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J1. 칼춤
내 날카로운 검은 놈이 도착하기 직전에 이미 그곳에 도달해 있었다.
내 검보다 찰나만큼 늦게 그 자리에 나타난 놈은 그대로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갔고 옆으로 쓰러지는 놈의 몸통 반쪽과 머리가 내 코앞으로 지나갔다.
죽어가는 괴물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그 표정은 마치
'네···. 네놈이 어떻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괴물의 표정을 어찌 알지?'
하긴 어제부터 설명이 가능한 일이 얼마나 있다고
난 놈이 회색 먼지로 사라지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코르카 두 개가 놓여있었다.
"오! 항상 한 개는 아니네?"
난 나도 모르게 그만 코르카 두 개에 정신이 팔려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때 내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이제야 정신을 조금 차린 거 같았다. 적어도 내가 괴물은 아니라는 판단은 들었는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과 불신의 눈빛은 그대로다.
난 코르카부터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희성"
"네?"
"희성희"
"...?"
"희성희성희성희성희"
어렸을 때 놀리던 기억을 떠올려 박자를 맞추며 그녀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어찌 이 리듬이 아직도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가 점점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내 얼굴이 풀어지며 입을 열었다.
"지···. 진우?"
이제 그녀도 기억난 듯했다. 다행이었다.
"어 맞아 진우"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반가움 따위는 사실 이런 상황에서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괴물이 아닌 인간을 만난 것이 다행이다 정도로만 생각하겠지.
예상대로 그녀는 안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그녀가 날 알아보고 처음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는 왜 여기?"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엄마 아빠가···."
갑자기 울먹이는 그녀의 음성에 살짝 놀란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어디 계시는데? 어렸을 때 이사 갔잖아?"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정신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다시 이사 오셨는데 안 계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가게에도 없고··· 대체 어디···"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어젯밤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녀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난 적어도 할아버지 버스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버스가 있었음에도 공포에 떨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겪었을 어젯밤의 상황은 어땠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어젯밤에 모든 인류가 몰살당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인적 드문 시골에서도 어렸을 적 친구를 만났으니 저 밖에 생존자는 더 있을 거다.
하지만 안전한 거처와 무기 그리고 식량이 없으면 지금 살아남았다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때 그녀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읍내···. 읍내로 다시 가야 해"
나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버스에는 나만 탈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를 혼자 여기에 남겨두고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본인이 몰고 온 차를 타고 갈 수도 있겠지만 아까 봤던 차량의 상태는 밖의 험악한 상황을 그대로 알려주듯 손상돼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도 천운이다.
어찌해야 할까?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그녀는 현관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혼자 걷기에도 힘에 부친 듯 보인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그녀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낮이건 밤이건 놈들은 나타난다. 그리고 놈들이 가까이 오기 전까진 미리 감지하기가 어렵다. 내가 날아오는 놈을 멀리서 미리 본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못난이건 꺽다리건 모두 갑자기 나타났다.
우선 놈들의 등장 패턴을 알아내야 한다. 예상할 수 있어야 대비할 수 있다.
그 전에 이 친구는 어찌해야 하나?
내가 생각에 잠시 빠져있는 사이 그녀는 현관문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난 급히 따라 나갔다. 그녀는 벌써 대문 밖으로 나가 찌그러진 차에 타기 직전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하지만 눈빛이 정상이 아닌 그녀는 자기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 찾아야 해"
난 운전석의 문을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혼자 가면 죽어"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본인이 굳이 간다는데 내가 말려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오래전이긴 해도 어렸을 때는 정말 가족처럼 친하게 지낸 친구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그때의 추억까지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도 죽을 곳으로 향하면 한 번 정도는 말리지 않나? 하물며 가족 같았던 친구인데?
그런데 그때였다.
"버스가···. 있네···."
뭐? 버스가 보여?
이럴 수가, 어떻게 그녀가 버스를 보는 거지? 하긴 아직 다른 사람에게 버스를 보여준 적은 없다. 괴물은 못 보고, 개도 못 본다. 그런데 사람은 본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그녀만 볼 수 있나? 왜?
사람을 만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의문만 생겨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퀘에에에에에엑!
뭐지? 이 매캐한 괴성은?
난 그 소리가 들려온 야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난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고 다급하게 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멧돼지인 줄 알았다.
