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크리처 (5)
대굴대굴 구르다가 다시 일어서는 크리처를 항상 맨 뒤에서 몸을 사리던 큼지막한 덩치의 크리처가 곧장 추월해 앞으로 나섰다.
‘네 놈이군! 네놈이 우두머리로군!’
무리에서 덩치가 가장 커다란 개체였다.
여태 무리의 후방에 머물다가 간혹 남구의 측면을 기습적으로 공격할 뿐 웬만해서는 나서지 않는 약삭빠른 면모를 보였다.
‘뭔가 독특한 놈이야!’
똘마니들이 몽땅 나자빠지자 이제야 선두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처도 자기들이 엄청난 내구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노린 목표물을 향해 맹목적이고 흉포하게 달려드는 습성을 지녔다.
저 우두머리는 그런 일반적인 습성을 지닌 크리처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집중하던 남구가 더욱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스킬 ‘한기폭사’가 쏟아져 나오는 싸늘한 눈빛을 우두머리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줄기줄기 쏘아보냈다.
‘만만치 않으려나?’
열 마리나 되는 무리의 수장!
여섯 마리 정도의 소규모로 무리 짓는 일반적인 크리처의 습성을 녀석은 초월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었다.
‘놈에게는 다른 놈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 틀림없어!’
남구가 탄띠에 부착한 검집에서 남은 두 개의 군용 대검을 마저 뽑았다.
날카롭게 갈린 대검을 양손에 가볍게 쥐고 언제든지 몸을 빼며 던질 태세를 갖췄다.
‘글탄 투척술’이 적용된 투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짧은 무기로 직접 근접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투검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할 거야!’
앞으로 나선 큼직한 덩치의 크리처가 복도 벽면에 몸뚱이를 바짝 붙이고 내달렸다.
‘오로라! 벽을 타고 공격하시겠다?’
우두머리는 벽면에 큼지막한 몸뚱이를 스치며 잔뜩 날을 세운 남구마저 지나쳤다.
‘응?’
남구를 지나쳐 온 힘을 다해 1층 매장으로 올라갔다.
‘으응? 튀는 거니?’
꽁지가 빠지게 달음박질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크리처와의 격전이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남구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후우! 후우! 후우우우우!”
발을 멈춘 남구가 차오르는 거친 숨을 조절하며 우두머리가 사라져버린 1층 매장 쪽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멀거니 돌아봤다.
‘놈에게 느껴지던 특별함이 저런 거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행이었다.
‘저놈은 지구에서 번식도 하면서 백년해로할지도 모르겠군. 상황판단도 처세도 빠른 놈이구만.’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1층 매장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흡사 그림이 그려지듯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 왔다.
‘좀비 떼거리가 아주 신이 났네!’
속절없이 외쳐대는 단말마가 공간 전체에 가득 차올랐다.
-으아악! 저, 저리 가! 캬아아아아!
-사, 살려줘! 꺄악! 크아아아아!
매장으로 밀려든 좀비 떼가 상처 입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한창 씹고 뜯는 중이었다.
-꽈앙!
도망친 크리처가 매장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뒤엉킨 좀비 떼를 들이받아 날려버리며 틈바구니를 비집고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돌연 남구가 황급히 고개를 휘돌렸다.
“꺅!”
목구멍에서 기어이 검을 빼낸 크리처가 남구에게 엉덩이를 훤히 보인 채 살아남은 사람들이 피신한 지하 매장 쪽으로 내달렸다.
미간과 이마에 각각 한 자루씩 군용 대검이 깊숙하게 박혀 든 크리처는 내내 비틀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리나케 동료의 뒤를 따랐다.
“으악! 온, 온다.”
“꺄아아악!”
“어, 어떻게 해? 우리한테 오고 있어!”
갑작스럽게 크리처의 표적이 되어 동요한 사람들이 아우성치기 시작됐다.
“부, 부장님!”
김수정 대리가 박 부장을 황급히 돌아봤다.
떨리는 그 목소리에는 어서 총을 쏘자는 재촉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허락 없이 총을 쐈다가는 또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여긴 사람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며 박 부장의 입만을 바라봤다.
“쏴! 모두 쏴! 되도록 조준사격 해!”
박 부장의 일갈이 떨어지자 다급히 겨눈 총구에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타다다다다당-
빠캉- 빠캉-
타앙- 타다당-
크리처들이 심각한 중상을 입고서도 사람들에게 뛰어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양가가 풍부해 보이는 남구를 포기하고 만만한 사람들을 선택한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여러 군데 입었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못 가 절로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사냥감의 LP를 획득하여 육체의 진화를 도모해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것도 운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 상황에서 저 크리처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풍부한 영양가에 욕심이 난다고 계속 남구에게 덤벼들었다가는 남구의 손에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심장이 스스로 멈출 것이다.
