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안전지대 (1)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구의 등 뒤에서 육중한 석벽이 맷돌 가는 소음을 우렁차게 울리며 석실 입구를 봉쇄했다.
쿠구구구구- 쿠웅-
닫힌 석벽은 지나왔던 터널과 이제 막 들어온 석실을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으로 나누어버렸다.
‘순식간에 고소한 냄새가 사라지네? 공기의 흐름마저 차단해 버리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라! 벌레 걱정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겠어.’
전방을 바라본 남구는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에도 불구하고 눈과 입이 한껏 벌어졌다.
‘됐어! 한번은 걸리는군.’
남구는 순식간에 평소의 제 표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먼저 진입한 여자들은 여전히 쩍 벌어진 입과 휘둥그레 뜬 눈을 어쩌지 못했다.
모두 넋을 잃은 듯 제 자리에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 이게 다 뭐지?’
남구의 생각을 대신 말해 주듯 중동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다 뭐지?”
여자들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희열에 찬 목소리가 하나둘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꺄아! 우, 우리 살았어!”
“저, 저건 돼지야?”
“저 건 닭?”
“염소 아니야? 저거?”
석실 한구석에 돼지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바로 옆으로 염소 우리와 닭장도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놀란 돼지와 염소와 닭들이 꽥꽥대며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몬스터 따위가 아니야. 오리지널 가축이로군. 지구에서 공수해 왔네!’
널따랗게 조성된 텃밭에는 지구의 작물이 심겨 있었다.
“어머! 텃밭도 있어.”
“우리 안전지대에 들어왔나 봐!”
“저거 양배추야?”
“당근도 있어.”
“저건 토마토?”
한 여자가 텃밭으로 뛰어가 흙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활짝 핀 얼굴을 돌리고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감자! 흙 속에 감자도 있어. 여기선 식량 걱정할 필요도 없어.”
여자들은 마치 모델 하우스를 구경하는 예비 입주자처럼 들떠 이곳저곳 종종걸음을 치며 돌아다녔다.
몬스터가 소환되던 장소에는 목욕탕의 욕탕처럼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 걱정은 없겠다.”
“로마 시대 목욕탕 같아.”
“우리 다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중동 여자가 다가가 탕 안에 고인 물을 들여다보았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은 티끌 하나 없이 바닥까지 훤히 비쳐 보였다.
바닥에서 몬스터 대신 신선한 물이 콸콸 샘솟았다.
순환되는 깨끗한 물을 언제든지 원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남구의 일행이 일정 기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한 환경이었다.
‘대체 여기서 얼마나 살라고 이런 시설을 만들어 놓은 거지? 시청률이 높아 목숨을 좀 더 붙여 놓고 싶은 거니? 아주 뽕을 뽑을 작정이로군.’
중동 여자가 두 손으로 물을 퍼 올려 마셔보고는 껑충껑충 뛰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캬아! 시원해! 우리 여기서 식량 걱정 없이 평생 살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제 죽을 걱정 안 해도 돼!”
모든 여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물을 마셔봤다.
반색한 얼굴로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단체 줄넘기를 넘듯 환희에 차 기뻐 날뛰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의 러시아 여자가 손에 손잡고 펄쩍펄쩍 뛰는 행태를 고독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치뜬 눈으로 중동 여자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좋니? 좋아 죽겠니?”
바짝 올라붙었던 치뜬 눈꼬리가 한순간에 축 처졌다.
탕 안에 샘솟는 물처럼 차오른 눈물 때문에 파란색 신비로운 눈동자가 희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파리한 눈가를 씰룩거리며 파삭하게 부르튼 입술을 버르르 떨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난 죽고 말 거야. 힐러한테 빨리 치료받아야 한단 말이야.”
절규하듯 외친 러시아 여자가 어깨에 칭칭 감긴 붉게 물든 붕대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숙이자 방울방울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뺨 위로 또르르 굴러 내렸다.
고개를 든 여자의 그렁그렁한 눈동자에는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먹거리가 차고 넘치는 안전지대에 들어와 기뻐 어쩔 줄 모르던 여자들이 정지 버튼을 누른 듯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모두 남구를 바라보았다.
