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J1. 주인 잃은 밥상
난 삼겹살을 다 먹고 싱크대의 덮개를 열었다.
'어라?'
아까 소시지를 담았던 접시가 깨끗하게 변해있었다. 마치 식기세척기에 넣어 놓은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이 버스가 나의 상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내 상상 그 이상의 무엇을 계속 보여줄 것만 같았다. 이미 이 버스의 연료부터 심상치 않았다.
난 테이블 위를 치우고 운전석으로 갔다. 이제 밖의 상황을 살펴볼 시간이다.
'아! 라디오!'
난 대시보드를 살폈다. 일반적인 자동차와 그리 다를 건 없었지만 아주 단순했다. 속도계와 연료게이지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램프 몇 개, 그런데 오디오는 없다. 아주 기본적인 라디오도 안된다는 거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필요 없으셨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자동차에 오디오가 없다니!
라디오에서 뉴스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너무 아쉬웠다. 난 시선을 창고 밖으로 옮겼다.
'이제 나가봐야지'
난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움직이기로 했다. 혜자스러운 버스 안에서 급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발걸음은 이제 신중해야 한다. 목숨은 하나다.
난 이전 직장에서 5톤 탑차를 몰았다. 이 정도 크기의 소형 버스는 문제없다. 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걸었다.
덜덜거리는 디젤의 엔진음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시동이 걸리는 느낌조차도 거의 들지 않았다. 마치 전원이 들어온 큰 전자기기 같았다. 전기차 지나갈 때 나는 소리와 흡사했다.
'그냥 버스가 아닐 줄은 알았다만'
난 악셀을 살짝 밟았다. 아직 이 차의 움직임에 대한 감각이 없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마침 좀 전에 몬스터가 문을 열어 놓은 덕분에 버스가 창고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있었다.
버스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바퀴가 땅을 구르는 소리만 묵직하게 들려왔다.
버스가 조금씩 밖으로 나가자 전조등에 비친 마당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별일 없어 보이는···.'
내가 창고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마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대문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부실한 담벼락도 부서져 길가의 돌무더기로 변해있었다. 이제 마당과 길의 경계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그 거대한 불덩이 때문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아까 봤던 수많은 괴물이 여길 스쳐 지나가면서 이렇게 된 거 같다.
'여기에서의 추억도 사라졌군.'
난 마당에 버스를 멈추고 밖을 살폈다. 우측 조명이 켜져 있어서 마당과 집의 모습이 잘 보였다.
집의 유리창은 모두 박살 났고 현관과 창문틀도 찌그러져 있었다. 집 내부는 살펴보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런데 그 앞의 낡은 평상은 희한하게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더러워서 놈들도 피해 간 건가?'
버스의 왼쪽은 낮은 담장과 내가 걸어온 길이 있는 쪽이다. 오는 길에 가로등과 드문드문 집이 있는 걸 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좌측 조명 스위치를 켜니 을씨년스러운 어두운 시골길이 공포스럽게 드러났다. 워낙에 인적이 드문 시골이긴 하지만 이 난리 통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아주 멀리 붉은 무언가가 아른거리는 것 같아 조명 스위치를 껐다. 가까운 곳이 너무 밝아서 오히려 멀리 있는 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읍내가 불타고 있었다.
난 순간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눈에 그 광경이 들어오자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불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환한 빛 위로 연기가 계속 나는 게 보였다. 아까 기묘한 밝은 빛과는 다른 느낌이다. 저건 인간의 문명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 그쪽에서 아득하게 폭음이 들려왔다. 영화에서 들었던 소음이다.
저 연기는 그럼 인간과 괴물의 싸움일 터
'어쩐다.'
내가 지금 간다고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괜히 돕겠다고 갔다가 총에 맞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버스가 괴물에게서 안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재래식 무기를 버텨낼 수 있을까? 폭탄이 터지거나 미사일이 날아오거나 혹은 총알이 날아들면 버스가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괴물도 마찬가지다. 이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고 공격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아까 그 괴물은 열린 문으로만 그 흉측한 손 아니 앞발을 뻗었을 뿐 보이지 않는 이 버스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아직 내가 알아야 할 게 많았다. 그건 내 목숨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더 살릴 수도 있는 누군가의 목숨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신중하자'
하지만 이 시골집에서 더 머문다고 내가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난 답답한 마음에 버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밖을 살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천천히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내 숨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난 마당을 둘러봤다.
