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J1. 각성
난 창고에서 활과 화살통을 꺼냈다. 화살은 다섯 발 들어있었다.
'활을 한 번도 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활을 들자마자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느껴지는 활대의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난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건 후 당겼다. 생각보다 단단한 느낌의 시위는 힘이 많이 필요했다.
난 놈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미간 사이를 향해 조준했다. 시위를 당긴 팔이 후들거렸으나 어제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분노는 공포와는 다른 괴력을 부른다.
"이 새끼가 밥상을 엎어?"
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활시위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 순간 화살은 버스의 문을 지나 놈의 얼굴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꿰엑!
화살은 놈의 머리를 그대로 정통으로 뚫고 나가 집의 폐허에 부딪혀 떨어졌다.
날 노려보던 놈의 눈깔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온몸이 회색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평상 위에는 엎어진 접시 위에 초록빛의 코르카 한 개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 개뿐이군'
항상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난 나가서 코르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버스의 연료 주입구가 오래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렸다. 이번엔 내가 집어넣었다.
난 버스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배고팠지?"
하지만 내 시선은 엎어진 접시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마치 버스가 아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녀석을 향해 그렇게···.
난 다시 버스에 들어와 상태를 살폈다. 바로 어떤 반응이 나타나진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자 냉장고의 작동음이 들렸다. 난 냉장고 문부터 열어봤다.
기본 내용물이 다시 원래대로 채워져 있었다. 난 제어판을 살폈다. 조명부터 다 꺼져있는지 확인했고 환풍기나 기타 잡다한 것들을 모두 껐다. 냉장고만 그대로 두었다.
'휴, 다행이다.'
날아다니는 괴물도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세 종류의 괴물을 만났다. 앞으로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방금 저놈보다 강한 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난 밖을 살핀 후 버스 밖으로 나가 폐허가 된 집 쪽을 살폈다. 바닥에 화살이 떨어져 있었다.
'다섯 발뿐인데, 아껴야지'
난 화살을 집어 들고 다시 버스로 돌아와 화살통에 집어넣었다. 화살은 리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화살은 아닌 거 같은데'
활을 쏴본 게 오늘이 처음인데 단 한 발로 명중시켰다. 물론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평범한 화살은 아닌 거 같았다.
'이제 읍내 쪽을 둘러봐야겠는데'
난 순간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코르카를 더 모아서 최대한 충전하고 가야 하나, 아니면 지금 출발해서 읍내의 상황을 살펴야 하나?
사실 내가 급할 건 없었다. 여기서도 이따금 이렇게 한 마리씩 몬스터가 나타난다. 오히려 여기 당분간 머무는 게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읍내로 나갔다가 대규모의 몬스터를 만나면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여기서 머무르며 한두 마리의 몬스터로 연명하는 게 오히려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지만 그 선택을 생각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난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안전하게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모험할 것인가.
이 고민은 세상의 멸망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겪게 되는 의례적인 선택의 순간인 거 같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가지고 있는 위협은 그게 괴물이든 인간이든 별반 다르지 않다.
'어?'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멀리서 문명의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다.
아주 평범한 그 소리가 어색하고 기이하게 들려왔다.
난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면서도 묘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단순하게 차근차근 움직이려 했던 나의 계획에 생긴 변수다. 내 의지와 다르게 흘러갈 어떤 변곡점이 생길지도 몰랐다.
'누굴까?'
우선 정체가 궁금했다. 이런 세상에서 만나는 인간은 어떤 상태일까, 그 사람이 과연 호의적일까?
난 버스의 문을 닫고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 소리는 읍내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 소리의 정체가 나타났다.
소형 승용차였다. 운전자는 한 명으로 보였다.
그 차는 우리 집 앞을 빠르게 지나쳐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속도는 빨랐고 다급해 보였다.
난 차가 향하는 곳을 계속 주시했다. 그 차는 파란 대문 집 앞에서 급박하게 멈췄다. 그리고 차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젊은 여성이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굴 찾으러 온 거 같은데?'
이내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부름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오직 그녀의 외침만이 동네에서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니 차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뒷유리가 깨져있었고 외판이 상당히 찌그러져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용할 정도로 차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집 안에서 애타게 누군가를 찾던 그녀는 이내 대문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어? 그러고 보니 저 파란 대문 집은?'
내가 기억을 떠올리려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검은 형체가 그녀를 덮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형체는 집 안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이런 씨"
멀었지만 잠깐 봤던 그놈은 분명 못난이 괴물이었다.
난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내 몸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생존 본능인가? 아니면 이기심?
내가 지금 뛰어 들어가면 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괴물에게 잡혀 들어갔다면 이미 죽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나까지 죽는 건 아닐까?
‘그런데 말이지’
내가 외면하고도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난 검과 방패를 챙겨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차를 몰고 가면 돌아가야 하지만 뛰어가면 언덕만 오르면 된다. 차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다.
