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J1. 동네 형
"뭐?"
난 내가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민머리 청년은 버스 안의 성운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난 급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쟤 알아?"
그러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저씨는 누군데 애들을 데리고 있죠?"
순박하게 보였던 청년의 음성이 갑자기 싸하게 느껴졌다.
"너는 누군데?"
내가 묻자 그는 다시 시선을 버스로 옮기며 대답했다.
"옆집 살아요."
"뭐?"
성운이 동네 형이었다. 여기는 아이들이 살던 동네 근처라 충분히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긴 했다.
그때 성희가 버스로 들어가서 성운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아이는 버스 창문에 얼굴을 바짝 데고 청년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아는 사이라고 해도 머리칼과 눈썹이 사라지면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냥 봐도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성운이는 이제서야 알아본 듯 갑자기 밝아진 표정으로 손을 마구 흔들었다.
청년이 버스 가까이 다가가자 성운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뒤에 있던 성희가 다시 창문을 닫더니 아주 조금만 열어줬다.
"미니 형아?"
청년은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성운아, 어떻게 된 거야? 성희는?"
그때 창 아래쪽에서 작은 성희의 얼굴이 올라왔다.
"오! 같이 있었네?"
"형아 엄마 봤어요?"
성운이는 동네 아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엄마에 관해 물었다. 하지만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못 봤어, 그날 전에도"
성운이의 표정이 굳었다. 작은 성희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오빠도 버스 타요. 집에 같이 가자"
"뭐? 이게 움직여?"
그는 놀란 표정으로 버스를 살피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젠장, 버스 움직이는 거 기억 못 했을 텐데'
난 상황 봐서 길거리에 방치된 버스에 우리가 숨어있던 거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이젠 글렀지만
"아···. 그게"
그런데 그때 청년은 갑자기 뭐가 떠오른 듯 동공이 커지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맞다···. 아빠"
"왜 그래?"
"저···. 약 구해야 하는데···. 그래서 나온 건데"
"뭐?"
청년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동네 형이라 해도 아까 버스를 머리로 들이박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무슨 약? 어디 아프셔?"
내가 청년의 어깨를 잡고 물어보자 그가 당황한 듯 떨며 대답했다.
"물리셔서"
"뭐? 괴물한테?"
"사람같이 생긴···. 제가 죽이긴 했는데···."
젠장 인간형에 물린 것 같다. 그럼, 감염자다.
"약이 떨어져서···. 구하러 나왔는데···."
약이 떨어졌다는 게 무슨 말일까? 감염되고 아프니까 약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가? 이미 변이된 건 아닐까?
본인은 모르고 있거나 혹은 그 충격에 정신이 나갔을 수도 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저 가봐야겠어요."
그런데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바지만 입은 채 멀리 뛰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안타까웠다.
"상의라도 챙겨줄걸"
그나저나 그가 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알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다시 눈이 뒤집힌 채로 버스나 들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들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이 뛰어간 방향은 언덕 쪽이 아니었다. 옆집 산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로 간 거지?
"아저씨 노란불!"
난 다시 버스에 올라 청년이 사라졌던 방향을 바라봤다. 청년을 뒤따라가는 못난이 두 마리가 보였다. 놈들이 안쓰러웠다.
난 버스를 출발시켰다. 날은 어느새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저 민머리 청년 때문에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그나저나 청년도 옆집 사람들을 한참이나 못 봤다고 했는데 지금 가는 게 무슨 소용일까?
룸미러 너머로 아이들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 집은 저 아이들이 부모와 살던 곳이다. 집에 지금 누가 있든 없든 우선은 집에 가서 이후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뭔가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옆집 가족이다. 녀석의 가족이 물렸다면, 그리고 그 물린 가족이 여전히 집에 있다면 위험하다.
난 전조등을 키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랐다. 경사가 꽤 급했지만, 버스는 어려움 없이 잘 올라갔다.
"우리 집이다!"
작은 성희가 소리쳤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교회가 마침내 눈앞에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수많은 빌라 건물이 있었다.
"저기 태백빌라예요."
성운이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비슷한 외형의 빌라들이 잔뜩 모여있는 골목이지만 아이들은 자기 집을 확실히 기억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앞까지 버스가 들어갈 정도로 길은 좁지 않았다.
마침내 아이들의 집에 도착했다. 나는 빌라 입구에 천천히 버스를 세웠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내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동네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 우리 버스가 아무리 일반인과 괴물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또 어떤 위험이 닥칠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대시보드의 탐지 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빌라촌 골목은 어두웠다. 불이 들어온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스산한 바람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선 아직 조금 남아있는 검붉은 노을이 마치 괴물의 눈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우리는 그 빌라 앞에서 그렇게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몇 호니?"
"102호에요"
성운이의 음성이 힘없게 들렸다. 작은 성희는 집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창문의 불도 꺼져있고 동네 자체가 너무 어둡고 인기척 없으니 무서운 모양이었다.