상처 입은 외계의 짐승들은 더욱 사나운 기세를 뿜어대며 죽기 살기로 보다 쉬운 먹잇감을 향해 뛰어들었다.
남구가 양손에 쥔 군용 대검을 검집에 수납하자마자 등에 매어놓은 리커브 보우를 재빠르게 벗어냈다.
등에 멘 화살집에서 모든 화살을 한꺼번에 움켜잡고 뽑아냈다.
손바닥을 펼치자 부러진 화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손에는 10개의 화살만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20개의 화살은 크리처와의 격렬한 격전 중에 소실 됐거나 날아온 탄환에 맞아 망실됐다.
10개의 화살을 꽉 움켜쥔 손으로 한 발을 시위에 걸었다.
시위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다.
꾸드드득-
힘을 준 남구의 전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스킬 ‘붉은 화살’은 아랑곳없이 펼쳐졌다.
한계까지 물러난 화살촉에 옅은 기운이 뭉글뭉글 모여들더니 뚜렷한 붉은 빛으로 응축했다.
“후우우우우우우!”
기다랗게 뿜어내는 호흡 끝에 응축한 붉은 기운이 살대까지 쭉쭉 뻗어나갔다.
투웅-
붉은색 빛살이 직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대가리에 대검 두 자루를 매달고 비틀비틀 내달리는 크리처의 옆을 빛살이 스쳤다.
쐐애애애애애액-
앞서 달리던 크리처의 뒷다리에 틀어박혔다.
퍼억-
‘점화!’
꽈아앙-
폭발력에 너저분하게 떨어져 나간 뒷다리가 뒤를 잇는 크리처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캬아아아앙!”
한쪽 다리가 통째로 날아갔지만 세 개의 다리로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유연하게 방향을 틀어가며 신속하게 달렸다.
퍽- 퍽퍽퍽- 퍽퍽-
온몸에 콩알만 한 총알구멍이 뚫리며 달리는 궤적에 따라 가느다란 핏줄기가 띠를 이뤘다.
연달아 시위를 채는 남구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쐐쐐쐐쐐쐐쐐쐐쐐쐐애액-
순식간에 쏘아진 아홉 발의 화살이 허공에 꼬리를 물고 날았다.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벅-
한쪽 다리가 날아갔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그재그로 내달리던 몸뚱이에 단 한발의 예외 없이 모든 화살이 삽시에 틀어박혔다.
“캬아아아아앙!”
앞뒤로 한꺼번에 무수한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크리처가 마지막 포효를 내지르며 복도의 내리막길을 우당탕 굴러내렸다.
그 옆을 비록 쩔뚝거리기는 했지만, 무시 못 할 빠르기로 또 한 마리의 크리처가 지나쳤다.
남구가 텅 빈 복도 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남구의 활짝 펴진 손바닥으로 바닥에 얌전히 떨어져 있던 화살 한 발이 순식간에 빨려들었다.
서둘러 시위에 걸자마자 쏘아 보냈다.
속사로 인해 첫발보다는 붉은 기운이 현저하게 옅었음에도 허공에 일자로 뻗어나가는 빛줄기는 선명히 눈에 들었다.
쐐애애애애애액-
“이런 젠장!”
남구의 눈이 부릅떠졌다.
빠악-
순간 가속한 크리처를 간발의 차로 빗나간 화살이 단단한 복도 시멘트 벽면에 박혀 들었다.
‘비틀거리는 건 페이크였나?’
대가리에 군용 대검이 박힌 크리처는 앞서 달리던 동료를 방패막이로 삼았을 뿐이었다.
언제 절뚝였나 싶게 멀쩡한 몸짓으로 막판 스퍼트를 내듯 갑자기 속도를 붙이며 복도 진지로 덮쳐들었다.
꽈아아앙!
장애물을 들이받자 막아 놓은 집기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크리처는 약한 고리를 보자마자 한눈에 파악했다.
복도 진지는 사람들의 빠른 후퇴를 위해 여닫을 수 있는 구조로 설치됐다.
고정한다고 고정해 놓았지만, 바퀴 달린 집기는 몸통 박치기 한 번에 그대로 밀려 나가 버렸다.
장애물 뒤를 온몸에 체중을 실어 막고 있던 쌍둥이가 집기와 함께 튕겨 나갔다.
장애물 안쪽으로 들어선 크리처는 길길이 날뛰며 닥치는 대로 앞발을 휘저었다.
