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J1. 폭우 속의 국도
하늘에서 갑자기 번쩍하는 불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몇 초 후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또 천둥?"
어느새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주변은 마치 밤처럼 어두워졌다.
쏴아아아
샤워기를 틀어놓은 거 같은 빗물이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좀 많이 오는데?"
성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지붕의 할아버지가 신경이 쓰였다.
테이블 옆에 있는 액정에는 아까부터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대기(1)]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버스에 닿았을 때는 승객 추가 확인 문구가 바로 떴지만, 그 이후에 같은 사람이 접근할 때는 이렇게 대기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때 이미 [아니오]를 눌렀지만, 김씨 할아버지가 버스에 닿을 때마다 대기는 계속 떴다.
난 잠시 생각하다 [대기(1)]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대기자 목록이 나타났다. 지금은 물론 한 명뿐이다.
난 하나뿐인 이름을 터치했다.
<김준배를 탑승객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난 잠시 그 메시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다시 창밖에 번쩍거리더니 이내 천둥소리가 들렸다.
'아! 그게 있었지!'
난 [아니오]를 누른 후 뒤편의 창고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뭐 찾아?"
"분명히 봤는데"
행복 마트에서 잡다한 물건들을 챙길 때 몇 개 던져놨던 게 문득 떠올랐다.
"여기 있다!"
난 창고 바닥에서 다른 짐에 깔린 납작한 물건을 꺼냈다.
"비옷?"
"비가 위험한 건 아니니까"
"벼락은?"
"주변 산이 높아"
버스 지붕 문을 열고 비옷을 건네자 할아버지는 잠시 물끄러미 비옷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받아들었다.
난 침대에 누워있는 짧은 머리를 잠시 살피다 성희에게 말했다.
"출혈은 멈춘 거 같다. 혹시 모르니 감시 부탁해"
난 운전석에 다시 앉은 후 액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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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 [한진우]
승객 [장성희] [추방]
승객 [최성운] [추방]
승객 [최성희] [추방]
승객 [나라]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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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이 여전히 승객 명단에 남아있다. 사실 그동안 계속 눈에 띄는 걸 외면하긴 하던 중이었다.
열린 운전석 창문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난 위로 소리쳤다.
"출발합니다!"
그러고는 바로 창문을 닫았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버스에 들였고 다른 한 명은 거부했다.
내 판단이 옳은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던 그 결과는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난 폭우와 어둠으로 인해 앞이 잘 안 보여 전조등을 켰다. 와이퍼는 최고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난 전방 시야 확보가 어려워 조심스럽게 버스를 출발시켰다.
"비가 너무 오는데?"
어두운 폭우 속을 간신히 달리다 보니 전방에 주유소가 보인다. 기름을 넣을 건 아니지만 주유구 위에는 지붕이 있다. 난 핸들을 틀었다.
"왜?"
"점심 먹고 가자, 시야도 너무 안 좋고"
부엌에는 성희가 만들다 만 주먹밥 재료들이 그대로 있었다. 아까 급하게 버스를 세우는 바람에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어 정리도 필요했다.
난 바닥에 나뒹구는 음식 재료를 청소했고 성희는 즉석밥을 다시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참치통조림과 다른 식재료들을 꺼냈다.
얼마 후 넉넉한 주먹밥이 만들어졌다. 난 검집을 둘러메고 주먹밥 몇 개를 접시에 담아 지붕 문을 열었다.
"직접 드리게?"
난 끄덕이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주유소 지붕 덕분에 그나마 비가 덜 들이치긴 했지만 바람에 날려 들어오는 빗물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우비를 입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빗속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정식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비에 젖어있었고 바닥도 빗물로 흥건했다.
"배수가 잘 안되나?"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으로 테이블 위의 빗물을 훔치고 주먹밥 접시를 올려놨다. 그때 지붕 문으로 생수병을 든 성희의 손이 나타났다.
난 생수병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잠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멀리 어두운 도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까 시내에서 강릉 가자고 계속 조르던 그 할아버지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아무런 대꾸가 없어 무안해진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지붕 문으로 걸어갔다.
"고마워"
내 뒤통수를 향해 그는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할아버지는 뒤돌아 말하는 걸 좋아하더니 듣는 사람도 뒤돌아 있을 때 말하고 싶었나?
"네"
난 조용히 대답하고 다시 안으로 내려왔다.
"끄으···."
들어오니 침대에서 신음을 내며 꿈틀거리는 빨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건가? 이름이 나라였었지'
테이블에서는 성희가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밥은 안 먹고?"
"생각이 없네"
난 자리에 앉아 그녀가 마시는 맥주 캔을 잠시 바라보다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저녁엔 고기나 구워 먹을까?"
"그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짧은 점심시간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순간 살짝 현기증이 돌아 손으로 급히 테이블을 잡았다.
"괜찮아?"
성희가 놀라며 물었다.
'빈혈인가?'
그런데 성희도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테이블을 잡고 가만히 서 있으니 묵직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난 계속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지?"
우리는 창밖 빗속을 유심히 살폈다. 그때 주유소 옆 계곡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작은 계곡을 전부 채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기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뱀인데?"
