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에필로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외쳤다.
“아우, 배고파! 밥 먹자!”
만면에 미소를 지은 예솔이 물었다.
“그렇게 배고파?”
“응!”
예솔이 똘망똘망한 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고 흠뻑 젖은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귀여워 미치겠다는 듯 웃었다.
“쿡쿡, 말투가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아빠 말투 싸가지 없대. 그럼 나도 싸가지 없는 거야?”
깜짝 놀란 예솔이 되물었다.
“우리 솔구,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저 밑에 마을 사람들이, 저번에!”
“아우, 배고파! 밥 먹자!”
남구의 목소리를 쫓아 예솔과 솔구가 동시에 홱 고개를 돌렸다.
남구가 기다란 낚싯대를 평상에 기대 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
솔구가 쪼르르 달려가 남구의 품에 폴짝 뛰어들어 안겼다.
남구가 품에 안긴 솔구의 까만 머리카락을 예솔과 마찬가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다 젖었네?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응! 지렁이 잡으러.”
“으흐흐, 많이 잡았어?”
“어? 지렁이다.”
솔구가 남구의 품에서 벗어나 또다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남구가 빙글거리는 웃음 띤 얼굴로 예솔을 돌아보았다.
“쟤, 요즘 지렁이 너무 좋아한다?”
“자기가 맨날 낚시하니까 그렇지!”
남구가 다시 솔구의 하는 짓을 히죽거리며 구경했다.
예솔은 솔구를 바라보는 남구의 미소진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왼쪽 눈두덩이에 난 기다란 발톱 자국이 미소에 따라 세 줄이나 꿈틀거렸지만, 인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귀기를 풀풀 날리던 예전과는 다르게 멍청해 보일 정도로 히죽거리던 남구의 입술이 열렸다.
“풋! 대견하네! 뭐라도 돕고 싶은 건가?”
“우리 솔구 심성이 너무 착해!”
“착하긴 한데 잠자리 날개랑 개미 다리 같은 거 죄다 뜯어내는 거 보면 좀 꺼림직하단 말이지.”
“자기 닮았나 보지 뭐.”
무안해진 남구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밥은?”
“앉혀 놨어. 조금 기다려야 해!”
남구가 오는 길에 따온 머루를 무심하게 한 움큼 꺼내 놓았다.
남구와 예솔이 머루를 집어 먹으며 아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달려 나간 솔구가 흙바닥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고사리 같은 손을 활짝 펼쳤다.
“으아, 중력 제어!”
흙 속에서 반만 빠져나와 있던 지렁이의 머리가 꼼지락꼼지락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솔구가 똥이라도 쌀 듯 엉덩이를 쭉 빼고 힘을 주었다.
“으으!”
반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지렁이의 길쭉한 몸통이 고무줄이 당겨지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쏙 빠져나와 솔구의 앙증맞은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와아!”
배배 꼬는 지렁이를 움켜쥐고 폴짝폴짝 뛰며 까르르 웃어댔다.
무성한 나뭇가지가 드리운 평상에 나란히 앉은 남구와 예솔이 지렁이 사냥에 성공한 아들을 보며 동시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웃음을 짓던 예솔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 남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 근데 물고기 왜 한 마리도 안 잡아 왔어?”
“아! 또 귀찮게 하는 놈이 있어서. 그냥 도망쳐 왔어.”
“또 찾아왔어?”
남구가 미간을 좁히며 투덜거렸다.
“아이, 여기까지 쫓아 왔네?”
“누군진 모르지만, 개울에서 여기까지 엄청 먼데 고생이네!”
남구가 넘겨다 보는 곳을 예솔도 보고 있었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숨소리와 발소리가 예솔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예솔은 숨소리와 발소리만으로도 정체를 대번에 파악했다.
“저번에 왔던 그 사람이네?”
“응! 콱 죽여버릴까?”
“아이참! 그런 말 하지마 이제. 마을 사람들이 싸가지 없대.”
“풋, 그래?”
“솔구도 어쩌다가 들었나 봐!”
“내 참! 크리처 잡아 줄 때는 아주 고마워 죽으려고 하더니, 뒷담화 오지는 군.”
-허억! 허억!
저 멀리서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넘겨다 보던 예솔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런 첩첩산중에 웬 정장이람?”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던 남구가 어느덧 예솔 앞에서 시시콜콜 주절주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공무원이지만 물자가 부족한 건 마찬가지겠지. 아무래도 단벌 신사인가 봐! 저번에 입은 옷이랑 똑같아. 내가 가죽옷이라도 한 벌 지어주고 싶더라니까?”
“쿡쿡, 자기도 참!”
정장의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저 멀리서 외쳐댔다.
-남구 님! 제발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오후 햇살이 나른하게 내리쬐는 이곳은 남구의 바람대로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
남구가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며 웅얼거렸다.
“아우! 맨날 똑같은 소리를 뭘 또 들으라는 건지.”
정장의 남자는 남구를 쫓아 밥도 못 먹고 온 산을 헤집고 다닌 지 한참이었다.
다행히 이곳 일대는 좀비와 몬스터의 씨가 말라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산기슭 아래에는 여러 마을이 들어와 있었다.
