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마지막 두 글자를 잇지 못했다
은성은 침착하게 핵과의 교감을 진행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구의 표정이 밀려드는 통증에도 아이처럼 환해졌다.
‘드디어, 이제야, 결국에는 돌아가는구나!’
모두들 가라앉지 않은 호흡을 헐떡거리며 은성의 작업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재앙이 시작됐을 때부터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었던 독보적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인 은성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다들 잘 알고 있다시피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지구로 공간 이동을 하던가,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던가.”
은성의 단호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벽체 너머 지나왔던 통로에서 격한 소음이 들려왔다.
차앙- 챙챙챙- 크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온 곳을 향해 모두 팽이처럼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핏방울과 땀방울이 원심력에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시간 없어. 추격대가 우리 턱밑까지 몰려왔다고. 좀 있으면 이곳까지 닥쳐올 거야.”
친구 중 여자로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승아의 카랑카랑한 음성을 시작으로 잇따라 남자들의 목소리도 줄을 이었다.
“어서 벗어나야 해.”
“어떻게 할 거야? 빨리 결정해. 은성아!”
“뭐가 됐든 난 무조건 찬성이야. 서둘러, 은성아!”
다급한 친구들의 외침이 이 무리의 리더를 향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구의 눈썹 끝이 잠시 잠깐 씰긋거렸다.
‘이것들은 뇌가 없나? 빌어먹을 은성 바라기들.’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씁쓸함을 흘렸다.
‘그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어.’
승리했다면 생명의 핵을 온전히 소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들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씌워진 운명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었다.
실패한 이상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최후의 일전이 계획대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심장부인 공동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했고 잠깐이지만 생명의 핵을 손에 넣었다.
‘순리에 반해 시공간을 뒤트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테지.’
새로운 식민지 점령 계획에 따라 생명의 핵은 이미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였다.
오랫동안 이때를 절치부심 기다려 왔다.
지금 이 순간, 공동에 있는 이 모든 인원을 포함한 지구로의 공간 이동을 감행한다면 핵의 에너지원은 텅 비어 버릴 것이다.
저 족속들은 비어버린 핵에 다시금 생명력을 채우기 위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서로 죽여가며 골육상잔의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몇 세기가 걸릴지도······.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시간 동안은 평화로울 거야.’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저 끔찍한 족속들과 다시 볼일은 결단코 없었다.
남구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 너무 고단해!’
보고 싶은 이가 살아 있지는 않았다.
남구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이 설렜다.
지구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었다.
‘생존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밤새워 술을 마시며 무용담을 나눌 호사도 누릴 수 있겠지.’
꽈앙- 아악! 크아악!
격전의 소음이 이곳 공동으로 점점 가까워져 왔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추격대에 몰살당하든지 핵의 기운에 압사당하든지 둘 중 하나는 틀림없었다.
‘작업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남구가 은성을 돌아봤을 때 핵과의 교감을 마무리한 은성도 고개를 돌렸다.
은성이 바짝 뒤쫓아온 추격대에 동요하는 동료들을 의연히 둘러봤다.
그리고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자!”
은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부진 목소리에 입구를 경계하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은성에게 쏠렸다.
특히 남구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경악한 표정으로 은성을 쳐다봤다.
잠시 귀를 의심했다.
‘시간에 손을 덴다고? 미친 거야?’
무리 중 생명의 핵을 감당할 만한 인사는 리더 최은성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전적으로 은성의 결단이 이곳에 있는 모두의 운명을 가른다.
‘저놈의 새끼!’
남구의 냉철했던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생애 처음으로 리더 은성에게 대들었다.
필사적으로.
“안 돼! 과거로 돌아가 봤자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야!”
“그럼 공동 밖에서 죽어가는 우리 병사들은 다 어떻게 할 거야?”
명분 있는 고결한 은성의 핀잔에 남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숭고하기까지한 은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의 투쟁을 이대로 여기서 끝내고 싶어? 너,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저 오지랖! 그래, 나는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다. 네가 세상을 다 구하지는 못한다고. 우리는 이미 실패했다고. 낙오자까지 전부 구하고 싶었으면 전쟁에서 이겼어야지!’
남구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저 거룩한 은성을 밀쳐내고 자신이 핵을 운용하고 싶었지만 감당 못한 육체가 육편으로 흩날릴 게 뻔했다.
무리 중에서도 신체의 토대와 잠재력이 가장 떨어지는 이는 다름 아닌 남구였다.
친구들의 싸늘한 배려와 더불어 차곡차곡 쌓여간 경험을 바탕으로 근근이 연명해 온 주제일 뿐이었다.
‘잘못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진다.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말려야 해, 말려야 한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는 없지.’
남구는 절실함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은성에게 목청을 높였다.
“절대 안 돼! 은성아, 지구로 이동하자. 우리의 꿈이자 최종 목표였잖아. 시간 역행은 미친 짓이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피를 토하며 거듭 당부했지만, 은성은 그런 남구를 외면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한 마음으로 모두를 사지에 밀어 넣을, 한눈에 보더라도 무모하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성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재앙은 어떠한 전조도 없이 수업 중 느닷없이 닥쳐왔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실을 벗어나 혼자 움직였다면 첫날에 바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당시 남구는 그야말로 숨만 쉬는 송장이라 할 만큼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자기 만족적 허영으로 가득 찬 은성의 정의감이 남구를 살렸고 공교롭게도 그 정의감 때문에 또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은성은 또다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남구를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남구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바라는 눈빛을 가득 감아서 친구들을 둘러봤다.
