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J1. 지붕위의 상념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마늘쫑?"
성희가 다가오며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눈가에 살짝 스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우냐?"
성희는 아무리 봐도 남자가 아닐까 싶다. 말이 짧다. 그런데 우직하다.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을 느낄 틈도 없이 위기를 여러 번 겪어서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무심한 성격에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도 없진 않았다.
어렸을 때는 정말 밝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는데 지난 세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할아버지 반찬"
"뭐?"
성희가 마늘쫑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냉장고에 반찬 통 더 있다. 아무래도 나머진 식구들 거 같아"
성희가 나머지 반찬통 세 개를 꺼내어 테이블에 놓았다. 반찬통 뚜껑이 흐릿한 반투명이라 안의 내용물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성희가 반찬통 하나를 집중해서 보더니 이내 뚜껑을 열었다.
"엄···. 마···."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던 아이가 내려다보고 있는 건 비엔나소시지 볶음이었다.
"피망 싫다고 했는데"
아이는 포크로 작은 소시지를 하나 꺼내서 입에 넣더니 우물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성운이는 동생의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더니 다른 반찬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계란말이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케첩까지 뿌려진 채로
성운이는 계란말이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먹어보지도 않고 엄마의 반찬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케첩이 뿌려진 방식 같은 건가?
성희가 즉석밥을 내려놓았다.
"삼겹살은 좀 걸린다. 밥부터 먹자"
"넌 안 열어봐?"
성희는 남은 한 개의 반찬통을 열지 않고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나중에"
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의 반찬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조금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반찬통 자체가 리필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다시 냉장고를 열었을 때는 반찬통이 보이지 않았다.
'내용물만 리필?'
자꾸 생기는 궁금증을 삼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덕 아래에서 여전히 반쯤 잠들어 있는 것 같은 거대한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다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모양새다.
아이들은 엄마의 반찬을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맛있게 먹었다. 어떻게 이 반찬들이 냉장고에서 나타났는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세상이 뒤집히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바뀐 세상에, 그리고 신기한 버스에 아이들은 이미 적응하고 있었다.
마법 같은 반찬으로 밥을 다 비우고 나서야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던 삼겹살이 다 익었다.
"먹을 수 있지?"
성희의 말이다. 아이들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냉장고에서 새로 등장한 소주를 꺼냈다.
성희가 잘라놓은 고기를 몇 점 따로 담아 소주와 검을 챙겨 들고 뒤쪽 계단을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저 밤바람 속에서 소주 한잔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지붕에 테이블과 의자도 생겼다. 난간도 이전보다 높다.
물론 좀 전까지만 해도 버스 근처에 강력한 인간형 괴물이 있었다는 게 조금 소름 끼치긴 했지만, 이 정도 위험은 오늘 밤에는 감수하고 싶다.
멀리 언덕 아래에 그르렁 소리조차 잠잠해진 거대한 덩치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늘에는 멸망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별들이 수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게 은하수였나'
소주 한잔에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먹으니 작은 행복감이 밀려왔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어두운 숲속에서 불어와 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간다.
언제 어디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고, 거대 괴물이 근처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한 밤이다. 소주 한 잔에 이렇게 긴장이 풀려도 되나 싶지만 난 버스와 가족을 믿는다.
사실 어느 정도 안심하고 지붕에 올라온 이유는 아까 지붕 위에 처음 올랐을 때 작은 액정 화면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은 액정에도 필요한 정보는 전부 표시되고 있었다. 괴물 탐지 숫자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도 놈들을 터트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믿음직한 포탑이 내 눈앞에 바로 보인다. 코르카를 소모하더라도 좀 전에 처음 사용해본 녀석의 위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게다가 날 따라 올라온 성희의 모습을 보니 더 안심되었다. 무릎 식신이라고 생각으로 놀리긴 했지만 믿음직한 친구다.
"혼자 한 병 다 마시려고?"
"아니"
그녀 손에는 맥주와 구운 소시지 접시가 들려있었다.
"애들은?"
"배부르대."
난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어?"
"다르지?"
진화 이전에 먹던 소시지와 맛이 완전히 달랐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랄까
그때 테이블에 올려진 빈 맥주잔을 발견했다. 난 바로 소주를 약간 부은 다음 맥주를 따랐다.
"내 껀데"
"하나 더 가져와"
소맥을 부르는 소시지다. 이건 안 말아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형! 맛있겠어요!"
그때 언덕 아래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붕의 액정으로 우측 조명 버튼을 터치하니 바로 불이 들어왔다. 유민이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올라와, 같이 먹자"
"씻고 갈게요"
바로 옆이 유민이가 애용하는 약수터다. 잠시 후 그는 물을 뚝뚝 흘리며 버스 지붕으로 올라왔다.
그때 성희가 버스 아래로 다시 내려가더니 쟁반에 뭔가를 잔뜩 담아서 올라왔다.