심한 관통상을 입은 러시아 여자 단 한 명을 제외한다면 모두의 얼굴에 이곳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등장하자마자 기를 쓰고 목숨을 노려오는 무시무시한 몬스터와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폭넓은 터널을 바글바글 가득 채우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거대한 벌레들 또한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소름 끼쳤다.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쭈뼛 서고 몸서리쳐졌다.
죽음이 난무했던 석실을 두 번이나 지나 마침내 맞이한 이곳이 파라다이스처럼 느껴졌다.
여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간절히 갈구하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남구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서 평생 살자는 말이 듣고 싶니? 하긴, 누가 죽든 말든 안전한 이곳에서 최대한 버티고 싶겠지.’
남구는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는 그들의 눈빛 따위 일절 무시하고 석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없는 거 없이 다 있군. 신개념 원룸인가?’
욕실과 주방과 텃밭과 헛간까지 한 공간에 모두 들어차 있는 세상 다시 없을 희한한 구조였다.
각종 먹거리뿐만 아니라 요리 기구를 비롯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누가 보면 이놈의 족속들은 참 배려심이 철철 넘쳐나는 줄 알 거야!’
남구가 화로에 다가가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빠져나갈 만큼의 공간은 안 되는군.’
한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남구가 장비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활과 도를 한쪽 구석에 세워두고 망토를 벗었다.
바람막이 재킷도 훌러덩 벗어 던졌다.
가려졌던 부피 있고 탄탄한 몸뚱이가 땀에 젖은 얇은 티셔츠 한 장 안에서 적나라하게 그 급한 굴곡을 드러내자 이제는 포기하고 널브러져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와! 대단해! 조각 같아!”
“자세히 보니까 진짜 잘 생겼다.”
“저 얼굴, 상처 때문에 사나워 보이지만 본 바탕은 여자보다 더 예쁜 얼굴이야.”
“전에는 배우 아니었을까?”
“어려 보여! 학생이었을 것 같은데?”
“기왕이면 파트너가 잘생기면 좋지!”
“나도 저 정도면 싫지 않아.”
‘뭔 생각들을 하는 거야?’
간편한 차림으로 배낭 옆구리에 채워두었던 손도끼만 꺼내 들었다.
남구가 해치운 남자들의 물건 중 하나였다.
여자들은 남구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왕이면 장작으로 좀 주지, 귀찮게 시리!’
굵직한 통나무 원목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곳으로 이동한 남구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 키보다 훨씬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깃털처럼 가볍게 두둥실 떠올라 남구의 앞으로 날아왔다.
척-
한 손만으로 가뿐히 받아내고서 통나무의 한쪽 끝을 바닥에 내려놓고 비스듬히 기울여 찍어 내렸다.
퍼억-
단 한방에 도끼 뭉치가 깊숙이 숨어버렸다.
퍽- 퍽- 퍽-
사람 몸통보다도 두꺼운 아름드리 통나무가 도끼질 몇 번에 조각조각 쪼개져 나갔다.
여자들이 입을 헤 벌린 채 평생 장작만 패온 듯한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드리 통나무는 흔적도 남지 않고 이내 팔뚝 굵기의 장작으로 변하여 수북이 쌓였다.
남구가 다음 코스로 곧바로 이동했다.
남구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일곱 쌍의 눈동자도 데구루루 쫓아 굴렀다.
돼지우리에 들어가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대가리를 찍어 내렸다.
빠악- 꿰에엑-
멱따는 소리는 순간에 불과했다.
일격에 숨통이 끊어진 커다란 돼지는 천장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수박이 쪼개진 듯 쩍 갈라진 머리뼈를 통해 뇌수와 함께 핏줄기가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남구의 가차 없는 도끼질에 깜짝 놀란 여자들은 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댔지만, 이전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제 뱃속으로 들어갈 것을 다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돼지의 배를 가르자 후드득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도끼로 삼겹살을 큼지막하게 썩썩 도려냈다.
간과 허파와 심장을 툭툭 떼어 낸 남구가 건초 더미를 한 움큼 움켜쥐고 피바다가 된 돼지우리를 빠져나왔다.