‘편들어 주는 놈 하나 없는 건가? 과거로 돌아가서 또 이 지랄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
친구라고 부르는 저들은 약했던 남구를 무참하고 철저하게 배척했었다.
쓸모가 생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다들 자기 한목숨 챙기기 급급한 세월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고 애써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근엄한 은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야! 그동안 죽어간 가족과 친구들을 난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
눈꼬리를 치켜세운 은성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난 저것들을 모조리 아작아작 씹어 삼키고 싶어.”
뿌드득-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턱 근육이 불거졌다.
은성의 부릅뜬 고리눈이 이제 막 입구로 들어서려는 족속들에게 쏘아졌다.
남구가 비슷하게 이를 갈았다.
빠드득-
‘여기서 원한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니? 당장 우리가 아작아작 씹어 삼켜지게 생겼어!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니? 죽으려면 혼자 죽던가!’
남구는 애타는 심정으로 적들이 물밀듯이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다시 한번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다들 다음에는 잘해 보자고.”
적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은성은 회한과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눈빛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친구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하지······.”
“다음번에는 모두를 살리고 싶어.”
눈에 새기려는 듯 좌중을 둘러보던 은성이 서글픈 미소를 머금었다.
은성의 광오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따라 웃었다.
‘하! 저런 병신 새끼들!’
눈앞의 행태에 남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구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그 분노의 눈빛은 은성과는 다르게 적이 아닌 리더 최은성에게 꽂혀 들었다.
‘대책 없이 무작정 시간만 되돌리면 어쩌자고?’
시간이 태어나기도 전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바로 며칠 전으로 되돌아갈지 알 길이 없었다.
생명의 핵에 남아 있는 에너지가 시간을 어디까지 되돌릴지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지금을 기억하지도 못할 터.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현재의 결과가 미래라고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간 겪어온 생지옥을 또다시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걸 또 겪고 싶니?’
남구는 몸서리쳤다.
야차가 되어야만 살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결말이 뻔한데도 이런 선택을 하려 하다니? 우리가 그 오랜 세월 인내하며 지금 이 순간을 노린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완벽한 해피 엔딩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절반의 해피 엔딩을 앞두고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친구들이 생명의 핵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든 남구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적과 싸우는 숭고한 신념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저 저 빌어먹을 족속들이 없는 고향에서 한적하고 평화롭게 살다가 때가 되면 평안한 안식을 취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 영혼이 에너지 따위가 돼서 이놈 저놈에게 떠도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라고.’
손에 닿을 듯 다 잡은 기회를 은성이 빼앗으려 했다.
지옥 같은 삶에서 지금까지 견딜 수 있게 해준 최종 목표이자 마지막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려 했다.
그간 정신력 하나로 버텨오던 남구가 무너져 내렸다.
20년이 넘도록 흘려본 적 없었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차오를 때였다.
은성의 제어에 핵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은은하던 푸른 빛이 강렬해지며 새하얗게 변해갔다.
‘돌이킬 수 없다. 개자식!’
남구는 절망적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해야 했다.
막아선 적들과 잡다한 괴수와 우두머리 크리처를 처치하고 획득한 생명 포인트를 몽땅 ‘정신방벽’에 쏟아 부었다.
[정신방벽의 최종 스킬 트리가 개방됩니다]
‘쓰레기 스킬을 배운 것도 모자라 피 같은 포인트를 투자한다고 온갖 비웃음을 당했었는데 결국 끝장을 보는군.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심히 궁금하구나!’
[영혼불멸]
이것저것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최종 스킬 트리가 열리자마자 다급히 능력을 개방해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미간을 바짝 모았다.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비물질적 실재의 기운이 뇌파의 명령에 즉각 반응하며 대뇌 피질 속 140억 개에 이르는 신경세포를 따라 물밀듯이 푸른색 코팅을 이어 나갔다.
순식간에 남구의 까만 동공이 푸르게 물들었다.
리더 은성과 친구들의 온갖 괄시를 다 받아 가며 살아남기 급급해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닐 적, 먹다 남은 뼈다귀를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선심으로 적선 받듯 하나 얻은 남구 인생 최초의 스킬이 바로 ‘정신방벽’이었다.
이 눈물 젖은 스킬을 처음 펼쳤을 때는 겁나고 두려운 마음을 조금의 용기로 바꾸는 정도에 불과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쓸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정신방벽은 지금의 남구를 있게 한 원천이었다.
그만큼 숙련됐고 능숙했다.
[정신방벽 숙련도 100%]
‘흑! 요지부동이던 숙련도가 결국 마지막에 와서야 100%를 달성했구나!’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푸른 빛이 감도는 눈물방울을 서럽게 주르륵 떨궈 대는 남구의 모습에 다투었던 은성의 눈빛이 애잔해졌다.
은성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구를 다독였다.
“남구야!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야. 다시 만날 걸 알잖아.”
‘개자식아! 뭔 개소리냐? 너 같은 병신 새끼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생고생······.’
화악-
눈이 멀 정도로 환해졌다.
생명의 핵은 자폭하듯 빛살로 드넓은 공동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핵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백색 섬광이 남구의 상처투성이 전신을 빈틈없이 집어삼켰다.
“윽! 이이이, 개······.”
남구는 마지막 두 글자를 잇지 못하고 작은 입자로 화해 버렸다.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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