‘게다가 저 집은···’
난 숨을 헐떡거리며 파란 대문 집 앞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왼팔에 낀 방패로 얼굴과 심장을 가리고 오른손에 꽉 쥔 검을 겨누면서 숨죽이며 놈을 찾았다.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열려있는 문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기절했나? 아니면 벌써?'
난 순간 걱정과 공포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세상이 변하고 처음 본 사람이다. 처음 본 개는 구하지 못했다. 이 사람까지 어떻게 된다면 내 멘탈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난 검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난 열려있는 방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뀌이이이!
이미 한 번 들어봐서 익숙한 그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내 뒤쪽 천정에서 들려왔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무언가가 내 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각의 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려는 듯 나의 감각은 시간을 강제로 왜곡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흉측한 놈의 검은 앞발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웅크린 채 천장 구석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난 몸을 돌려 방패로 그 징그러운 발을 쳐낸 후 바로 검을 휘둘렀다. 대상은 놈의 목이었다.
이번엔 찌르기가 아니라 베기였다.
그리고 마치 두부가 잘려 나가듯 놈의 목에 가로선이 생겼다. 그리고 이내 초록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면서 놈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놈의 몸통은 그대로 천정에 붙어있었다. 놈의 다른 발들이 그대로 벽과 천정에 고정된 게, 마치 진드기가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난 바닥에서 구르는 놈의 머리를 노려봤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이내 검어지더니 천정에 붙어있는 몸통과 함께 회색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공중에서 코르카 한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코르카를 주머니에 챙기며 소리쳤다.
"이봐요! 괜찮아요?"
하지만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난 방을 뒤졌다. 그리고 부엌도 살폈다. 보이지 않았다. 그때 끈적한 발자국이 욕실 쪽으로 찍혀 있는 게 보였다.
난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 놈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든 상황은 절대 낙관적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항상 의심해야 한다.
난 방패를 치켜든 채 검으로 살짝 열려있는 그 문을 밀었다. 문은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욕조가 없는 작은 욕실이었다. 누군가의 발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아까 봤던 여성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게 보였다. 의식이 없어 보였다.
난 문 뒤와 천정을 확인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폈다. 놈의 발톱에 긁힌 찰과상 말고는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숨을 쉬고 있다는 거다. 다행이었다.
난 그녀를 안고 거실 소파로 옮겨 눕혔다. 그때 그녀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아는 얼굴이다.
어릴 적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었다.
'여기가 성희네 집이었지'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에 가족과 함께 도시로 이사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누굴 찾으려고 했던 걸까?
난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여기 이대로 눕혀두면 또 다른 괴물에게 당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버스로 데려갈 수도 없다.
'어쩐다.'
내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갑자기 번쩍하는 느낌이 들더니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난 잠시 몇 초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통증이 사라지며 이내 파악이 되었다.
그녀가 거실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사이 깨어나 날 후려치고 피한 것이다.
"아프잖아!"
난 볼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작은 다목적 칼을 꺼내더니 날 겨누었다. 그 작은 칼은 그녀의 심정을 보여주는 듯 한없이 안타까워 보였다.
"나다. 진우"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라고!"
난 크게 소리쳤다. 근처의 다른 괴물들이 들을 수도 있었지만,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그녀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애써 구해줬는데 칼을 겨누고 있는 것에,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 한 것에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작고 부실해 보이는 칼을 겨눈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공포에서 의문의 눈빛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나 기억 안 나?"
그런데 그 순간
난 그녀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내 뒤쪽 어딘가로 옮겨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의 위기감은 다시 상황을 신속하게 인지했다. 다시 감각의 시간이 조정되었다.
난 뒤를 돌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기다랗고 시커먼 손 아니 앞발이 현관문에 나타나더니 이내 흉측한 얼굴이 고개를 숙이고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제 처음 봤던 괴물, 공포의 꺽다리다.
놈이 거실로 들어오자 천정에 머리가 닿았다. 난 순간 다시 방패를 쳐들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못난이 괴물처럼 쉽게 놈에게 닿을 수 없었다.
놈의 움직임은 어제 버스 안에서 훔쳐봤던 것처럼 빠르고 또 괴이했다.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내 의식은 느리고 차분하게 흘러가 시간의 흐름을 비트 느낌이었다.
그런데 놈도 나와 다른 어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무언가 시공간을 왜곡하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놈은 나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거실 곳곳으로 번쩍이며 재빠르게 아니면 아주 느리게, 혹은 혼란스럽게 움직이면서 날 교란하고 있었다.
부실한 칼을 든 성희는 현재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난 놈에게 검을 수십 번 휘둘렀지만 닿지 못했다. 하지만 허공에 검을 휘두르면서도 계속 내 머리에 새겨지는 뭔가가 있었다.
그건 놈이 움직이는 패턴이었다. 놈의 움직임은 불규칙적이지 않았다. 다음 동작을 하기 전에 어딘가에 힘이 더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 작은 순간들은 나에게 모두 하나하나 포착되고 기억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놈이 다음에 있을 공간을 확신했다.
그리고 내 검은 그곳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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