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J1. 소년의 선택
대여섯 살 정도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온몸이 피 칠갑이 되어있는 아이는 충격을 받은 듯 울지도 않고 있었다.
난 할아버지 옆을 지나쳐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아, 나쁜 사람들 아니야."
하지만 아이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급히 검을 겨누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라가 한 여성을 부축하며 함께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놈은 어쩌고?"
"묶어서 매달아 놨어. 쇠사슬이 많더라고"
이전 집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쇠사슬이 떠올랐다.
"어···. 엄마아아아!"
아이는 그 여성을 보더니 바로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왔다.
"지율아···."
아이가 달려오다 피가 흥건한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어···. 엄마···."
아이의 엄마는 간신히 아이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고는 꼭 안아줬다.
갈가리 찢긴 동물의 사체로 피바다가 되어있는 거실에서 피 칠갑을 한 아이와 엄마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서로 안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나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성희가 부르더라고, 지붕에 있던 저 아줌마가 아이 보러 가야 한다고 계속 그랬나 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모자 상봉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선 여기서 다 나가시죠."
계속 이런 참혹한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다른 방을 계속 살피더니 부엌 쪽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클리어다. 쿨럭"
"미드 좀 보셨나 봐요?"
"뭔드?"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가 필요했다. 피를 너무 많이 봤다.
"집 안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 쿨럭"
공동현관으로 나오니 버스 지붕에 생존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성희가 그들을 살피고 모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옆 이층 난간에는 쇠사슬에 묶인 사내가 매달려있었다.
"저기는 어떻게 올라갔데?"
나라는 씩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난 놈에게 다가가 물었다.
"머물던 동호수, 특히 대장 놈"
"끄윽···. 뭐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녀석은 침을 질질 흘리며 웅얼거리더니 간신히 모두 불었다. 이쪽 아파트 단지 다섯 집에 분산해서 놈들이 머물고 있었고 건너편은 배신자라던 천반장 집 하나뿐이었다.
소총을 써서 저격수라고 부르기도 뭣한 총잡이들이 있던 집들은 그저 감시초소 정도로만 사용했었던 거 같다. 건너편 1102호에도 그다지 물품이 없었다.
여기 강도단이 머물던 집에는 많은 식료품과 생필품이 있을 거다. 그건 단지 사람들의 집에서 긁어모은 거다. 이제 그 물품이 이들을 당분간 연명할 수 있게 해줄 거다.
그 집들을 지금 돌아보고 싶었지만 나도 우리도 모두 지쳤다. 그리고 심한 허기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식사하시면서 좀 쉬고 계세요"
"어디 가게?"
성희가 버스 지붕에서 일어서며 묻는다.
"금방 올게, 그 아이 혼자 저쪽에 있어서"
난 매고 있던 총을 나라에게 건네고 단지 밖으로 나섰다.
다시 건너편 단지 쪽으로 걸어가는데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너무 무리했나?'
땅이 조금씩 울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지진 같은 진동은 아니다. 뭔가 묵직한 파동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난 소년과 헤어졌던 건물 일 층으로 들어섰다. 녀석을 불러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름을 모른다.
'왜 이름을 묻지 않았을까?'
녀석이 3층 어딘가에 집이 있다고 했다. 집으로 갔나 싶어 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설마?'
붉은 눈 거미가 내려갔던 지하 주차장은 버스에서 한숨 돌리고 모두와 상의한 후 가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접근하기는 위험하고 다들 강도단 무리 때문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년은 그동안 지하 주차장에서 숨어지냈다. 습관처럼 내려갔든 아니면 수상한 움직임을 느끼고 내려갔든, 녀석은 지하로 다시 내려간 거 같다.
난 검을 쥐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탐지 램프의 숫자가 바뀐 건 발견했다.
[ 0 < 2 < 0 ]
건너편 단지에서는 원거리 괴물 1마리였다. 가까이 다가온 지금 중거리가 1이어야 하는데 2가 되어있다.
터널에서도 거미 한 마리뿐이었는데 2로 표시가 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의문의 초록 방벽이 1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설마?'
지하로 내려가 열려있는 주차장 문으로 다가가자 내 예상을 현실로 보여주듯 옅은 초록의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젠장'
여기 내려온 붉은 거미가 터널에서 방벽을 넘어갔던 바로 그놈인지는 모르겠다.
그놈이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 수많은 놈들이 여기에 있다가 한 마리씩 넘어가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전 터널과의 공통점은 인간의 시체가 많다는 거다. 이놈들이 먹잇감을 옮기기 위해 초록 방벽을 여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시체 더미는 아까 그 상태 그대로였다.
지하 주차장은 초록의 불빛 덕분에 내가 굳이 팔의 조명을 켜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앞이 잘 보였다.
난 점점 초록의 빛이 강해지고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차장 모퉁이를 돌자 이전에 봤던 그 초록의 방벽이 마침내 눈앞에 드러났다.
방벽은 기이하게 흐물거리며 주차장 한쪽 면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하아'
소년만 버스로 데려올 생각으로 가볍게 여기로 왔는데 혼자서 이 상황을 맞이했다.
'돌아갈까?'
그래야 했다. 지금 여기서 혼자 무슨 일을 벌이다가 버스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초록 방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방벽 너머에는 절대 지하 주차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봤던 기이한 나무들이 그대로 보이긴 했으나 크기가 작았다. 그리고 지형도 경사가 보이는 게, 마치 높은 산 정상 부근인 것 같은 느낌이다.
초록 방벽 아랫부분에서 그때 거미가 넘어갔을 때 봤던 붉은 부분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늦었네'
붉은 영역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거미 놈이 이미 넘어간 거다.