박물관 앞길을 막았던 거대 뱀과 같은 종류인 것 같다. 멀리서도 그 피부의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태백시 방향으로 가는 거 같아"
우리와 방향이 달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유민이네 동네로 가지 않을까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비만 아니면 포탄으로 잡아버리면 되는데 아깝다."
덩치를 보니 코르카도 엄청나게 나올 것 같았다.
"가서 때려잡아 볼까?"
성희가 맥주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눈을 번뜩였다.
"굳이 그럴 거까지야"
욕심은 화를 부른다. 괜히 나섰다가 죽을 수도 있다. [자동 접촉 파괴]를 키고 뱀에게 다가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지붕에 할아버지가 떠올라 포기했다.
내가 잠시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멀리서 움직이는 거대 뱀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 박물관에서 봤던 그놈이네···"
성희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빨간 머리 나라는 침대에 누워 옆의 작은 창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고개를 조금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았는지 신음을 흘렸다.
"좀 괜찮아?"
성희가 물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배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성희가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자 그녀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난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여전히 징그럽게 기어가고 있는 거대 뱀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 악셀을 밟았다. 비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 뒷산에 있던 그 거대한 존재는 뭐였을까?'
그날 이후 잊고 있었는데 오늘 거대 뱀을 다시 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제대로 본 건 맞을까? 산만큼 거대한 형체가 그렇게 소리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게 말이 되나?
기억에 대한 불신으로 조금이라도 안도감을 느끼려 하는 건 본능인가?
난 빗속에서 두서없는 잡다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버스를 몰았다.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달리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데 우측에 갑자기 뜬금없이 십여 채의 연립주택이 보였다.
'웬 산속에 덩그러니?'
오직 연립주택만으로 이루어진 마을 같아 보였다. 열 동이 넘는 연립주택과 작은 교회 하나가 있었고 근처에 다른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이 다 있네"
중얼거리며 지나치려는 순간 단지 쪽에서 어떤 움직임이 갑자기 느껴져 버스 속도를 줄이고 계기판을 살폈다.
[ 0 < 0 < 0 ]
"왜?"
성희가 다가오며 묻는다.
"저기"
난 창밖의 연립주택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뭘 본 거 같아"
성희도 계기판의 액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괴물은 아닌가 본 데?"
"근데 사람 같지도 않았어."
"뭐지?"
우리는 먹구름과 폭우 때문에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운 창밖을 계속 주시했다. 그런데 아까 언뜻 봤던 그 움직임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거 아냐?"
성희의 말에 나도 내 기억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폭우 때문에 착각한 건가?"
난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기고 버스의 속도를 다시 올렸다. 빗길에 약간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버스는 어렵지 않게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번개가 치는 그 짧은 순간에는 사방이 온통 밝아졌지만, 그때뿐이었다.
꽈르릉!
천둥소리는 유달리 더 크게 느껴졌고 사방은 이상하리만큼 어두웠다.
"아무리 폭풍우라고 해도 이건 너무 컴컴한데?"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도 거든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저녁인지 모르겠어."
버스에 커다란 액정도 있고 지도도 표시되는데 왜 시계만 없을까?
성희는 다시 거실로 걸어갔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이런 빗길에 미끄러지면 아무리 우리 버스라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특히나 뒤집히거나 옆으로 넘어지면 정말 난감할 것 같다. 버스가 스스로 일어서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얼마나 달렸을까? 단층 상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이다. 건너편에 주유소도 보였고 그 옆에는 식당과 중국집도 있었다.
"국밥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
난 잠시 버스를 멈췄다. 갈림길이다. 길만 대략 나와 있는 액정의 지도를 확인하며 잠시 고민했다.
"동해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 창밖을 살피던 성희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철도 건널목 쪽이야."
"어떻게 알았어?"
"위에 표지판"
난 우측으로 핸들을 꺾어 철도 건널목을 건넜다. 그때 전방에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이네? 세븐···."
"잠깐 보고 갈까?"
버스에 없는 통조림 같은 게 있을 수 있었다. 맨날 먹던 음식 말고 다른 게 그리웠던 우리는 시골 편의점 앞에서 군침을 흘렸다.
"왜 또 서?"
지붕 쪽에서 할아버지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다시 멘탈을 잡은 듯한 음성이다.
"편의점 보고 가려고요."
대답은 없다. 등을 보여야 대답하시려나?
시골 편의점이다. 생존자들에게 털렸을 가능성이 도시보다 낮다지만 아직도 멀쩡해 보이는 게 조금 이상했다. 유리문은 굳게 닫혀있고 게다가 깨지지도 않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여전히 시야는 좋지 않다. 나는 액정을 터치해 우측 조명을 켰다.
편의점 옆으로 여러 식당이 보였다.
"갈비탕, 설렁탕, 칼국수···."
나는 마치 처음 글을 배운 아이처럼 그렇게 간판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액정에 탐지 숫자는 모두 0이다. 생존자나 각성자만 경계하면 된다.
난 혹시 몰라 버스 옆문 앞으로 가 활에 화살을 걸었다.
빗소리 이외엔 고요했다. 아니 빗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가 있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성희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내 눈에 편의점 옆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먹다 남은 컵라면 여러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남은 면발과 국물, 그리고 나무젓가락의 상태를 보니 저건 최근에 버린 거다.
난 버스 문을 나가려던 성희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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