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서 와, 마계는 처음이지?
화들짝 놀라 날아오는 낭심보호대를 얼떨결에 받아 든 대머리 남자가 물건의 용도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활짝 피었다.
그곳에 낭심보호대를 부리나케 착용하며 남구를 향해 고마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짜 고자 되는 줄 알았어요.”
대머리 남자의 웃지 못할 이야기에 미지의 공간에 덜렁 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또다시 한 꺼풀 벗겨졌다.
조금이나마 안정된 표정으로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장비들을 살폈다.
무슨 상황인지 어리바리하게 묻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수용소의 다른 호실과는 다르게 자기들은 상당한 특혜를 입고 있음을 은연중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남구의 의도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이라도 짐작이 갔다.
다들 잔잔한 긴장감이 흐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구가 꺼내놓은 물품 근처로 모여들었다.
눈과 손으로 수두룩한 장비를 가늠해 보며 서로 입혀주고 챙겼다.
지금까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관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영호도 어른과 절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이 따위 성별 따위 불문하고 어리광 따위 결코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염소수염이 사람들 잘 골랐네!’
가타부타 말없이 모두 장비를 챙겨 입고 남구를 돌아다봤다.
남구도 하나하나 사람들의 모습을 훑으며 물었다.
“특별히 주특기가 있는 사람? 예를 들면 활이라든지?”
칼자국의 남자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석궁은 좀 쏩니다.”
남구가 안쪽에서 달랑 하나 있는 석궁을 집어 들었다.
나무와 힘줄로만 만든 것이라 아주 고전적인 석궁이었다.
나무껍질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화살집도 같이 끄집어냈다.
화살집 안에는 작은 뼛조각을 뾰쪽하게 갈아 만든 촉이 달린 짧은 화살들이 수두룩하게 들어 있었다.
석궁과 화살집을 칼자국의 남자에게 건네며 사람들을 쓱 둘러보았다.
다행히 특출난 왕발이 없어 남구의 등산화와 운동화 등을 치수가 조금 크더라도 모두 신을 수는 있었다.
체격도 남구가 가장 컸다.
비록 소매와 바짓단은 접어 올릴지언정 못 입는 인원 없이 헐렁한 듯 넉넉하게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 옷 위에 대나무를 촘촘히 엮어 가죽을 덧댄 가볍고 단단한 상체 방어구를 뒤집어썼다.
종아리와 팔뚝에도 같은 재료로 만든 각반을 찼다.
허리에 뼈로 만든 칼을 꽂고 한 손에는 가죽을 덧댄 나무 방패를 들었다.
나머지 한 손에는 2.5m 정도의 기다란 뼈 창의 나무 봉을 쥐고 세워 들었다.
칼자국이 난 남자만이 창과 방패 대신 바구니 형식의 화살집을 둘러메고 양손으로 석궁을 들었다.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두개골 뒤집어쓰세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흉측한 머리뼈의 용도를 이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몰골을 보며 남구의 실룩이던 입술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풋! 고블린이 친구 하자고 하겠네?’
“턱끈 꽉 조이고 간단하게 통성명합시다. 앞으로 남구라고 부르세요!”
영호가 비장감이 흐르는 얼굴로 남구의 말을 곧바로 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전 박영호예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영호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지만, 턱끈을 꽉 붙들어 맨 해골바가지는 떨어지지 않았다.
칼자국의 남자가 바통을 받았다.
“저는 팽석수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나이가 어린 순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대머리 남자가 휑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약간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전······. 흠흠, 조무모입니다.”
남구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최대한 티를 안 냈다.
경상도 남자가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고 싶은지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남단이라고 합니데이. 잘 부탁합니데이.”
각자의 간략한 소개를 마치고 잠시 멀뚱하게 서서 전투 준비를 마친 서로의 거지 같은 몰골을 둘러보았다.
현대와 원시를 거리낌 없이 오가는 독특한 디자인 양식이었다.
