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J1. 폭풍우
"전부 변이된 거야?"
내가 묻자 깡마른 청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 위로 붉은 노을이 비쳤다.
'벌써 저녁인가?'
한 달을 같은 일상으로 반복하다 보니 이제 시간의 흐름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인간형 괴물이 좋아하는 밤이다.
"언제 그랬던 거야?"
깡마른 청년은 힘겹게 실눈을 뜬 채 대답했다.
"이···. 이틀 전에···."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가늘게 말했다.
"그···. 그동안 숨어있다가 오늘···."
하지만 깡마른 그 청년은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미약하게 쉬던 숨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난 옆의 덩치로 시선을 옮겼으나 그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숨소리가 들려"
갑자기 그들의 상태를 살피던 민희 누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상처도 물린 상처 같은데?"
그들을 살피던 성희의 말이다. 난 천천히 두 청년을 다시 내려다봤다.
"끄아아아악!"
"아씨! 깜짝이야!"
난 벌떡 일어섰다.
깡마른 청년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흰자위만 보인 채 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세요!"
난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나도 거리를 벌렸다.
청년의 몸부림은 이내 심한 경련으로 바뀌었다. 그때 옆에 누워있던 덩치 청년도 입에 거품을 물며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끄어어억!"
두 청년의 입에서 나오던 하얀 거품은 찐득한 초록색 액체로 바뀌었다.
난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세요!"
민희 누나는 어느새 근처에 다가와서 구경하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빌라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고 다른 동네 사람들도 주춤거리며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그들의 집 방향으로 뛰었다.
난 초록의 액체가 몸을 다 덮기 전에 마른 청년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어?"
마치 단단하고 질긴 가죽을 베는 것 같다. 이건 거대 뱀 사체에서 겪었던 바로 그 느낌이다.
"변이가 시작되면 몸 자체의 성질이 바로 변하나 봐, 그때 뱀 몸통 같아"
내 말을 듣던 성희가 목을 뜯어버릴 생각인지 청년들에게 다가갔다.
"위험해"
난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초록 액체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었다. 저기에 몸이 닿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버스로 가자"
우리는 이미 몸 전체를 뒤덮은 초록 액체를 바라보며 버스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전부 집으로 다 피신한 상태여서 동네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난 버스 액정의 [자동 포격]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포탑은 움직이지 않았다.
"변이가 아직 진행 중이라서 그런가?"
난 그대로 자동 포격을 켜놓았다. 언제 백여 마리의 인간형들이 여길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앞의 초록 젤리가 언제 갑자기 변이가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전처럼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또는 생각보다 일찍 변이가 끝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버스 옥상에 올라 동네의 거리를 살폈다. 포격의 사거리는 아직 50미터다. 그런데 빌라 동네의 길이는 대략 200미터는 되어 보인다. 버스가 전부 커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놈들이 버스에만 달려들어 주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유민이네 빌라 건물을 위주로 지킬 수밖에 없다. 포탄의 사정거리 밖의 사람들은 안전해질 때까지 이 빌라 근처의 빈집으로 피신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하다.
마침 멀리서 유민이와 반장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중간에 초록 젤리를 보고 살짝 놀란 듯 나에게 물어보는 듯한 손짓을 하며 다가왔다.
"형 저거 뭐예요?"
유민이와 반장이 버스 지붕에 올라오며 물었다. 난 좀 전에 일어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반장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 집이 안쪽이니 그쪽 분들에게 알릴게요."
그녀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길 안쪽으로 사라졌다.
"빈집 정리 좀 해야겠네요."
유민이도 빌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 달여 동네에서 같이 지내니 이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이 점점 사라지고 검푸르게 변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그때 버스 지붕의 문이 열리며 성희가 나타났다.
"저녁 먹자"
언젠가부터 밥을 우리 둘이서만 먹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초반 며칠은 버스에서 성운이네 가족과 같이 먹다가 그다음엔 우리가 음식을 가지고 성운이네 집에 들어가서 먹기도 했다. 하지만 한두 번 따로 간단히 식사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분리가 되었다. 이렇게 정을 떼는 건가?
눈앞에 초록 젤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예전과 똑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코르카 얼마나 모았지?"
난 질문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액정을 바라봤다.
코르카 [752/3000] [0.02/H]
동네 사람들이 많이 가져왔는데도 생각보다 많이 모이진 않았다. 그때마다 물과 음식을 넉넉히 꺼내서 그런 듯하다. 하지만 기본 소비량은 둘이서만 지내서 그런지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두운 창밖이 환하게 잠깐 번쩍였다.
"뭐지? 번개인가?"
내가 말하는 와중에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깜짝이야!"
