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J1. 진화
'왜 웃음이 나오지?'
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당으로 나오자 순간 행복감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아주 오래 묵었던 어떤 기운이 내 세포 하나하나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며 막혀있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이 기분은 무엇일까?
인간의 문명보다 오래되었을 것 같은 묵고 묵은 그 기운들은 그렇게 조금씩 나오다가 이내 봇물 터지듯 내 온몸에서 튀어나와 나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넘치는 행복감에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멧돼지 괴물의 흉측한 이빨이 다가오는 게 느리게 보였다. 역겨운 침방울이 날아오자 고개를 살짝 꺾어 피했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튀어나온 이빨 두 개를 잘라냈다. 그 베기에 놈의 코도 잘려 나갔다.
궁금해서 이빨을 향해 휘둘러본 거다. 이빨도 잘릴까? 하는 아주 단순한 호기심
다시 몸을 돌려 괴물의 목을 잘라냈다. 그 사이 두 마리가 뒤에서 나에게 돌진하는 건 굳이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난 검을 거꾸로 잡고 두 번 찔렀다. 찌르고 빼는 게 두부를 찌르는 것같이 부드럽고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과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당에는 나와 희성이 그리고 성희가 서 있다. 나와 희성이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칼싸움하고 있었고 성희는 심판을 보는 것처럼 중앙에 서서 우리를 보고 키득거렸다.
나의 나뭇가지가 희성이의 목에 가볍게 닿았다. 성희가 나를 가리킨다. 이제 칠 점, 점수를 세고 있다. 그 사이로 괴물의 초록 액체가 하늘에 퍼져나가고 내 얼굴에도 묻는다.
어린 성희가 수돗가의 물을 뿌린다. 그 틈으로 반으로 쪼개지는 멧돼지 괴물의 머리가 떨어진다. 그 머리를 어린 희성이가 가볍게 두드리며 웃는다.
물과 초록의 액체와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아이들의 웃음이 그렇게 마당에서 춤추듯 흐르고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냥 세상 걱정 없이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어느덧 아득하게 멀어진다.
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마음이 편안하다.
좀 전에 내 얼굴을 떠나지 않았던 그 미소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아이의 웃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마당을 살폈다. 고요했다. 그리고 처참했다.
마당에 조각나 널브러져 있는 괴수들은 이내 회색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코르카 열 개가 신비롭게 반짝이며 놓여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버스의 연료 주입구가 열렸다.
'이게 다 들어갈까?'
궁금해하고 있던 사이 마당에 있던 코르카는 거의 동시에 허공에 떠오르더니 연료 주입구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이내 하나씩 줄지어 구멍으로 모두 들어갔다.
'다 들어가네?'
난 주머니에 있던 코르카 세 개도 주입구에 넣었다. 이것도 계속 들어간다. 게이지 한 칸이 코르카 한 개가 아닌가?
난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화살을 다시 주운 후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던 성희가 뒤쪽으로 슬금슬금 피한다. 두려움의 눈빛이다.
"어···. 어떻게?"
그녀는 지금 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건 마찬가지다. 단지 적응할 뿐이다.
난 대답하지 않은 채 버스의 운전석으로 가서 계기판을 살폈다. 연료 게이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게이지 열 칸이 모두 차 있었다.
어라? 그러면 아까 두 칸 그리고 여덟 개 채우고 나머지 다섯 개는? 그냥 먹어버린 거?
그때 내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램프에 불이 들어온 걸 발견했다. 버튼이 빛을 발하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Evolution]
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을까?
어쨌든 지금 내가 누르지 않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행이다. 코르카를 넘치게 넣어서 혹시나 낭비한 건 아닌가 고민하던 와중에 선택지가 생겼으니
난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 버튼을 눌렀다.
"끄윽!"
그러자 다시 강한 빛이 내 시야를 순식간에 채웠다. 엄청나게 밝은 빛이다. 어젯밤에 느꼈던 그 강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제처럼 두 손으로 눈을 막아봤지만, 여전히 소용없었다.
뒤에서 성희의 비명도 들려왔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럼 나에게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다.
'아 씨'
다시 그렇게 어지럼증이 몰려오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부시던 시야는 갑자기 까맣게 어두워지더니···.
* * * * *
눈을 떴다.
난 운전석에 목이 옆으로 꺾인 채 앉아 있었다. 다행히 핸들 쪽으로 기절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온 세상 괴물들이 다 몰려들 만한 경적 소리가 내내 울렸을 것이다.
난 뒤를 돌아봤다.
성희가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런데 버스의 내부가 달라졌다. 더 넓다. 거실도 커졌다. 테이블의 벤치 시트가 한 개였는데 이제 두 개다. 네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부엌도 좀 더 커졌고 무엇보다 침실이 완전히 달라졌다. 넉넉한 크기의 이 층 침대다.
