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히든카드
비록 여자들까지 모두 죽게 되겠지만 고블린은 녹색 안개라는 최후의 보루를 가지고 있었다.
‘너만 히든카드가 있는 건 아니야.’
남구가 망설임 없이 힘껏 땅을 박찼다.
쿠웅- 짜자자작-
밟힌 돌바닥에 무수한 균열이 퍼져나갔다.
파편과 함께 눈코입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허공에 흐드러지게 비산했다.
땅을 박찬 남구가 천장에 닿도록 튀어 올랐다.
카가가가강-
높다란 석실 천장에 날카로운 칼날이 불꽃을 튀기며 마찰을 일으켰다.
한껏 치켜세운 참룡도가 발도술처럼 마찰력의 도움을 받아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따라 발동한 한기파동이 일직선으로 득달같이 뻗어나갔다.
쌔애애애액- 꽈과과광-
고블린의 앞을 겹겹이 막고 있던 방어막이 두부가 잘려 나가듯 반듯하게 썩둑썩둑 베어졌다.
뒤를 이어 몰아치는 한파에 탱글탱글 출렁이던 녹색 방어막은 딱딱한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바닥에 착지한 남구의 전방에는 더 이상 어떠한 방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근 바닥에 깔려 있던 짙은 녹색 안개마저 미세한 얼음 알갱이로 변하여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기파동은 여러 단점이 존재 했지만 단발성 위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폭발력에 날아간 고블린의 코앞까지 꽝꽝 언 빙판길만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10 미터! 딱 적당한 거리까지 날아갔구나!’
널찍한 도신을 타고 풀풀 날리던 싸늘한 냉기와 서슬 퍼런 광채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강철 본연의 예리함만 남은 도신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아 남구의 어깨 위에 척 걸쳐졌다.
동시에 활짝 편 손바닥이 곧장 뻗어 나왔다.
‘일소!’
“케에에에엑!”
고막을 자극하는 거북한 비명이 석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다 죽어가도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내 히든카드.’
하얗게 서리가 낀 고블린의 몸뚱이에서 더욱더 새하얀 광채가 실 가닥처럼 하늘하늘 무더기로 빠져나왔다.
웅웅웅웅우우웅-
엉겨 붙어 배배 꼬인 굵직한 빛의 실타래가 특유의 진동을 발하며 활짝 펼쳐진 남구의 손바닥으로 쭉쭉 빨려들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끔찍한 고통에 마냥 웅크리고 있던 고블린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남구를 올려다보았다.
일그러진 얼굴에 급격한 노화가 일어났다.
자글자글 주름져가던 얼굴이 쩍쩍 갈라지며 송골송골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반대로 남구의 파리했던 얼굴은 발그레한 생기를 급속하게 되찾아갔다.
눈코입에서 줄기차게 새어 나오던 출혈도 멈춰 있었다.
몸을 움직일 미약한 힘조차 남지 않은 고블린은 엎어진 그대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만 간신히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 샘솟기 시작한 녹색 물줄기가 방어막을 형성하기 위해 꿀렁거렸다.
좀 전처럼 순식간에 방어막을 생성하지 못했다.
갈취당한 생명력 탓에 기력이 달리는지 텅 비어버린 마나 때문인지 스킬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카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결국 방어막을 뽑아 올렸다.
녹색 방어막에 가로막혀 허리가 뚝 잘린 새하얀 빛줄기가 순식간에 허공에 흩어져 나풀나풀 퍼져나갔다.
고블린의 부들거리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남구를 올려다보던 얼굴도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처박은 머리를 더는 들지 못했다.
싸늘한 돌바닥에 엎어져 가느다란 숨만 몰아쉬었다.
겨우 형태를 갖추었던 방어막도 한여름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으으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인지 녹색 안개를 쓰고 싶어 주문을 외는 것인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만을 미세하게 달싹거렸다.
대부분의 생명력을 갈취당해 축 늘어져 간신히 숨만 쉬는 고블린을 남구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하관에 둘둘 감아두었던 흠뻑 피에 젖은 눅눅한 붕대를 풀어냈다.
“후우우우우우우!”
벅차오르는 호흡을 길게 뿜어냈다.
몸에서 느껴지는 중독 증세가 더는 없었다.
‘생명력을 깡그리 다 빨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용솟음치는 활력을 만끽하며 손등으로 피에 젖은 입가를 쓱 닦아냈다.
‘기습으로 녹색 안개를 쓸 틈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네?’
고블린을 내려다보는 남구의 까만 눈동자에 강자에 대한 경의가 어려있었다.
‘기력을 몽땅 갈취당해 녹색 안개를 못 쓰니까 어찌 됐든 결과는 마찬가지인가? 히든카드의 타이밍 싸움에서 내가 이긴 셈이군. 하! 재수 없는 놈이지만 정말 강했어.’
사박사박-
코를 박고 널브러져 어깨만 미약하게 들썩거리는 고블린의 머리맡으로 남구가 널따랗게 깔린 빙판길을 밟아 나갔다.
고블린은 다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입술을 뻐끔거렸다.
“으으, 녹, 녹······.”
고블린의 육체는 그 강인함에서 평범한 인간의 육체와 그다지 차이도 없었다.
남들과는 다른 추악하고 왜소한 몸뚱이를 얻은 탓에 여기까지 오느라 어떤 고생을 했을지 남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구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자비가 한 톨도 담겨있지 않았다.
싸늘한 눈동자는 한기만을 풀풀 날리며 그 잔혹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피부가 사막처럼 갈라지고 말라붙은 고블린은 바싹 마른 눈꺼풀이 떨어져 나와 제대로 눈도 감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 드러난 주먹만 한 눈깔을 뒤룩뒤룩 굴려 가며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려 했다.