남구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집주인인 양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쏘다녔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구가 위화감 없는 발걸음을 화로로 옮겼다.
곧바로 건초 더미를 쑤셔 넣고 불을 지폈다.
뻗어낸 손에 방금 쪼개 놓은 장작이 하나하나 빨려들었다.
장작이 날아오는 족족 활활 불이 붙은 화로 안에 던져졌다.
예솔이 양동이에 한가득 물을 퍼와 옆에 앉았다.
“여기 담가서 피 빼자!”
“그래.”
남구의 손바닥이 삼겹살의 껍데기 위를 슬며시 스쳐 지났다.
애인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에 뻣뻣한 짧은 돼지털이 죄다 뽑혀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예솔이 피식 웃었다.
“그 대단한 스킬을 이런 데 쓰는 거야?”
“이런 능력이 있으니까 대단한 거지! 꼭 사람만 잘 죽인다고 대단한 건가?”
“쿡쿡, 괴변 같지만 듣고 보니 또 그렇기도 한 것 같네?”
살덩이와 내장이 들어간 양동이의 물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남구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물었다.
“돼지 잡아 봤어?”
“돼지뿐만 아니라 별거 다 잡아 봤지! 피 안 빼면 노린내 장난 아니더라고.”
남구의 비틀린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지한 눈빛으로 예솔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동안 어떤 사람들하고 같이 지냈어?”
질문을 들은 예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소였다.
“처음에 합류한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어떻게 하려고 해서 그냥 도망쳐 나왔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들은 괜찮았는데 처음 합류하려 했던 세력 밑에 들어가서 또 그냥 도망쳤어.”
“그 뒤로는?”
“인간들한테 정나미가 떨어져서 그 뒤로 쭉 혼자 살았어. 그냥 좀비 사냥하면서.”
‘그냥 사냥하면서?’
육체 전이를 하지 않고도 놀랍도록 발전한 예솔의 능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남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사냥한 한 수준이 아닌데?”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쉬지 않고 사냥했을 거야. 하루도 빠짐없이. 약하면 죽기 딱 좋은 세상이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너 만나면 꼭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왠지 다시 만날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가족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
‘오냐오냐 귀하게 커온 부잣집 아가씨가 적응하기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꿋꿋하게 잘 버텨냈구나! 네 격변한 모습을 보고 고생 좀 했으리라 생각하기는 했는데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군.’
예솔의 말이 이어졌다.
“육체 쟁탈전에서 네가 했던 행동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멸망한 세상 속에서 부대끼다 보니까 저절로 알겠더라고. 말해 줬던 얘기들도 잊지 않았어. 네가 내 스승인 셈이지.”
남구와 예솔이 불 앞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자 여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치가 빤한 몇몇은 예솔처럼 물을 떠 왔다.
남구가 무쇠솥에 받아 든 물을 부었다.
펄펄 끓기 시작한 솥 안으로 핏기가 가신 삼겹살과 내장과 게살을 집어넣었다.
남구가 건빵 주머니에서 소금 통을 꺼내 솥 안에 뿌려댔다.
예솔의 눈빛은 어떻게 소금까지 가지고 다니냐고 묻고 있었다.
남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대해 곧 설명해 줄게.”
“응, 그래!”
불 앞으로 슬금슬금 모여든 여자들이 펄펄 끓는 무쇠솥 안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저런 내장도 먹어?”
물어오는 여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다 먹어. 못 먹는 게 없어. 후훗, 나는 먹방 찍을 때 이런 거 먹어봤지. 그때 조회수 장난 아니었는데, 아! 그때가 좋았지!”
“먹방 크리에이터였어?”
“응, 프랑스에서는 꽤 유명했어. 내가 좀 예뻐야지? 넌 직업이 뭐였어?”
“모델.”
자기가 예쁘다고 자화자찬한 프랑스 여자만 빼고 알고 보니 모두 학생 신분으로 활동했던 모델과 배우들이었다.
머쓱해진 프랑스 여자를 시작으로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비로소 이제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생겼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 터키, 브라질이라······. 나 참! 국제적으로 여복이 터졌구만.’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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