내가 버스의 우측 조명을 켜자 빌라 입구가 환해졌다. 건물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깨진 유리창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 빌라촌 건물들은 대부분 온전해 보였다.
'이쪽으로는 안 왔나?'
그런데 옆집 산다는 그 청년은 대체 어디로 뛰어간 걸까? 부모님과 아직 집에 살면 다시 여기로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건 탐지 램프는 여전히 반응이 없다는 거다. 그의 부모가 이 집에 있다면 아직 변이 전이라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곳에 있다는 얘기
난 검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빌라 일 층을 살폈다. 일 층엔 두 집뿐이었다. 계단 양쪽으로 한 집씩 있는 작은 4층짜리 빌라였다.
의미 없겠지만 난 102호의 문을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주변을 계속 살폈다. 탐지 등이 들어오면 버스에서 성희가 경적을 울릴 거다. 아직 괴물은 없는 거 같다.
난 다시 한번 소심하게 문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난 어두운 계단 위쪽이 신경 쓰여 그쪽으로 고개를 뻗어 살피는데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런데 102호가 아니다. 옆집이다. 101호 민머리 청년의 집
부모님이 아직 집에?
감염자로 추정되는 그 사람들이 지금 집에?
쿵!
그때 버스에 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까처럼 부수려고 때려 박는 소리가 아니라 뛰어오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부딪힌 소리다.
내가 밖을 살피니 바지만 입은 민머리 청년이 뭔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너?"
다행히 청년의 눈은 정상이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보니 아마도 어디선가 약을 구해온 모양이다.
청년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급하게 자기 집 문을 열려고 했다.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던 곳은 뜯어냈는지 비어있었고 열쇠로 여는 동그란 손잡이만 문에 달려있었다.
청년이 열쇠를 꽂고 돌리려 할 때 내가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한번 불러봐"
"네? 얼른 들어가야 해요! 이거 놓으세요!"
그는 너무 늦게 약을 구해와서 그런지 정말 마음이 급해 보였다. 하지만 이 문을 열면 지옥도가 펼쳐질 수 있었다. 변이되었다면 인간형 괴물이 한꺼번에 둘이다. 그리고 그걸 이 청년이 목격하면 그 충격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탐지 등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괴물이 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인간도 아닐 수 있다.
"물리셨다며!"
"빨리 약 드셔야 해요! 놔요!"
청년은 내 손을 뿌리치고 열쇠를 돌리며 동시에 손잡이도 돌렸다.
"아 씨!"
난 다시 버스가 있는 입구 쪽으로 피하려고 급히 움직였다. 그런데
"유민아! 왜 이렇게 늦었어?"
어? 사람의 음성이다.
"엄마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아빠는?"
"해열제 드시고 주무셔"
갑자기 엄마와 아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오자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 대화는 앞으로 다시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다.
청년은 주변에 있는 우리보다 당연히 아버지의 약이 우선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사라지고 운동복 바지 하나만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주머니는 놀라기는커녕 언급조차 없었다.
"이거 더 드셔야 해요. 항생제랑···. 뭐더라···. 그 드시던 거, 그리고 먹을 거도 구해왔어요."
"그래그래···. 얼른 들어와"
아주머니는 어두운 계단에 멍하니 있는 날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
나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당한 것도 참 오랜만이다.
101호 청년은 버스나 우리는 아예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이들과 친한 거 아니었나? 벌써 잊었나?
난 그 집 앞으로 가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물어볼 게 있었다.
그런데 안에서 사람들의 음성은 들렸지만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난 다시 문을 세게 두드렸다.
"이봐! 이야기 좀 하지?"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민머리 청년의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 미안해요. 아버지 약 때문에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때 언제 버스에서 내렸는지 성운이와 작은 성희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미니 형아"
청년은 이제서야 기억이 떠올랐는지 놀란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팔을 살짝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 성운아, 미안 미안 내가 깜박했다. 요즘 자꾸 잊어먹어···. 그런데 어? 버스가?"
그는 이제서야 아까 봤던 그 버스가 빌라 입구에 있는 걸 인지한 듯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버스가 움직여요?"
참 빠른 질문이다. 이렇게 무신경한 사람을 봤나!
"누구 오셨어?"
집안에서 청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통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집은 너무 일상인데?
이제는 그 평온한 모습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어머나 성운아! 성희야!"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신발도 안 신은 채 뛰어나와서 끌어안았다.
"너희가 어떻게 왔어? 엄마는 어딨고?"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시골에서 만나서···. 제가 데리고···."
길게 설명하기도 애매해서 머뭇거리는데 청년이 입을 열었다.
"애들 우리 집에서 자주 밥 같이 먹었어요. 성운아 성희야 들어가자"
아주머니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얼른 들어오세요."
난 고개를 돌려 여전히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성희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상황을 주시하다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혹시 우리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어쨌든
멸망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집에 마치 일상처럼 초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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