난 우선 그녀부터 찾았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난 테이블이 있는 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테이블 아래에서 사람의 발이 보였다.
난 다가가서 의식을 살폈다. 숨을 쉬고 있다. 난 그녀를 안아 올려 2층 침대의 아래 칸에 눕혔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렸을 때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이마에는 피멍이 들어있었고 청바지의 무릎 부분은 찢어져 피가 말라 있다. 큰 상처는 아니다.
난 다시 버스의 운전석으로 가서 달라진 점을 찾아봤다.
계기판이 좀 더 현대적으로 바뀐 것 같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코르카 게이지다. 이전에는 열 칸이었는데 이번에는 숫자로 표시되고 있었다.
[5/100]
음, 난 열세 개를 넣었는데 남은 게 다섯 개라고?
난 잠시 생각했다.
'아하'
이전엔 열 개가 맥스였고 그 열 개가 채워지니 에볼루션···. 진화(?)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그 버튼의 동작으로 버스가 바뀌었다. 그럼 열 개는 진화에 소모된 코르카다. 그럼 남은 건 다섯 개가 맞다.
그럼 다음 진화는? 백 개?
사실 그리 많은 수는 아닌 거 같기도 한데 백 개면 한동안 코르카 걱정 없이 버스에서 버틸 수도 있는 양이다.
지금보다 버스가 더 진화하면 뭐가 좋아질까?
난 대시보드와 계기판을 더 살폈다.
연료 게이지의 표시 방법이 바뀐 것 말고는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난 다시 거실로 돌아와 좀 더 커진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흠···.'
품목이 약간 더 늘어났다. 한우 등심 작은 팩, 캔 커피, 당근, 양파, 사과가 추가됐다. 개수는 모두 이전과 같은 한 개씩이다. 문만 여닫으면 바로 보충되니 한 번에 많은 양이 들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대신 막 먹어 치우다가는 코르카가 금방 바닥날 거다.
'아! 검이랑 방패가?'
어제 운전석 옆에 둔 거 같아 급히 앞으로 가서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젠장'
거실의 테이블 아래와 욕실 그리고 침대까지 살펴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성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 마지막으로 창고 문을 열었다.
'어?'
검과 방패, 그리고 활과 화살통이 처음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휴! 다시 들어와 있었네! 진화 때 초기화된 건가?'
새로운 무기는 보이지 않아 창고 문을 닫으려는데 바닥 쪽에 공구 상자가 보였다. 확인해보니 평범한 기본 공구 세트다.
싱크대도 좀 더 넓어졌다. 다 쓴 식기류 넣어놓기 좋을 것 같다. 난 제어판으로 가서 각종 스위치를 확인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연료가 낭비되지 않게 각 스위치의 온·오프를 재차 확인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냉장고만 켜져 있었다.
'어둡네'
해가 언제 넘어갔는지 창밖에는 이미 검붉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늘 읍내로 가긴 글렀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진우···."
"아 씨! 깜짝이야!"
아직 못 깨어난 줄 알았더니 그녀는 어느새 일어나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가 앞으로 내려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드냐?"
내가 묻자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비틀비틀 걸어오더니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어떻게···."
그녀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나도 그녀가 어떻게 버스에 탈 수 있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혹시 내 의지인가? 아니면 특별한 능력자만?'
그때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팠지?"
"뭐?"
"집에서···. 난 괴물인 줄 알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무지 아팠다. 너도 머리 대"
내가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나에게 쑥 내밀었다.
"농담이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안 때린다니까!"
내 농담이 심했나 생각하던 와중에 그녀의 수줍은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려줘서"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까 머리를 처맞을 땐 짜증이 확 올라왔는데 그녀가 말 한마디로 옹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난 어색한 분위기에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 입을 열었다.
"읍내에 부모님이 계셔?"
내가 묻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날 바라봤다. 헝클어진 긴 머리칼이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고 입가에는 침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지만, 예전의 그 얼굴은 가릴 수 없었다.
'어릴 때 얼굴 그대로네'
그녀의 눈에선 아까 정신 나가 보였던 그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서 독립하고 부모님은 다시 여기 내려오셨어."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농사지으시면서도 읍내에 가게 하나 여셨거든."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부모님 뵈러 여기로 오던 길이었는데 그 난리가 나서···."
난 그날의 거대한 미스터리 불덩어리들이 어디까지 떨어졌나 궁금했다.
"넌 어디서 봤는데?"
"출발하고 얼마 안 지나서"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거만으로도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스쳤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으로 내 마음에도 공포심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울"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