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J1. 파리지옥
이건 정말 팝콘 각인데
그동안 만났던 놈들이 대규모로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은 놈들이 섞였다.
놈들에게 보이지 않는 우리는 가만히만 있으면 큰 탈은 없을 것이다.
아래 빌라촌에 생존자들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늦은 오후지만 몇 시간만 지나면 날은 어두워질 거고 유민이 형도 지하실에서 나올 거다.
빌라촌은 그들이 원래 하던 방식으로 지키면 된다.
단, 코르카를 이렇게나 많이 준 유민이는 좀 신경이 쓰였다. 뭔가 보답이라도 해야 하는데
난 그저 냉장고에서 한두 끼 분량의 고기와 음식 창고에서 보관 식품들을 좀 많이 꺼내서 줄 생각이었다.
오히려 앞으로 이렇게 유민이와 거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계속 여기 머물면서 유민이가 가져온 코르카를 음식과 바꿔주면 작은 경제가 선순환될 터였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데?'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동네에서 안정적으로 코르카를 공급받으며 큰 걱정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정착에 대해 상상하다 보니 시야에 많이 가까워진 놈들이 들어왔다.
뭉게구름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떠가는 풍경은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정말 멋졌다. 강원도가 공기가 원래 좋기는 하지만 멸망하고 공기가 더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 날괴물 떼가 들어있으니 애써 요리한 음식 위에 날파리가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놈들은 마치 해충 같다. 괴물 제거용 농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여튼 이놈들을 곧 맞이해야 하니 다시 정리해보자
꺽다리파는 못난이와 멧돼지 그리고 날괴물이다. 아직 못난이와 멧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거대 괴물파는 이구아나와 촉수 거미 정도인데 이놈도 본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교회에 이미 도착한 악마쥐파다.
거대파와 악마쥐의 관계는 아직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꺽다리파와 모두 사이가 좋지 않으니 볼만한 싸움이 일어날 건 자명해 보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걱정이긴 한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뒤에서 작은 성희의 음성이 들렸다.
"고래가 있어요?"
"속담이야"
성운이가 덤덤하게 대신 대답했다. 작은 성희는 오빠를 흘깃 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 버스는 교회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안심은 되지만 놈들의 숫자와 종류가 워낙에 많다 보니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난 나도 모르게 방어막 게이지를 살폈다.
'어?'
아까 버스가 바뀐 게 많아서 놓쳤던 부분이 다시 보였다.
방어막 [100/100] [1 Kc]
100이라고? 그리고 Kc?
Kc는 아마도 코르카 같다. 그러면 코르카 1개당 100 방어막이라는 건가? 예전엔 20이었는데? 정말 그렇다면 효율이 다섯 배 좋아진 거다.
포격 사거리는 50m 정도면 나쁘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이것도 접촉 파괴처럼 코르카를 소모한다면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포격으로 최소한 코르카 본전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정말 필요할 순간에만 써야 할듯싶다.
아직 냉장고는 열어보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사태가 끝나고 나면 좀 편한 마음으로 열어볼 생각이다.
꼬르륵
이번에는 내 배에서 들린 소리다. 생각해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편하게 밥을 먹기에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벌레 같은 악마쥐들이 교회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밖의 덩굴보다 뭔가 안쪽에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게 있어 보였다.
퀘에에에
퀴퀴한 괴성이 교회 건물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건 메케한 소리를 내던 멧돼지 괴물과는 또 다른 형태의 소리다.
아직 교회 건물로 진입하지 못한 악마쥐들의 행동이 다급해 보였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데다 덩굴이 입구와 창문 모두에 무성하게 자라있어서 들어가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그때 시공간이 수십 개가 비틀어지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걸 내가 알아챌 수 있던 건 꺽다리의 움직이는 패턴이 멀리서도 나에게 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임을 읽었더라도 너무 많은 수가 번쩍이며 사라지는 통에 제대로 놈들의 수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대략 느낌으로는 삼십여 마리 정도다. 이렇게 많은 꺽다리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아마 그날 이후로는 처음인 듯싶다.
놈들은 교회 주변을 둘러싸고 그 범위를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하지만 덩굴의 중앙으로 진입하려는 악마쥐 들은 마치 약 기운이 떨어진 중독자처럼 주변의 다른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카아아아아아!
마침내 비좁은 교회 입구로 먼저 들어가려던 악마쥐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다.
카악!
그리고 개중에 약한 놈들은 이내 몸통이 갈가리 찢기며 튕겨 나갔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꺽다리들은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놈들끼리의 싸움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교회 주차장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날괴물 백여 마리가 교회의 상공에서 활공을 시작한 것이다. 놈들도 상황을 지켜보며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난 계기판을 살폈다.