멧돼지라고 해도 도망가야 하는 건 다르지 않았겠지만 저건 멧돼지가 아니다.
괴물이었다.
난 온 힘을 다해 뛰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놈을 관찰했다.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다리로 뛰고 있는 그놈은 기다란 큰 코에 거대한 입 사이로 거대한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크기가 마치 황소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다.
대략 열 마리 정도의 거대한 멧돼지 괴물이 우리를 향해 매캐한 괴성을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이 느껴졌다.
난 정신없이 뛰면서도 잘 따라오고 있는 그녀를 살폈다. 꽉 잡은 그녀의 손목은 가늘었고 가벼운 몸은 내가 끌어당기는 힘에 쉽게 딸려오고 있었다.
그녀도 처음엔 영문을 모르는 듯한 멍한 눈빛이더니 이내 멧돼지 괴물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오히려 나보다 더 처절하게 뛰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어."
그건 우리가 버스를 보고 한 말일 수도 있고 멧돼지 괴물이 우리를 보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우리 뒤에서 시뻘건 흉측한 눈동자가 번뜩거리고 있었고 벌린 입에서는 연신 악취가 나는 침이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늘 풀 충전하겠는데?'
나도 아직 내 모습에 완전히 적응이 안 된다. 이게 원래의 나인가? 난 대체 누구인가?
버스의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난 그녀와 함께 버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버스 밖으로 튕기지 않았다.
난 바로 버스 밖을 살폈다. 아직 문을 닫지도 못했다. 그런데 굳이 닫을 필요도 없었다.
떼로 몰려온 그 멧돼지 괴물들은 그대로 버스에 단체로 충돌했다. 그런데 버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런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충격을 그대로 역으로 받아내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널브러진 놈들은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난 굳이 문을 닫지 않았다. 열린 문으로 놈들은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난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버스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었다.
"멧돼지들! 와라!"
놈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뛰어들지 않고 버스 앞에서 멈춰 섰다. 난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와 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 밖을 살폈다.
한 놈이 천천히 문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가만히 서서 날 노려봤다. 하지만 열린 문으로 달려들진 않았다. 놈의 벌어진 입가에서 악취 나는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검이 닿는 거리다.
난 망설이지 않고 흉측한 놈의 머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자 뼈나 가죽 따위의 물리적인 요소는 무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검은 돼지머리에 쑥 들어갔다.
흉측한 붉은 눈은 자신이 왜 죽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눈빛을 발하더니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동료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다른 괴물들은 문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날 노려봤다.
'돌대가리는 아닌 거 같은데?'
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다시 도발해봤지만, 놈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괴물도 자기 목숨 소중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난 할 수 없이 활을 꺼냈다. 그리고 제일 가까운 놈의 면상에 날렸다.
쾌에에엑!
이 괴성은 죽는 놈이 지른 비명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괴물들이 낸 소리다.
"놀랬냐?"
난 놈을 뚫고 지나가 마당에 떨어진 화살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네 발, 놈들은 여덟 마리, 가까이만 오면 검으로 발라버리면 되는데 좀 애매하다.
게다가 놈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각자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 날 노려본다. 화살로 맞추기 애매한 위치다. 아직 코르카 두 개···. 아니···. 두 놈밖에 잡지 못했다.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어쩐다.
난 아까 성희네 집에서 두 놈을 잡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생명이 위험한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 나의 시간 흐름은 비현실적으로 왜곡되었다. 이건 내가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상한 감각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심장이 심하게 뛰거나 식은땀 따위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공포감이 사라진 느낌이다.
'나가볼까?'
이 생각을 하자마자 오히려 더 흥분되는 느낌이 들었다. 검을 든 손에 기대감이 감기고 있었다.
'나도 미쳐가는 건가?'
두려움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공포심이 있어야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런데 난 지금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발은 이미 문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무지 설렘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위험해"
잠시 잊었다. 그녀의 존재를
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날 알아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인 대화를 할 정도의 상태는 아직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밖으로 향하는 날 본능적으로 막았던 거 같다.
난 다시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놈들은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또 다가오지도 않은 채 입구 주변의 엄폐물 뒤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 칼 춤 한 번 춰 볼까?'
난 왼팔의 방패 위치를 확인하고 오른손에 든 검에 힘을 주면서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