철창밖에 다른 호실 사람들도 저런 것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왜 저러고 있는 것인지 삼엄한 이곳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의아하고 당혹스럽고 불안한 표정으로 1호실 사람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멀거니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남구를 비롯해 소환자 전원의 눈앞에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무 수행을 준비해 주십시오. 남은 시간 10분, 9분 59초··· 9분 58초······.]
관리자들이 제어구를 내밀고 각각의 호실에 각각의 전송 지를 입력하고 다니느라 어수선했다.
전송 지가 입력된 호실부터 바닥 가운데에 포탈이 떠올랐다.
맨몸에 거친 질감의 누런 의복만을 걸친 사람들은 갑자기 생성된 마법진의 광휘로부터 멀어져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고는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를 철창 밖으로 휘돌리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이 염소 새끼들아! 이게 무슨 짓거리야?”
“임, 임무 수행이라니?”
“우, 우리를 어디로 보내려는 거 같은데요?”
“나도 무기 줘! 왜 저 새끼들만 줘?”
“으으, 마른하늘에 이게 무슨······.”
그동안 수용 인원 하나 없이 휑하고 고요했던 넓디넓은 수용소는 북적북적 들어찬 사람들의 아우성에 퇴근 시간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남구도 준비를 마무리했다.
늘 하는 일인 양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신속하게 뚝딱뚝딱 착용해 버렸다.
남구의 허리 뒤쪽에는 예리한 곡선을 그리는 두껍고 짧은 길이의 뼈 칼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또한 한눈에 보더라도 투척용으로 보이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나뭇잎 모양의 뼛조각들이 허리를 빙 둘러 촘촘히 꽂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차만별로 알록달록한 각종 깃털이 삐죽빼죽 드러나 보이는 화살통을 둘러메고 나뭇가지를 휘어 만든 조잡한 활을 들었다.
남구는 일행과 똑같이 방어구를 착용했지만, 머리에 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쓰지는 않았다.
자기들만 흉측한 걸 씌워 놓고 왜 너는 쓰지 않느냐는 질문 따위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오호호호호호호!
멀리서부터 마티나의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수용소 내부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염소수염이 급히 뛰어나가 살살거리는 얼굴로 굽신굽신 마중하고 곧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수행했다.
마티나의 등장에 나머지 관리자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어서 마무리해!”
마티나의 추상과 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관리자들은 또다시 수선스럽게 움직이며 전송 준비를 해 나갔다.
1호실에 도착한 마티나가 애정이 철철 넘쳐나는 눈빛으로 철창을 넘겨다보며 간드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 역시 선견지명이 있는 우리 귀여운 크리처(강아지), 어쩜 이리 예쁘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사람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철창에 바짝 붙어선 마티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넣어준 애들은 마음에 들어?”
마티나의 한마디에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염소수염의 얼굴이 급격히 경직됐다.
혹여 남구가 투정이라도 부린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구가 마계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마티나는 또 제어구도 통하지 않고 남이야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자기 할 말만을 하고 있었다.
염소수염은 타르처럼 알아듣지 못한다는 둥 하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타르처럼 녹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 참!”
마티나가 허공에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염소수염이 바람과 같은 몸짓으로 잽싸게 제어구를 들려주었다.
마티가가 염소수염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넌 내가 혼자 말하고 있는데 멀뚱히 서서 뭐 하니?”
“헉!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몰라 마티나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염소수염의 귓가에 앙칼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혀 들었다.
“너, 정신 똑바로 차려?”
“네! 네! 아가씨!”
남구를 돌아본 마티나의 눈빛은 또다시 넘치는 애정으로 반짝거렸다.
‘다중이니? 성격 참 유별나네! 염소수염 네가 고생이 많구나!’
남구의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존······.]
“처음에는 생존 스테이지에 들어가는 거 너는 모르지? 다른 애들처럼 시시껄렁한 생존 임무를 받을 뻔했지 뭐니? 우리 남구는 최고급 인력인데 낭비지 낭비!”