"에어프라이어에 돌려놨던 거"
치킨 너겟이었다. 그리고 오렌지주스, 바나나, 사과 등과 맥주 한 캔을 더 가져왔다.
"넌 주스 마셔"
"하하 네!"
"아참 너희 형은?"
그렇게 묻고 있는데 버스 지붕 끝에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는 붉은 두 개의 눈을 발견했다. 테이블에 합류는 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그렇게 조촐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어? 접촉 파괴는? 탐지 숫자는?"
난 황급히 옆의 액정을 확인했다. 근접의 숫자는 0이었고 접촉 파괴는 켜져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지붕 끝에 앉아있는 유민이 형도 그대로다.
"휴, 다행이다."
이제 유민이 형은 괴물로 인식하지 않는 듯했다.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니 유민이가 입가에 소시지 육즙을 흘리며 소리쳤다.
"이거 무슨 소시지에요? 엄청나요!"
유민이의 감탄사를 들으며 나도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진한 육즙이 입안 가득 머물며 절로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맛이었다.
"혹시 밥 있어요?"
유민이의 질문이다. 이번엔 내가 일어났다.
"즉석밥 데워줄게."
거실로 내려가니 아이들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땐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고요함 속에서 아이들은 어두운 창밖을 보며 와사삭 소리만 내고 있었다.
"심심해?"
"아니요"
과자를 먹는 행위와 그 맛에 더더욱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뭔가를 보면서 먹고 있었다면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멸망 이전에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하고 있었나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면 뭔가 허전하고, 그래서 자꾸 뭔가를 찾게 되는 행동을 했다.
온전히 하나에만 집중해서 제대로 생각하고 곱씹으며 느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상의 진한 육즙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소주가 독했나 보다
난 햇반 두 개를 돌려 지붕으로 올라갔다. 십 대 남학생인 유민이는 정말 잘 먹는다. 나도 저 나이대에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너무 빨리 꺼졌던 기억이 난다.
"동네는 별일 없고?"
"네, 괴물들 난리 통에 다들 놀라긴 했지만 부서진 빌라 건물은 원래 아무도 없던 곳이라"
"다행이다. 아참 아까 줄 게 있다고 집에 들르라고 했었지?"
유민이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 맞다! 방 정리하다가 애들 장난감을 발견해서요. 예전에 애들이 집에서 놀다가 두고 간 거"
"아 그래?"
작지만 좋은 소식이다.
"애들이 좋아하겠네!"
그때 액정에 깜박이는 문구를 이제 발견했다. 언제부터 저 문구가 나왔었는지는 모르겠다.
<탑승객을 등록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유민이가 버스 지붕에 있어서 나온 메시지인가? 지붕에서만 그런 건 아닐 테고 일정 거리나 혹은 버스에 닿아있으면 나오는 것 같다.
난 슬쩍 액정을 살펴보는 척하며 [아니오]를 눌렀다.
복합적인 이유였다. 유민이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탑승객 추가는 신중해야 한다. 게다가 그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가족을 지켜야 하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입가에 밥풀을 붙이고 있는 유민이가 날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식충식물 같은 게 여기 말고 더 있겠죠?"
"그렇겠지"
"식물이 괴물들 다 잡아먹으면 좋을 텐데"
"꺽다리나 못난이는 못 먹을걸"
유민이는 괴물의 이름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피식 웃었다.
"크크 이름이 절묘하네요. 좀 노티 나긴 하지만"
"뭐?"
"하하하 아녜요"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니 어른이 되고 나서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사무적인 대화만 나누던 동료나 선후배들, 자취방 주인아주머니, 단골 편의점 그리고 말 없는 미용실과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는 수많은 가게
모두 얇고 평면적인 사람들과의 대화뿐이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시는 할아버지와 대화 없이 이십 년 가까이 살았고 집에서 독립하고부터는 형식적이거나 업무적인 대화만 하고 살았다. 그게 내 30년의 인연이었다.
'그래서 노티가 나나?'
갑자기 급 우울해졌다. 선선하게 불던 기분 좋던 바람은 이제 무심하고 차갑게 느껴졌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반짝이는 수많은 별은 이제 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성희가 무뚝뚝하고 살가운 대화를 나와 하지 못했던 건 그녀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런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야 나는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뭔 생각을 그렇게 다양한 표정으로 해?"
성희가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표정에서 좀 전의 생각들을 모두 읽었던 것 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형, 전 가볼게요. 잘 먹었어요. 조심하세요."
유민이는 부모님 걱정에 집으로 돌아가고 그의 뒤로 붉은 눈 두 개가 따라나섰다.
난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나 어땠어?"
"뭐?"
성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이내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목숨"
갑작스럽게 진지한 표정의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두 번 살렸어."
"뭐?"
내가 잊은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