
"출입구로 가!"
아이들을 열려있는 지붕 출입구 위에라도 올려둘 생각이었다. 안으로 들여보낼 방법은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렇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희는 작은 나무 방패를 위로 치켜든 채 아이들과 아직 열려있는 지붕의 출입구로 기어갔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체 위에서 기어가는 느낌일 거 같을 텐데 아이들은 생각보다 잘 기어가고 있었다.
"구멍이 있어"
소년의 음성이다. 여동생도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은 보이는 거다.
여자아이가 안으로 손을 뻗었다.
"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그 손을 막았다. 마치 유리창에 부딪히는 것처럼 손이 튕겼다.
그때 갑자기 주차장 전체가 어두워졌다. 머리 위에서 수많은 거대한 날개가 해를 막고 있었다. 나도 급히 아이들 옆으로 이동했다. 성희가 작은 방패 하나로 세 명을 보호긴 어렵다.
머리 위에서 수많은 발톱이 느껴졌다. 그리고 난 다시 시간 흐름의 왜곡 속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수가 달려드니 검을 든 손을 빠르게 휘둘러도 놓치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닭발, 아니 괴물의 다리를 잘라내고 목을 베고 날개를 쳐냈는데 그사이 어느 놈의 부리가 내 등을 찌르고 지나갔다.
또 한 놈이 코앞에서 발톱을 휘둘렀지만 바로 옆으로 피한 덕분에 옷만 찢어지고 약간 긁히는 느낌만 났다. 그 틈에 다른 놈의 발톱이 내 볼을 스쳤다. 칼에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놈들의 머리와 날개 조각과 다리가 버스 지붕 위로 또 옆으로 무수히 떨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놈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난 팔을 베이고 머리를 쪼이고 날개에 맞아 휘청거렸다.
'시발 너무 많다.'
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아주 잠깐 성희를 살폈다. 무릎식신은 아직 발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익룡 같은 놈들한테도 무릎 찍기가 먹힐지는 모르겠다.
난 내 눈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발톱을 잘라냈다. 그 틈에 내가 놓친 한 마리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성희가 힘겹게 방패로 쳐냈다. 부실해 보였던 가벼운 나무 방패에 맞은 놈은 한 방에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냥 방패가 아닌데?'
다시 놈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희는 절묘하게 방패를 휘둘렀다. 놈들은 달려드는 그 힘을 역으로 그대로 돌려받은 듯 하늘로 튕겨 나갔다.
오!
방패가 그저 막아내는 정도로 쓰이는 게 아닌 거 같다. 받은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같은 능력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놈들의 끝이 없는 공격을 아주 조금 늦추는 효과뿐이었다.
"윽!'
팔에 통증이 일었다. 그 아픔은 다시 목을 지나 머리까지 전해졌다. 끔찍한 두통이 밀려왔다.
순간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틈에 어느 놈이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간 것 같다.
성희도 열심히 방패로 놈들을 쳐내고 있었지만, 우리 둘의 힘으로는 막아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악!"
내 등에서 괴물의 부리가 꽤 깊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난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엎어졌다.
숨이 막히는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쓰러져있을 수가 없었다. 난 팔과 다리 그리고 허리에 힘을 주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억!"
그때 어느 놈의 발톱이 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깊게 베인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엎드린 채로 몸만 돌렸다. 이제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다. 누워서 보는 광경은 더욱더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난 이를 악물고 애써 그 공포심을 누르며 놈들의 움직임에 더욱 집중했다.
누워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닿지 않는 위치에서 다리와 발을 공격하는 놈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난 몸을 비틀어 머리를 아이들과 성희가 있는 쪽으로 하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허리 아래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오히려 다행이다. 아프지 않아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렸다. 검 면이 내 배에 닿았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난 아직 움직이는 왼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찌르고 베었다.
놈들의 머리가 내 눈앞에서 반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초록의 액체가 그대로 내 눈으로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놈들은 내 하반신을 걸레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신경이 끊어진 건가?
성희도 방패로 쳐내는 게 힘에 부치는지 등으로 놈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괜찮은 것 같았다.
가망이 없어 보인다.
왼팔에도 힘이 점점 빠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순간 나는 또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포기하고 버스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나와 성희는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버스 위에 아이들을 두고 우리만 살아남으면 그게 살아있는 것일까?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죽는 거보다 그렇게라도 살아남는 게 사실은 정답일 수 있다. 오늘 처음 만난 아이들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까 할아버지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아이들의 미래에 괜한 오지랖을 부리며 끼어든 건 아닐까?
이제 왼팔의 힘도 거의 없다.
버스야, 넌 다른 능력은 없니? 예를 들어 공격이나 혹은 지붕 방어 쉴드 뭐 이딴 거 말이야.
하지만 버스의 능력 밖이다.
성희도 내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채 방패는 여전히 휘두르고 있다.
아직도 무릎식신은 발현되지 않고 있다. 정말 필요한 이때 그녀는 그저 일반인보다 조금 더 강한 상태 그대로였다. 설마 조금 전 못난이 놈들한테 한번 발현되어서 바로 다시 안 되는 건가?
난 문득 결심이 섰다.
"미안하다 얘들아"
아이들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성희라도 살아야 한다. 다 죽느니 우리라도 살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건 생존 본능이다.
숭고한 희생? 내가 죽으면 개죽음이다. 누가 슬퍼해 준다고 해서, 누가 감사해준다고 해서 목숨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난 지붕의 출입구를 바라봤다.
그런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저 안으로 몸을 던지고 침대까지만 가면 되는데
그러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텐데
넉넉한 쉴드로 당분간 버틸 수 있을 텐데
아 시발 근데 몸이 안 움직인다.
이제 놈들은 내 배를 찌르고 얼굴을 향해 달려든다.
젠장 이렇게 죽는 건가.
할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평생을 바쳐 버스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난 고작 며칠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자고 그런 계획을 세우진 않으셨을 텐데
할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을 내가 망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짧지만 또 길었던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딱히 아쉽진 않았다. 불행하지 않았지만, 또한 행복하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했던 그저 그런 삶
사는 게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것도 모르고 친척도 없고 또 어릴 때 삼총사 말고는 친구도 없다. 그 삼총사도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다들 떠나고 난 항상 외톨이였다.
그래 뭐 그저 무난하게 큰 고통 없이 살았다.
그거면 됐다. 시발
"으아아아아아아아!"
어?
이건 내 비명이 아니다.
그리고 성희의 비명도 아니다.
두 아이가 동시에 지른 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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