탐지 [ 0 < 432 < 124 ]
원거리는 아마도 날괴물인 듯싶고 중거리는 꺽다리와 악마쥐가 섞여서 표시되었다. 그런데 숫자가 가파르게 줄고 있다. 악마쥐들의 내분 때문이다.
[ 0 < 389 < 124 ]
저 악마쥐는 동족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미친 듯이 교회 내부로 먼저 들어가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 덕에 놈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다.
내분을 구경하고 있는 거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꺽다리들도 놈들의 싸움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
악마쥐들이 알아서 서로를 죽여주고 있는 걸 꺽다리도 나처럼 구경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꺽다리는 오히려 놈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회 쪽이 아니라 교회 밖을 향해 서 있었다.
멀리서는 놈들의 앞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생김새가 흉측해서 난 당연히 교회 쪽을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때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우리 버스가 있는 약수터 뒤쪽 산에서도 들렸다.
두두두두두두두
멧돼지 괴물 떼다. 산 위에서 그리고 옆과 언덕 아래까지 사방에서 멧돼지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뭐지?'
[ 4 < 425 < 98 ]
놈들은 버스 바로 옆을 지나 교회 쪽으로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 32 < 439 < 56 ]
탐지 숫자가 마구 바뀌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에서 교회 주차장으로 몰려드는 놈도 많았고 우리 뒤쪽 산에서 버스 곁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놈들도 많았다.
놈들은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리며 교회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뀌이이이이이이이
꺽다리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단체로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니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도 고막이 터져나갈 듯 귀에 통증이 심해졌다.
그런데 그때 계기판 우측에 깜박이는 터치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막 깜박이기 시작해서 눈에 띈 거 같다.
[소음 차단]
"오!"
버스의 진화는 소유자의 지속적인 결핍을 기억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동안 내가 계속 아쉬워했던 기능만 골라서 생길 수는 없지 않을까?
난 바로 그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밖의 고막이 터질듯한 소음이 사라졌다.
버스 안이 적막에 휩싸이자 들려오는 건 냉장고의 작동음과 식구들의 숨소리뿐이었다.
꼬르륵
이건 동시에 모두에게서 난 소리다.
"간단한 거로 요기만 하자."
내가 뒤쪽을 향해 말하자 성희가 일어나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리고 김과 참치 통조림을 꺼냈다.
나도 냉장고는 나중에 열고 싶었는데 성희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난 밖의 상황을 계속 주시했다. 멧돼지들은 꺽다리 바로 앞에서 더는 교회 쪽으로 진입하지 않고 멈춰있었다.
[ 0 < 499 < 0 ]
마치 꺽다리가 멧돼지들을 막고 있는 모습이다.
'목적이 그거였나? 같은 편 막는 거?'
그때 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시 음소거 버튼을 터치했다.
구구구구구구구구
교회 쪽에서 엄청난 진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그 진동으로 버스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쾅!!
교회의 건물이 산산이 조각나 그 파편이 주변으로 마구 날아갔다. 그중에 커다란 시멘트 조각 하나가 버스 쪽으로 날아왔다.
쿵!
버스 앞 유리에 정통으로 부딪힌 그 건물 파편은 그대로 튕겨 나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난 나도 모르게 계기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어막 [87/100] [1 Kc]
'오! 괜찮은데?'
저 거대한 건물 파편을 일반 차량이 맞았으면 차도 탑승객도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버스의 쉴드는 고작 13이 깎였다.
그런데 지금 계기판을 보며 흡족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언덕 아래에는 교회가 산산이 파괴된 이유가 등장해 있었다. 식물을 보고 끔찍하게 느끼기는 처음인 것 같다.
덩굴 식물이 엄청난 크기로 자라있었다. 그 크기의 압력을 교회 건물이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덩굴 식물의 중심, 큰 줄기 방향으로 아직 살아있는 악마쥐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나무가 먹고 있네?"
작은 성희가 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도 성희가 뭉쳐놓은 주먹밥을 하나 집어 먹었다. 자주 먹었던 거지만 그래도 아직은 물리지 않았다.
"징그럽다."
성희가 주먹밥을 하나 집으며 말했다. 밥 먹으면서 구경할 풍경은 아닌 듯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악마쥐는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막무가내로 덩굴 식물의 거대 줄기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수십 개의 끈적이 빨판에 달라붙어 버둥거리더니 이내 빨판 중심에 있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악마의 입 같은 모양이었다.
"괴물들을 유혹해서 잡아먹는 거 같아"
뒤쪽에서 성희가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이야 지구에도 있어 특이한 광경은 아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꺽다리들은 자기 편의 진입을 여전히 막고 있었다.
그때 다시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른 덩굴 식물이 악마쥐를 잡아먹으며 더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어서 나는 그 성장 굉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 언덕 아래 사각에 있어 보이지 않았던 놈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