“으아악!”
“꺅!”
“으윽!”
“커어어억!”
크리처가 사람들과 겹쳐 드는 바람에 변 과장이 난사한 탄환이 두 연인을 꿰뚫었다.
타다다다당-
“아악!”
“꺄악!”
연인이 총에 맞고 쓰러지자 크리처가 변 과장에게 뛰어들었다.
“헉!”
변 과장은 옆에 있던 박 부장을 끌어당겼다.
“어? 어어?”
촤아아악-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온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에 박 부장의 한쪽 팔이 채 썰린 듯 편편이 날아갔다.
“크, 크아악!”
남구가 활대를 던져버리고 날을 세운 앞꿈치로 바닥을 힘껏 박찼다.
타닥-
남구의 신체가 꼬깃꼬깃하게 잔뜩 압축된 스프링처럼 튕겨 나갔다.
그런 발걸음이 연속되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김수정 대리가 팔을 잃고 쓰러진 박 부장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연호했다.
“부장님! 부장님! 으아아아!”
타다다당- 타다당- 철컥- 철컥-
울부짖으며 총을 쏘던 김수정 대리의 탄이 떨어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잡을 수 없이 재빠르게 움직이던 크리처가 다음 표적으로 삼은 김수정 대리에게 희번덕거리는 안구를 뒤룩뒤룩 굴렸다.
“위험해!”
이성우 대리가 탄창을 교환하는 김수정 대리를 잡아끌며 크리처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크리처의 떠오른 몸뚱이는 이미 눈앞에 이르러 있었다.
한계 없이 쩍 벌어진 아가리가 이성우 대리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악!”
뾰쪽뾰쪽 촘촘하게 돋아난 예리한 이빨에 급소를 물린 이성우 대리는 단 한마디의 비명 이후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크리처는 축 늘어진 몸뚱이를 꽉 물고 좌우로 도리질 치다 옆으로 내던졌다.
김수정 대리가 황망한 시선으로 날아가는 이성우 대리의 몸뚱이를 바라봤다.
쒜액- 촤아아악-
“꺅!”
거대한 앞발에 달린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이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몸통 전반을 훑고 지났다.
상체를 강타당한 김수정 대리도 줄기줄기 핏줄기를 흩날리며 이성우 대리와 같은 방향을 향해 속절없이 날아갔다.
1층 매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어렸던 희망의 빛이 빠르게 꺼져갔다.
크리처는 막대한 치명상을 곳곳에 입었음에도 그 움직임이 더욱더 민첩해졌다.
절실하게까지 보이는 몸짓으로 파고든 인파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크리처를 처리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몇몇이 총을 던져버리고 탈출구도 없는 지하 매장으로 무작정 도주했다.
7인의 사무직원 중 막내들도 그 몇몇 사람을 따라 등을 돌리고 내달렸다.
오정아 대리는 사람들이 맞을까 봐 총도 쏘지 못하고 경악한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총구만 겨눈 채 넋을 잃고 서 있던 오정아 대리도 얼떨결에 막내들의 뒤를 따랐다.
이후 모든 사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변 과장 또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크리처에게 가로막혀 게걸음만 치고 있었다.
크리처의 꼬리가 벽에 기댄 채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나던 변 과장의 복부를 빗살처럼 파고들었다.
퍼억-
“으아아악!”
그것이 시작이었다.
변 과장의 비명이 출발 신호라도 되는 듯 크리처는 비호같이 튀어 나가 사람들의 뒤를 쳤다.
크리처는 압도적인 포식자였다.
사람들은 고양이 앞에 쥐와 같았다.
뒤돌아 총을 쏘던 사람이나 앞만 보고 도주하던 사람이나 바닥에 넘어진 사람이나 차례차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모든 행동이 부질없게 느껴진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절망만이 깃들었다.
남구가 복도를 내달리며 손을 뻗었다.
복도 바닥에 고꾸라져 미동도 하지 않던 크리처의 대가리가 움찔거렸다.
쩌저적-
정수리를 가르고 콧잔등까지 깊숙하게 틀어박혔던 쿠크리가 빠져나와 핏줄기를 바닥에 그리면서 쏜살같이 남구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착-
그 와중에도 남구의 다리는 멈춤이 없었다.
일정 거리에 다다르자 남구의 까만 눈동자에 푸른 광채가 반득였다.
‘중력제어!’
[중력제어 숙련도 7%]
남구의 신체가 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진 듯 보였다.
앞발을 한껏 젖힌 크리처의 등 뒤 허공에서 남구의 모습이 느닷없이 드러났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