정장의 남자는 남구가 또 도망갈까 봐 저 멀리서 가빠오는 숨을 헐떡거리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헉헉! 진화한 좀비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헉헉! 국가 재건에 이바지하는 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헤엑! 헤엑! 아이고, 죽것네! 우리 모두의 공생을 위해 힘을 보태 주십시오.
“개소리는 여전하구만.”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남구를 보고 예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염소수염이랑은 다르게 되게 열혈 공무원이야.”
하품하던 남구가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곧 예솔도 고개를 돌렸다.
능선 하나를 뛰어넘은 글탄족의 대장군 베드로가 앞마당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통나무집 앞마당에 희뿌연 먼지가 펄럭펄럭 흩날렸다.
베드로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주군! 신 베드로 문안드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남구가 눈살을 찌푸리며 폴폴 날리는 먼지를 손바닥으로 휘저어 날렸다.
맑게 갠 시야를 확보한 남구가 물었다.
“할아버지, 이 먼 지구까지 왜 또 오셨어요? 생명 에너지 아깝게!”
베드로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남구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람들, 잘 지내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질문을 받은 베드로가 대충 대답했다.
“으흠, 다들 전장에 나가 있습니다.”
남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게, 지구로 같이 오자니까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예솔이 옛 전우들을 두둔했다.
“여기 와봤자 아는 사람 다 죽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오히려 거기에 정든 사람들이 더 많지.”
남구가 못마땅한 얼굴로 베드로에게 뻔한 물음을 던졌다.
“그 동네는 왜 그런데요? 싸움 못하고 죽은 귀신이 들렸나 전쟁이 끊이지 않아.”
베드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 주군께서 데스 게임을 폐하셔서······.”
남구가 콧방귀를 뀌었다.
“풋, 지들끼리 지지든지 볶든지 알아서 하라고 해요. 애먼 사람들 잡아다가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낫네!”
베드로가 간절한 눈빛으로 남구를 올려다보며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주군! 그래서 말입니다만 지금 마계가 혼잡합니다. 주군께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셨습니다. 준동하는 자들이······.”
솔구의 부름에 말이 끊겼다.
“할아버지!”
솔구가 꿈틀대는 지렁이를 작은 손으로 움켜쥐고 쪼르르 달려왔다.
베드로가 방향을 돌려 또다시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찧었다.
쿵-
“연세도 많은 양반이 관절염 생기겠어요.”
남구의 농담에 베드로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쓸 만합니다.”
코앞까지 다다른 솔구를 향해 베드로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솔구가 팔을 활짝 벌려 베드로의 목에 매달렸다.
베드로가 고개를 젖혀 끌어안은 솔구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오홀홀홀! 그동안 몰라보게 자라셨습니다. 곧 있으면 여섯 살이 되시겠군요?”
“네, 할아버지! 근데 오늘은 검 같은 거 안 가져오셨어요?”
베드로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혔다.
“오홀홀홀! 자, 여기 있습니다.”
허리춤에서 명품 스킬을 탑재한 단검이 꺼내졌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깔은 아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단색이었지만 솔구의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다.
“와!”
곧바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챙-
곧장 지렁이를 썩뚝썩뚝 썰기 시작했다.
“에헤헤!”
해밝은 솔구의 웃음소리를 따라 베드로도 흡족한 표정으로 웃어젖혔다.
남구와 예솔만이 꺼림직한 표정이었다.
“오홀홀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네, 할아버지!”
“도련님께서는 훌륭한 검사의 자질을 타고나셨습니다.”
짹짹- 뾰로롱-
남구가 산새들이 정겹게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솔구의 해맑기 그지없는 웃음소리도 섞여 들렸다.
시끄럽게 떠드는 공무원의 목소리는 지워버렸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안으며 시원한 바람에 몸을 떠는 잎새를 바라보았다.
남구가 깊은 산속 우거진 수풀의 풍경을 한차례 둘러보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했다.
“짧은 인생이잖아요. 난 이제 남은 인생이라도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죽을 랍니다.”
충성스러운 베드로가 이례적으로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허 참, 주군! 마생 1000년이면 그리 길다고 할 순 없겠지만 중앙 집권제인 절대 왕국을 건설할 시간은 충분합니다. 주군이시라면 분명히 마계를 평정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니, 있습니다.”
남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처, 천년이라니요?”
“네, 한평생 참 허무하고 짧은 세월이지요.”
오직 한가지 일념만으로 달려왔기에 잊고 있었다.
남구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 맞아! 난 마족이었고 우리 족속은 평균 수명이 천년쯤 되었지?”
“당연한 걸 뭘 물으십니까? 아직 춘추 미령하신데 천 년 동안 이곳에 처박혀 있다가는 산 귀신이 되고 말 겁니다.”
잠시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남구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예솔이 새로운 육체 하나 마련해 줘야겠구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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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완결이네요. ^^
무엇보다 연재를 시작했을 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우여곡절도 조금 있었습니다.
단단히 각오하고 시작했지만 역시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럴 때마다 응원해 주시고 조언해 주신 말씀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더 재미있는 글로 만나 뵙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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