마티나가 남구를 휘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개막전 이후로 우리 구역에서는 상대가 없었잖아? 하지만 내가 누구니? 다른 동네까지 가서 단체전 잡았단다. 걔네는 너를 모르더라고, 멍청한 것들! 모두가 네 모습에 열광하고 우리 고트 가문을 우러러볼 거야! 오호호호호호!”
경박하기 그지없는 마티나의 웃음소리가 또 수용소에 넘쳐났다.
“10억 LP가 곧 내 수중에 들어 올 거야! 좀팽이 같은 게 더는 레이스를 안 하더라고. 오호호호호호!”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들거리며 웃어젖히는 마티나의 거침없는 웃음소리 사이를 비집고 주눅 든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저, 아가씨! 시간이··· 거의······.”
퍼억- 으아악!
발에 차인 염소수염이 저만치 나뒹굴었다.
“나도 알아! 기분 잡치고 있어!”
말을 안 했다면 입장 시간에 늦었다고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나뒹굴던 염소수염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냥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묻고 있었다.
입을 다물 때와 열 때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분을 못 한다면 녹아내릴 것이다.
염소수염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염소수염을 잠시 노려보던 마티나의 쭉 찢어진 눈초리가 남구를 향하자 급속하게 휘어졌다.
한껏 치솟은 입술이 벌어졌다.
“뭐, 스테이지는 그쪽에서 고르기로 했어. 상관없지? 전장 선택도 그쪽에서 하는데 고작 10억 LP밖에 안 걸다니! 좀생이!”
마계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1호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저 겁에 질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다란 창대에 의지해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마티나가 몸을 돌리며 지나가듯 말을 뱉었다.
“이제 보내!”
한 마디를 남기고 검붉은 벨벳 망토를 펄럭펄럭 휘날리며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마티나의 뒷모습을 소환당한 사람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닫고 두려움과 호기심과 신기함이 어우러진 눈으로 좇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마티나가 절대적인 지위에 있는 자라는 것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마티나는 갓 소환된 다른 사람들이 죽든 살든 안중에도 없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또 퍼 올리면 되는 강가의 모래만큼이나 하찮은 존재들이었다.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마티나를 바닥에 착 달라붙어 엎드린 염소수염이 힐끔힐끔 돌아다봤다.
제 주인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비지땀을 훔쳐내며 서서히 일어나 철창으로 다가와 제어구를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티나가 나간 출입구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힐끔거렸다.
염소수염의 의지가 1호실 모두의 눈앞에 텍스트로 떠올랐다.
[포탈에 올라서라]
짐승 가죽이 깔리지 않은 바닥 가운데에서는 이미 모습을 드러낸 기하학적 모양의 선상을 따라 광휘가 휘돌고 있었다.
남구가 먼저 바닥에서 은은하게 발하는 광채를 즈려밟고 올라섰다.
나머지 사람들이 황급히 모여들려 하자 남구가 제지했다.
“좁아요! 내가 사라지면 따라 들어와. 그래도 돼!”
급하게 몇 발짝 떼던 사람들이 엉거주춤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아, 알겠습니다.”
“그, 그랍시더.”
“그, 그래도 되는군요.”
“네! 대장!”
마지막 말에 세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영호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곧 네 사람의 시선이 남구에게 쏟아졌다.
남구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았다.
모든 이의 두려움을 한껏 품어 안은 이곳에서 남구는 홀로 긴장감 하나 없는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빛무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정중앙에 무료한 듯 짝다리를 짚고 서서 활을 만지작거리는 남구의 모습을 최남단이 지그시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장 맞네! 인자부터 오야붕이라 카이! 잘 좀 부탁 하입시데이.”
‘어서 와, 마계는 처음이지?’
최남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썩은 미소를 짓던 남구의 모습이 광휘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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