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J1. 감염자
버스 창문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개의 시뻘건 눈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런데 아는 얼굴이다. 우측 조명이 켜져 있어 잘 보였다.
그는 방금 사라졌던 커터칼 청년이다.
정말 버스 안이 보이나?
어떻게 살아있지?
청년은 좀 전에 그 괴물에 당해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도 경황이 없어 버스로 복귀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어 더 확인하진 못했다.
그런데 왜 눈이 괴물 눈깔이 되었지?
서···설마?
감염?
분명 얼굴은 아까 그 청년이다.
그런데 지금은 소름끼치는 시뻘건 눈알을 굴리며 버스 안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성희한테 대가리를 처맞고 죽은 그 괴물의 움직임은 다른 괴물과 달랐다. 게다가 생김새도 인간과 흡사했다.
특히 다른 건 내가 그 괴물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다. 놈의 움직임은 나에게 느리게 보이지 않았다.
인간형 괴물인가? 그리고 그 청년은 좀 전에 그놈한테 감염되어 저렇게 변한 건가?
인간형은 버스가 보이나?
난 창가로 다가가서 놈의 얼굴을 살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표정이나 눈빛은 괴물과 다를 바 없었다.
한데 버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를 발견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느껴지는데 보이는 건 없는 그런 상태?
어쨌든 난 머릿속에 카테고리를 추가로 만들어야 했다.
인간형 괴물
저놈은 아직 내가 처리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성희에게 전담시키기에는 아직 그녀의 능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성을 잃어야 발현되나?'
난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창밖의 괴물을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저 얼굴은 아까와는 정말 다르다.
본인의 능력을 직접 제어할 수는 없는 거 같다. 스스로 발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웠다.
놈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의 외형은 인지하면서도 창 안쪽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 같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버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인간형이라도 안으로는 못 들어오겠지?
아직 오른팔에 통증이 남아있었지만, 오른손으로 검을 잡았다. 왼손은 어색하다. 아파도 익숙한 게 낫다.
난 문을 향해 검을 겨누고 놈이 오길 기다렸다.
놈은 천천히 창에서 문 쪽으로 이동했다. 열린 버스 문으로 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버스 문 앞, 검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난 사정없이 검을 내질렀다.
깨애애액!
괴물의 목에 검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들어가다가 말았다.
놈은 검에 찔리는 그 순간 바로 몸을 뒤로 빼고 버스에서 멀리 떨어졌다.
놈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아주 잠깐 흘러나오더니 이내 출혈이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녹색의 액체가 그 목에서 다시 찐득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액체는 놈의 목을 휘감았다.
"뭐···뭐지?"
그 찐득한 녹색의 액체는 기괴한 모습으로 놈의 몸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마치 청포도 젤리 같은 모습이었다.
'헐'
지금 나가서 베어 버릴까?
하지만 단서가 없다. 그러다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기다리자.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게다가 저건 정보다. 놈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는 정보
난 긴장을 유지한 채 놈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젤리 덩어리가 된 녀석은 변화가 없었다.
꼬르륵
이건 내 뱃속에서 난 소리가 아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무릎식신··· 아니 성희가 낸 소리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코르카가 아까 충전이 좀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냉장고와 음식 창고에서 음식 재료를 꺼내 조리대에 올려두었다.
"천천히 먹어"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고기를 굽고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테이블엔 아까와 비슷한 음식이 차려졌다. 냉장고의 내용물이 같으니 상차림도 변화가 없다.
그런데 나보다 음식 준비하는 게 훨씬 능숙해 보였다.
"너는?"
"배 안 고파"
난 정말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게걸스럽게 전부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공포에 질렸던 눈빛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좀 전에는 공포가 아니라 허기의 눈빛이었나?
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의 놈을 계속 지켜봤다. 그때 그녀는 식후 졸음이 몰려왔는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자"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졸기 시작했다.
'혼자 편하게 자기는 또 미안한 모양이네'
그때 창밖에서 탄산수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진원은 녹색 젤리 쪽이었다.
젤리가 터진 콜라병 거품 같은 느낌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놈의 온몸에 있는 녹색의 액체는 그렇게 전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놈의 원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아니 아까는 어설픈 괴물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날 죽일뻔한 놈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감염되고 완전히 진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이해되는 거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재난 영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서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 그런데 어디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황인데?
"젠장"
놈이 버스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열려있던 문을 급히 닫았다. 들어오진 못하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도 버스가 보일까?
놈은 정확하게 버스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보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그렇게
난 다시 긴장되었다. 내 고대의 세포가 또 무언가를 나에게 전달해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도 피어올랐다.