방벽 가까이 다가가자 붉은 영역 너머 아래에 사람이 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소년이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기묘한 상황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주변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발에 뭔가 닿는 게 느껴졌다.
소총 두 자루다.
어차피 탄창도 없어서 녀석이 여기에 놓고 넘어간 모양이다.
붉은 영역은 내 머리 크기 정도로 작아졌다. 녀석은 다시 이쪽으로 올 수 없고 나도 넘어갈 수 없는 상태다.
난 아까 챙겼던 탄창 두 개를 각각 다시 꼽고 두 자루의 소총을 바로 붉은 영역으로 집어넣었다.
꿀럭 꿀럭
소총만 집어넣는 데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소총 두 자루는 그렇게 꿀렁거리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방벽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소년의 다리에 총열이 닿았다. 녀석은 깜짝 놀란 듯 뒤를 돌아봤다. 초록 영역으로는 이쪽이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녀석이 볼 수 있는 건 넘어간 붉은 영역뿐이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탄창이 다시 채워진 소총이 넘어오는 걸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녀석은 문득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더니 작아지고 있는 붉은 영역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녀석의 시선에 맞춰 나도 엎드렸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희성이를 찾아! 난 진우야!"
녀석이 내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귀를 쫑긋 세우는 느낌이 들더니 내 입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 희성이! 할아버지!"
난 몇 번 반복해서 녀석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붉은 영역은 완전히 사라졌다.
난 녀석의 모습을 아직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마도 녀석은 이제 완전히 그쪽의 세계만 보일 거다.
소년은 잠시 멍하니 엎드려있더니 소총 두 자루를 집어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나무와 수풀이 높지 않아 산 아래 펼쳐진 드넓은 초원 같은 것도 보였다. 구불구불한 강도 있었다. 하지만 저건 지구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 지형이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주변에 소년 이외에는 다른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저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어딘가에 사람들이 있다. 녀석이 넘어간 이상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을 만나야 한다.
초록 방벽은 지하 주차장 천정에서부터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난 방벽 너머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양쪽으로 움직이며 계속 살폈다.
그때 산 아래 아주 멀리 기이한 움직임의 생명체가 보였다. 멀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여태껏 접한 어떤 괴물도 동물도 아닌 건 확실했다.
초록 방벽은 어느새 전부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매캐한 연기가 지하 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지하는 다시 심연 같은 어둠에 빠져들었다. 매캐한 연기 때문인 건가, 아니면 후각이 익숙해진 건가, 시체 썩는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난 팔의 조명을 켜고 주변을 잠시 살폈다.
시체의 산은 그대로 있었다.
'어?'
그런데 시체의 상태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서 살폈다.
쌓여있는 형태가 아까와 거의 똑같아서 거미의 먹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본 시체들의 상태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건 미라였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지하무덤에 있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냄새가 사라진 건가?'
거미가 단순히 못난이처럼 시체를 뜯어먹을 거로 생각했던 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붉은 거미가 시체가 많은 곳에서 나타나는 건 시체에서 얻을 게 있었기 때문일 거다.
놈은 놈의 방식대로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을 가져갔다.
초록 방벽을 놈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소환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시체에서 무언가를 취하고는 다시 그쪽 세상으로 넘어가는 거 같다.
"여기서 뭐 해?"
계단 쪽에서 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왜 왔어?"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며 무언가 말하려다 내 팔의 조명에 비친 시체 더미를 보고는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저···. 저게···?"
난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버스로 돌아가자, 가서 얘기해줄게."
그녀는 잠시 움직임이 없이 멍하니 시체 더미를 바라보다 천천히 날 따라 걸어 나왔다.
"여기 단지 주민들인가?"
버스로 걸어가며 나라가 물었다. 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지붕에서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도 찾으러 가려던 참이야 쿨럭"
"할아버지도 잠깐 안으로 내려오세요."
성희는 이미 버스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나라와 나는 버스 옆문으로 들어갔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성희가 물었다. 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서 따고 벌컥벌컥 들이키며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나라와 성희도 앉았고 할아버지도 지붕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말했다.
"뭔 일이여?"
"잠시만요"
난 액정에서 아까 꺼놨던 광역 방어막을 다시 켰다. 지붕에 일반인뿐이라 우선 안전하게 보호해야 했다.
난 잠시 그들을 돌아보다 입을 열었다.
"붉은 거미가 지하 주차장에···."
난 소년을 처음 만난 이야기부터 모든 이야기를 빠짐없이 다 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더니 생각에 잠긴 듯 아무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또 열려서 들어갈 수 있다면 말이야."
나라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있을까?"
할아버지도 입을 열었다.
"거기를 왜 가야 하는 거여 쿨럭"
성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같이 버스가 진화할 때 꿈이 아닌 꿈을 꿨다. 아마도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희성이와 태형이가 있을 거다.
우리가 그곳에 간들 뭐가 달라질까?
세상이 멸망한 이유라도 밝히려고?
아니면 할아버지와 친구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서 다시 이 멸망한 세상으로 데려오려고?
그곳에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곳과 여기가 다르지 않다.
거기 있는 사람들과 여기 있는 우리는 각자 있는 위치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캠핑카를 남겨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다.
"꺄악!"
그때 지붕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생존자들이다. 난 팔의 액정을 살폈다.
[ 0 < 14 < 82 ]
잠잠한가 싶었는데 괴물이다. 일단 다행이었다. 생존자들이 다 지붕에 모여 있어서
광역 방어막을 켜 놓길 다행이다. 난 일어서서 지붕 계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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