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J1. 대화
우리는 자루를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잠갔다.
'이전엔 흰색 등도 들어오더니 계속 노란불부터 시작이네'
우리는 매장으로 돌아와 버스 너머 마트 주차장을 살폈다.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난 다시 태형이와 함께 창고로 돌아가 작은 철문 옆에서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이내 자루를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그리고 제발 그다음 소리는 들리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바람이었다.
짜직 짜직 짜직
이 소리를 허술한 철제문 하나를 두고 바로 옆에서 들을 줄이야.
놈들이 피 냄새를 맡은 건가?
이건 분명히 못난이들 소리다. 어젯밤 거대 괴물을 뜯어먹는 소리와 똑같았다.
젠장, 우리는 놈들에게 먹이를 가져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놈들 몇 마리 정도라면 나가서 다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밖의 상황을 모른다. 괜히 이 문을 열었다가 내가 막지 못하면 오히려 놈들이 안으로 몰려 들어올 것이다.
난 그렇게 밖의 처참한 소리를 참으며 잠시 고민하다 태형에게 말했다.
"여기 보고 있다가 이상하면 바로 알려줘"
그에게 뒷문의 감시를 맡기고 난 다시 버스 쪽으로 뛰어갔다.
"앞쪽은 별일 없지?"
밖을 살피던 성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지 램프를 살펴보니 노란색이다. 그런데 같은 노란색이어도 빠르기가 다른 것 같다. 그 램프는 천천히 깜박이고 있었다.
난 지붕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트 건물 벽에 붙어 조용히 뒤쪽으로 이동했다.
놈들의 끔찍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짜직 짜직
난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쪽을 살폈다.
못난이 두 마리다. 고작 두 마리
난 검을 위로 쳐들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놈들은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코앞에 다가가고 나서야 놈들은 입에 사체 조각을 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미처 다 들지 못했다.
두 놈의 대가리가 동시에 날아갔다. 그리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한참을 굴러갔다.
머리를 잃은 괴물의 몸통은 한동안 경련을 일으키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놈들은 죽기 직전 자기 몸통이 쓰러지는 것을 본 것처럼 붉은 눈알을 굴리다 이내 연기로 변했다.
난 바닥에 있는 코르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시멘트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엇?"
고개를 돌리니 마트 옥상에 뭔가가 있었다. 그쪽으로 햇빛이 강하게 비치는 바람에 눈이 부셔 윤곽만 보였으나 난 놈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꺽다리다.
고작 한 놈
난 뒤쪽으로 거리를 벌리고 놈이 움직이기 기다렸다.
'음?'
그런데 놈은 옥상에서 날 노려보기만 할 뿐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려와서 움직임을 보여야 패턴을 읽을 수 있다. 놈은 내가 먼저 공격하기도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하아'
시간이 흘렀지만, 놈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날 지켜보고만 있다. 희한한 놈이다.
놈이 저러고 있으니 마트 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기도 애매했다.
난 정문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며 놈을 관찰했다. 놈도 내가 움직이는 쪽으로 옥상에서 따라왔다. 하지만 여전히 내려오지는 않고 있었다.
"너 뭐냐?"
어이가 없어 말을 걸어봤지만, 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내 말을 씹은 것처럼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놈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괴물의 표정이 오랜만에 보이네'
난 버스 지붕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녀석이 있는 옥상까지는 닿지 않았다. 간신히 손으로 난간을 잡고 힘겹게 오르면 될 것도 같았지만 그러다 놈이 공격이라도 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버스 지붕에서 놈을 바라보자 놈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에 만났던 꺽다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놈의 눈빛이었다. 예전에 만난 놈들은 그저 살육이 목적인 것처럼 붉고 호전적인 눈빛이었다면 놈은 그저 궁금한 게 많은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눈빛을 읽는 거지?'
게다가 놈의 손···. 아니 앞발도 다르게 생겼다. 칼날 같은 발톱은 보이지 않았고 뭉툭한 게, 마치 무언가를 조작하는 사람의 손 같은 느낌이었다.
"너 뭐야?"
놈에게 다시 말을 걸어봤다. 놈은 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놈의 벌린 입은 처음 봤다. 마치 생선 이빨처럼 촘촘하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백 개는 되어 보였고 그 안에 세 개의 혀가 동시에 움직였다.
뀌이이이 꾸이 끼이 꽈이
그 혀들이 움직이며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살기가 넘치던 놈들이 지르던 괴성과는 다른 어떤 언어같이 들렸다.