센 놈이 나오면 나도 능력이 좀 강화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밸런스가 왜 이래?
아니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거지? 게임도 소설도 아니고 현실인데?
놈은 버스 우측 창 앞까지 다가와서 멈췄다. 그러고는 눈알을 굴려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순간 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공포감이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정말 버스 안이 보이는 것 같다.
난 검을 집어 들고 놈을 응시했다. 놈도 잠시 그렇게 날 노려봤다. 그러더니 이내 흉측한 두 손을 들었다.
버스를 건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놈은 버스의 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진동이 느껴지거나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마치 음소거 상태 같았다.
그런데 버스의 운전석 쪽에서 뭔가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뭐지?'
난 급히 운전석으로 가서 계기판을 살폈다. 그곳에는 이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게이지가 보였다. 옆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SHIELD]
쉴드? 방어막?
게이지는 수치로 표시되고 있었다.
[3/20]
어?
놈이 계속 버스를 두드리자 그 숫자는 점점 내려갔다. 그리고 줄어들 때마다 불빛도 미친 듯이 번쩍이고 있었다.
[2/20]
그럼 저거 다 떨어지면?
뒤를 돌아보니 놈은 여전히 버스를 내리치고 있다. 난 게이지를 다시 확인했다.
[1/20]
젠장!
그런데 그 순간
[20/20]
어라? 왜 다시 차 있지?
난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해답은 옆의 코르카 게이지에 있었다.
[12/100]
좀 전에 13개가 표시된 걸 봤는데 하나가 줄었다.
젠장, 버스의 방어력이 무한이 아니었잖아?
무적 버스인 줄 알았더니 세상엔 공짜가 없었다. 심지어 멸망한 세계에서도 말이다.
이전에 멧돼지 괴물들이 처박았을 때는 왜 불빛이 번쩍거리지 않았을까? 게이지는 있었지만 내가 못 본 걸까? 번쩍거리던 경고등 기능은 버스의 진화 이후에 생긴 건가?
하여튼 난 코르카를 까먹고 있는 저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나가서 검으로 발라버리고 싶은데 아까 당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냥 밖으로 내보내면?'
그럼 각성해서 무릎으로 놈을 찍다가 머리를 뽑아버리지 않을까?
그녀의 각성 능력을 불러오는 방법을 모르면 그런 상황에 밀어 넣으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실패하면?
'미안하다 잠시 그런 생각이라도 해서'
그녀가 각성하는 조건이 혹시 내가 위험에 처해야 하는 걸까?
아까처럼 나가서 냅다 얻어맞아 볼까?
그러다 전직 커터칼 괴물에게 바로 난자당하면?
놈의 날카로운 손톱을 보니 그대로 신선한 육회가 될 것 같았다.
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감이 안 온다. 고민하는 사이 놈은 계속 버스를 내리치고 있었고 게이지는 계속 줄어들었다.
또 코르카 한 개가 사라졌다.
'아!'
난 활을 꺼내어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버스의 문을 열었다.
'이거라도 해볼 수밖에'
놈은 아직 버스의 문이 열린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난 버스 밖으로 살짝 몸을 내밀고 바로 놈을 향해 화살을 한 발 쏜 후 재빨리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버스 창으로 놈의 상태를 살폈다.
놈은 버스 때리는 걸 멈추고 몸에 꽂혀있는 화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 표정이 너무 평온했다.
'젠장 젠장 젠장'
몸에 화살이 꽂혀있는 상태에서도 어떤 변화도 없었다. 저 얼굴은 간지러운 표정이다.
놈은 그 화살을 흉측한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당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푸아아아악!
마치 젤리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놈의 몸통이 터져나갔다.
초록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버스 창으로 튄 그 액체는 바로 아래로 전부 흘러내렸다. 그리고 터진 몸통에 달려있던 머리와 팔은 바닥에 떨어졌다.
"오!"
놈이 있던 그 자리에는 초록의 찐득한 액체가 바닥에 깔려있었고 흉측한 머리와 팔다리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화살 한 발 날렸네'
그리고 그 초록의 액체는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코르카 한 개와 화살이 놓여있었다.
"어? 화살이 그대로?"
난 문밖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밖으로 나가 화살을 집어 들었다. 그때 옆에 있는 코르카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버스로 흡수되었다.
고작 한 개의 코르카다. 인간형이라 그런가? 아니면 변이된 직후라서 그런 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괴물은 방금까지도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인간이었을 때도 구해주려고 한 날 공격했다. 고마움도 모르고
게다가 괴물로 변하고 또다시 우리를 해하려 했다.
날 두 번이나 죽이려 한 놈에게 연민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터칼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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