이 부근은 고요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와 버스를 살폈다. 버스는 내 눈에 너무나도 잘 보였다. 버스 창 내부의 아늑한 공간도 훤히 잘 보였다.
'나만 보이나?'
괴물들은 확실히 못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지구의 생명체에게는 어떨지 아직은 모른다.
난 낡고 부서진 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릴 적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넘어져서 울던 기억, 할아버지와 삼겹살을 구워 먹던 추억, 모닥불 피워놓고 소시지도 먹었는데···. 아 맞다 그때 강아지도 잠깐 키웠던 거 같은데?
그 개가 어찌 되었는지 희한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 어릴 때라 그런가?
그때 집 근처에서 갑자기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난 급하게 다시 버스로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가 난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명이 비추는 쪽으로 그 형체가 다가오자 서서히 그 모습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저건?'
개였다.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종류는 아니지만 작은 개였다. 인기척이 들리자 이쪽으로 다가온 것 같다.
그 개는 이 버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인기척을 듣고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당황한 느낌이다.
난 다시 버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하얀 개는 허겁지겁 나에게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헉'
품종을 알 수 없는 시골 개였다. 흰색이었을 것 같은 털은 언제 목욕했는지 냄새가 진동했다. 목줄이 있는 걸로 봐서 누군가의 반려견이었을 듯싶었다.
난 길 쪽을 살펴봤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개는 마치 사람을 오래도록 보지 못한 것처럼 나를 보자 너무 반가워했다.
"배고프냐?"
난 개를 안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엇?'
버스 안으로 내 몸만 들어오고 개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개를 안고 있던 나의 팔에 순간 강하게 느껴졌던 그 감각은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힘이었다.
'이 버스는 나만 들어올 수 있나? 괴물만 막는 줄 알았더니'
내가 버스 안에서 개를 부르자 다시 입구로 들어오려고 다가오더니 이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막에 걸린 듯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개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창문 유리에 계속 도전하는 파리처럼
난 냉장고 문을 열고 소시지를 꺼내 칼집을 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리고 생수병도 꺼내어 물을 그릇에 담았다.
띵!
미지근하게 데워진 소시지와 물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냄새를 맡은 개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운 개는 양이 부족했는지 내 앞에서 계속 치근댔다.
난 잠시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개의 얼굴을 바라봤다.
"버스에서 같이 지내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불확실한 게 많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능성의 가짓수가 많으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단순했던 삶보다 더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생존 그거 하나뿐이다.
이렇게 밖에서 돌아다니면 개는 아주 위험할 거다. 하지만 저 밖의 수많은 지구의 생명들도 같은 상황이다. 그중에 나만 그나마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지,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난 버스로 들어가 삼겹살도 굽고 즉석밥도 돌려서 큰 접시에 개가 잘 먹을 수 있게 담았다. 그리고 마당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인 거 같다."
그리고 난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와 거실 시트에 앉아 문밖을 바라봤다.
개는 밥을 한입 먹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눈망울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거라도 고맙다고
그리고 그 개가 삼겹살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개가 사라졌다.
"뭐···. 뭐야!"
난 버스 창으로 다가가 마당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기다란 다리였다. 검은색 다리 여러 개
난 버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위를 바라봤다. 높은 허공에 개가 떠 있었다. 아니···. 무언가가 개를 물고 있었다.
시커먼 그 형체는 키가 전봇대보다 높아 보였다. 긴 다리가 여덟 개는 되어 보였고 머리는 작았다. 마치 거대한 거미 같았다.
그 거대 거미는 개를 입에 물고 버스를 지나쳐 읍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난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미약한 내가 저 거대한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공포다.
미지의 괴물에 대한 공포
그리고
거대한 크기에 대한 공포
난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괴수와 생사를 알 수 없는 개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난 주먹을 꼭 쥐고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개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음식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개는 그저 밥 한 입을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렇게, 그렇게 사라졌다.
난 잠시 멍하니 그렇게 주인을 잃은 밥상을 바라봤다.
만난 지 십여 분밖에 되지 않는 생명이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그리고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 기분이 왜 이러지'
아까 작은 괴물을 잡을 때는 뭔가 자신감이 솟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큰 무력감과 허탈감이 계속 밀려왔다.
'저런 놈들을 나 혼자 어떡하라고!'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은 불분명했다.
난 그렇게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주인 잃은 밥상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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