“으, 녹, 녹색······.”
‘물귀신이냐? 죽어가면서까지 다 데리고 가려고 하는군. 심보 한번 개 같구나!’
“끅! 노, 녹색 안······.”
‘네가 여기서 나를 만난 덕분에 미래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지겠어. 그만 용쓰고 잘 가라고.’
배신자 고블린의 녹색 안개는 인류에게 유명 했고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구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 놓았던 참룡도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카가가가강-
칼끝이 얼어붙은 빙판 위를 스쳐 지나며 눈보라를 일으켰다.
촤아아아악-
한 손으로 골프를 치듯 퍼 올린 궤적을 따라 핏줄기가 포물선을 그렸다.
잘려 나간 대가리가 멀찌감치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쿠웅-
높이 치켜 올라간 참룡도를 순식간에 그어 내려 도신에 묻은 피를 뿌렸다.
촤악-
하얀 빙판에 선명한 핏자국이 일직선으로 흩뿌려졌다.
멈춤 없이 빙그르르 휘돈 도신이 다시 어깨 위에 척 내려앉자마자 망막에는 시스템 메시지가 내려앉았다.
[7985 LP 획득]
[생명 포인트 16535 LP]
‘호오, 대박!’
남구는 이벤트에 투입되기 전 모든 생명 포인트를 소모하여 남은 LP가 제로였다.
바닥이었던 생명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에어리어에서 미션 수행 보상으로 받는 생명 포인트는 50 LP.
남구가 요즘 투입되기 시작한 5에어리어의 보상 생명 포인트도 250 LP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에서라면 이 정도의 생명 포인트도 꽤 많은 양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벤트 미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벤트에서 살아남는다면 그야말로 비약적인 능력 향상을 노릴 수 있겠구나!’
머리 없는 고블린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여자를 수두룩하게 데리고 나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군. 너도 엄청나게 쏟아질 보상에 대비하고 있었구나!’
[암컷 소유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암컷 보유 현황 : 9 / 50]
‘아직 2명은 숨이 붙어 있나 보네?’
메시지 텍스트를 치워버리고 고블린을 따라 들어온 여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쯧!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거지 같은 놈을 만나 떼죽음을 당했어.’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온 대로 중독되어 쓰러져 있는 여자 중 단 2명만이 미약하게나마 가슴을 들썩거렸다.
입과 코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음, 살릴 수 있을까?’
육중한 도신을 어깨에 걸친 채 짝다리를 집고 주변을 휘적휘적 돌아보았다.
다행히 녹색 안개는 한기파동에 의해 모두 소멸하였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주 극소량의 독소가 공기 중에 퍼져 있지만 당장에 위험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외양간과 텃밭은 녹색 안개가 깔린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먹거리가 녹색 안개 탓에 초토화되었다.
채소도 닭도 염소도 심지어 걸어 놓은 돼지고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찰박찰박-
젖은 발걸음 소리에 남구의 고개가 돌았다.
예솔만이 흠뻑 젖은 물기를 뚝뚝 떨구며 남구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여자들은 중독되는 것이 두려워 여전히 탕 속에 몸을 깊이 담근 채 환희에 찬 눈동자만 껌뻑거리며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남구를 필사적으로 응원했었다.
추악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고블린의 여자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자기 소유의 여자가 죽건 말건 끔찍한 독가스를 아무렇게나 뿜어대는 행태도 몸서리치게 소름 끼쳤다.
고블린의 대가리가 날아갈 때는 당장 탕 속에서 뛰쳐나와 펄쩍펄쩍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온갖 구멍에서 핏줄기를 쏟아내며 처참한 몰골로 죽어간 여자들의 푸르딩딩한 시체가 바로 눈앞에 버젓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껏 겁에 질린 여자들은 중독될까 봐 환호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물속에서 보글보글 거품만 일으킬 뿐이었다.
남구가 다가오는 예솔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다행이네! 중독되지 않았군.’
옆에 바짝 붙어선 예솔이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을 튀겨가며 남구의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남구가 눈을 깜빡였다.
‘예솔아! 물 튄다.’
곧 뚫어져라 살펴보던 눈동자에 안도의 기운이 돌았다.
예솔의 촉촉이 젖은 입술이 역시 물방울을 튀기며 열렸다.
“괜찮아? 일소로 다 치료된 거야?”
죽든 말든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남구는 이런 극진한 호의를 받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남구가 얼굴에 튀긴 물방울을 훔쳐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일소 꽤 쓸 만하지? 걱정하지 마! 멀쩡해!”
“휴우! 정말 다행이다. 네가 먼저 기습 했는데도 꽤 버티던데?”
예솔이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으로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간 고블린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계속 물어 왔다.
“이게 육체 전이자의 힘인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스킬을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 봐! 이런 사람 많아?”
‘내 주력 스킬을 몽땅 쓰게 될지 나도 몰랐단다.’
남구도 한시름 놓았다는 듯 길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휴! 녹색 안개 터져 나올까 봐 식겁했어. 저 정도면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지! 앞으로 이런 놈들 많이 생길 거야!”
“나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는데 찐득찐득한 괴상한 스킬 때문에 전혀 도움이 안 됐어. 미안해!”
예솔은 잘못이라도 한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풀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도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네게 도움이 되지 못하다니, 난 정말 형편없나 봐!”
‘허 참! 형편없다니? 내가 은성이를 롤 모델로 삼았듯이 예솔이도 날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네?’
예솔은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날 돕는 거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구나! 굳이 뭔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너 같은 인재는 끝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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