하지만 내가 놈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영어도 힘든데 괴물의 언어라니
그런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느낌은 전율 같기도 하고 어떤 설렘 같기도 했다. 마치 약한 전류가 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뭐지?'
나도 공격할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상한 기분에 잠식되면 안 된다. 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그런데 놈은 여전히 답답한 표정으로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의 운율을 그 흉측한 입으로 연신 뱉어냈다.
"아씨"
하지만 놈도 괴물이다. 저놈의 저의가 뭔지는 모르겠다. 항복하라는 건가? 그러면 살려는 드릴게?
"뭐해?"
내가 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지붕 출입구가 열리며 성희가 올라왔다.
"뭐···. 뭐야!"
성희는 마트 옥상의 꺽다리를 발견하자마자 놀라며 나의 팔을 잡았다.
'아니 왜 팔을, 네가 더 무서운데'
놈은 붉은 두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갑자기 앞발을 들었다. 그런데 그 움직임에서 공격성은 보이지 않았다.
뀌이이이이이
그때 하늘에서 익숙한 괴성이 들려왔다. 지붕의 놈이 낸 게 아니라 공중에서 들려온 것이다.
갑자기 날괴물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난 급히 방패로 하늘 쪽을 막았다. 하지만 날괴물은 우리에게 날아오는 게 아니었다.
놈은 앞발을 뻗은 꺽다리를 잡더니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성희의 살기를 느꼈나? 마치 탈것을 부르는 행동처럼 보이더니 그렇게 날괴물을 타고 사라졌다.
우리는 놈이 사라진 쪽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램프 꺼졌어요."
성운이의 말이다.
"수고 많았어 성운아."
아이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는다. 작은 성희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역시 졸음은 공포보다 강하다.
난 버스 옆문으로 마트로 들어가 다시 창고로 향했다.
"밖은 어때?"
날 보자마자 태형이 물었다.
"못난이 두 놈, 제거했다."
"못난이?"
우리가 부르는 이름을 그가 알 순 없을 것이다. 딱히 설명할 필요성도 못 느껴 대답하지 않고 난 철문을 바로 열었다.
자루는 못난이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루를 다시 수습하고 비어있던 큰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무거운 뚜껑을 닫았다.
"놈들이 씹어 먹는 거보다는 나을 것 같아. 이거 때문에 또 몰릴지는 모르겠지만 마트 안에 둘 수는 없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뭔가 해야 할 거 같아서 움직였지만, 저 사체 조각들이 다시 괴물들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부의 사람들을 살폈다. 사람들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생존자 중에 그래도 중상자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할머니도 거동하시는 걸 보니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마트 안의 건식품들을 하나씩 들고 영혼 없는 표정으로 씹어먹고 있었다. 과자나 김 혹은 땅콩 같은 거다.
물도 아직은 넉넉해서 버스에서 나눠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근처에 널브러진 접이식 의자가 보여 펼쳐서 앉았다. 그때 태형이 캔 커피 두 개를 들어와서 권했다. 받아 드니 미지근했다. 상관없었다.
그가 내 옆에 앉으며 말없이 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딱히 입을 열진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너무 정신이 없다. 아니 그날부터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너무 달려온 거 같다.
아직 오늘 하루는 반이나 남았다. 남은 시간 동안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은 괴물들도 이만 좀 퇴근하면 안 되나?
마트 사람들을 처음 발견했을 땐 내가 모르는 어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들과 내가 아는 정보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니 오히려 내가 아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이들은 그저 죽음의 공포에 치이며 발버둥 치다 겨우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일 뿐이다.
오히려 아까 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괴물 놈이 뭔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뭐 대화가 통해야 말이지'
성희는 버스 옆문으로 날 잠시 바라본 후 문을 닫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도 많이 지쳤을 거다.
"초등학교 때 성희 맞지?"
침묵하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많이 늙었네"
그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고작 서른이다."
그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
하지만 그날들을 다 살아갈 수 있을지 나도 모르고 그도 몰랐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런 세상에 적응하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아남아서 또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총각"
그때 할머니가 다가오며 뭔가를 내미셨다.
할머니의 손에는 쌀 과자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있길래, 좀 먹어"
난 의자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받았다.
"네, 고맙습니다. 힘드신데 쉬세요."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난 손에 들려진 쌀과자 봉지를 바라보며 갑자기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드셨던 과자다.
'할아버지는 정말 어디 계신 걸까? 십 년 동안 연락도 없으시더니 갑자기 문자를 보내시고'
내가 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태형이 입을 열었다.
"십 년 만에 연락이 왔다고?"
어? 너한테 그 말은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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