조용하던 동네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리니 괴물을 만난 것보다 더 놀란 거 같다. 사실 요즘은 웬만한 괴물로는 놀라지도 않는다만
그러더니 버스 창문에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처음 비가 오네"
"그러게"
난 어제 먹다 남은 소주 반병을 꺼냈다. 그리고 버스 옆쪽 조명을 켰다. 초록 젤리가 된 청년들 방향이다.
"비 오는 날엔 막걸린데"
내가 중얼거리자 성희가 소주잔 두 개를 꺼내온다. 마트에서 정신없던 와중에도 술잔까지 챙겼던 그녀의 꼼꼼함에 난 요즘 정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아직도 버스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물품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하지?"
성희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뭐가?"
"반찬 말이야."
그러고 보니 4가지 반찬 중에 성운이네 반찬 통이 냉장고에서 사라졌다. 그게 한 달 전쯤부터였을 거다.
"승객 명단에서 지우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탑승객 명단에 있다. 아직 [추방]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끔 버스에 놀러 오기도 했고 이층 침대에서 자고 가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얼마 전부터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지만
"엄마를 만나서 그런 거 아닐까?"
내가 추측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반찬을 만들어 주던 주인공이 나타나서 버스가 더는 그 일을 대신 해 주지 않는 거 아닐까?
"비엔나소시지랑 계란말이 그립다."
"그러게, 계속 리필되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괴물로 변하고 있는 초록 젤리를 바라보며, 또한 어디선가 나타날 수도 있는 백여 마리의 인간형 걱정을 하면서도 먹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꽈르르르릉!
"깜짝이야!"
천둥소리는 계속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들을 때마다 계속 놀랄 만큼 엄청난 굉음이다. 그것도 바로 머리 위에서 울리는 천둥은 특히 그랬다.
"비가 많이 오는데? 바람도 심하게 불고"
버스의 조명이 빗속을 뚫고 아련하게 초록 젤리 두 마리를 비추고 있었다.
반대편 쪽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나머지 조명도 켰다. 이제 버스 사방으로 환하게 조명이 켜졌고 안쪽에 살던 동네 사람들도 유민이네 빌라 건물과 옆 건물로 모여서 들어갔다.
난 언젠가부터 버스의 투명을 꺼 놓은 상태였다. 각성자가 아닌 동네 사람들이 버스를 봐도 상관없을 것 같고 혹시나 나타날 괴물도 버스를 바로 발견하고 우리에게 달려드는 게 오히려 나았기 때문이다.
자동 포탑을 계속 켜 놓을 수 있게 된 건, 이 포탑이 희한하게도 유민이네 형은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형인데 괴물로 인식하지 않는 걸까? 버스와 포탑만의 어떤 인식 로직이 있는 것 같다.
거센 빗줄기로 창밖의 거리 풍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너무 커서 난 [소음 차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졌다.
번개는 여전히 치고 있었고 비는 마치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더욱더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고요했다.
거센 바람에 날리는 빗줄기가 연신 창문을 때리는데도 안으로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고요함은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된다.
"악기라도 있었으면"
이럴 땐 피아노 연주가 딱 맞을 듯했다. 음악을 들어본 지 오래됐다. 근데 이 소리를 유민이 앞에서 했다가 바로 후회한 적이 있다. 녀석은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게 정말 아쉬웠다. 빈집에 피아노가 있는 걸 보긴 했지만,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나?"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성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읍내에 하나 있었는데, 없어졌어."
"그래?"
"내가 일주일 다녔거든."
"뭐? 피아노 다녔어?"
성희는 살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명을 켜놨는데도 창밖은 짙은 어둠과 비바람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번개가 쳤다. 그런데 그 순간 창밖을 바라보던 성희의 눈빛이 변하는 걸 느꼈다.
"봤어?"
성희의 떨리는 음성이다. 쉽게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다.
난 더 묻지 못하고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창밖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속에서 멀리까지 퍼지지 못해 흐리게 번지는 버스의 조명 너머의 어둠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난 [소음 차단] 버튼을 눌러서 껐다.
꽈르릉!
바로 천둥소리가 들렸다. 창밖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 무언가 있었다. 세찬 비바람과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성희의 눈빛만으로도 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성희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시선을 둔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기다리던 번개가 쳤다.
버스의 빛이 닿지 못하는 거리, 동네의 중간쯤에서 인간 크기의 형체 수십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왔구나!"
아주 잠깐 눈에 비쳤지만, 충분히 놈들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터널에서 버스를 부술 뻔했던 그 인간형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인간형이 이젠 떼로 나타났다.
꽈르르르릉!
다시 어두워져 놈들이 보이진 않았고 천둥소리만이 우리 상황의 배경 효과음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더욱 크게 울렸다.
"포탑이 조용하네? 사정거리 밖인가?"
정확하진 않지만, 느낌상으로는 50미터 안쪽인 거 같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번쩍!
그때 다시 번개가 쳤다. 그리고 우리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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