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결전 (1)
마왕성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웅장한 산맥을 뒷배경으로 고즈넉이 자리해 있었다.
굽이치듯 끝없이 뻗어나가는 광활한 산맥 저 안쪽 어딘가에서 끝없이 불그스름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대규모 포탈이었으나 광대한 산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희뿌연 안개를 뚫고 포탈의 붉은 광휘가 끝도 없이 연달아 휘몰아쳤다.
붉은 광휘가 휘몰아칠 때마다 수백의 사람이 속속 등장했다.
험준한 산세에 비해 비교적 평평한 평지에 이미 수만의 군세가 도열해 있었다.
한낮이었지만 하늘은 온통 먹구름에 가려져 스산했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마왕성 일대는 짙은 안개가 끼어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있는 듯했다.
바닥에 깔린 잎새 위로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수많은 발 구름에 묻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털북숭이 남자가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털어내며 구시렁거렸다.
“하고많은 날 중에 하필 날짜를 잡아도.”
남구의 곁에 붙어선 베드로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투덜거린 털북숭이에게 휘돌았다.
살기를 느낀 남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죽였으면 내 주위에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글탄족의 대장군 베드로가 남구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아무도······. 그렇다면 소인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저 많은 목을 벨 대장군을 죽이면 제가 너무 수고스럽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미소가 짙어진 베드로가 남구의 시선을 따라 산기슭 밑을 내려다봤다.
포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진입했음에도 마왕성의 주둔군이 벌써 개미 떼처럼 달려 나와 진을 치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거렸다.
이내 굳센 의지가 담긴 목소리가 남구의 귓가에 또박또박 들려왔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해도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가시는 길, 저들의 피로 융단을 깔아 드리겠습니다.”
마계는 인권은 고사하고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곳이었다.
남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으흐흐흐!”
남구의 웃음에도 살기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상식과 감성이 모두 뒤집힌 지 오래였다.
남구 역시 마계의 족속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남구와 베드로가 마왕군의 진영을 내려다보며 살기를 뿌려댈 때 수철이 질퍽한 흙바닥을 박차고 달려왔다.
“헉헉! 다 진입했어.”
남구의 주변에 몰려 있던 예솔과 1호실 출신 사람들과 공격대 대장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더욱 짙어졌다.
글탄 족속의 영지를 중심으로 수년을 싸워 왔으나 이렇게 총공세를 펼친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남구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야말로 인류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결전의 날이었다.
남구의 입이 열렸다.
“쟤들 자리 잡기 전에 쓸어 버리죠. 각자 위치로!”
공격대 대장들의 서둘러 돌아서는 발소리를 들으며 남구의 입술이 들썩였다.
‘아공간!’
남구의 왼쪽 어깨 위에서 허공이 찢어졌다.
활짝 열린 공간으로부터 서서히 일렉트릭 리커브 보우가 빠져나왔다.
왼손을 들쳐 올려 받아낸 남구가 시위를 매겼다.
끼이이익-
한껏 당겨진 살대에 붉은 광채가 어렸다.
퉁- 쐐애애애애애액-
모두의 시선이 높이 떠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날아가는 붉은 광채를 올려다보았다.
남구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져간 붉은 광채의 화살을 바라보며 스킬을 펼쳤다.
‘분열!’
쫘자자자작-
젖은 하늘에서 쪼개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높이 떠오른 붉은 점에서 세포가 분열하듯 줄기줄기 갈라져 떨어져 내리는 화살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보다도 많아 보였다.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반득거렸다.
‘중력제어!’
수직으로 곧게 내리꽂히는 무수한 붉은 광채의 화살이 뿜어지는 숨결을 쫓아 유도탄처럼 휘어지며 일일이 마왕성의 병사들에게 박혀 들었다.
-컥! 으아악! 카악! 크아아아!
일대에 통곡의 비명이 넘쳐흘렀다.
찢어지는 절규가 음악이라도 되는 양 남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맺혀 있었다.
비틀린 입술이 달싹였다.
‘점화!’
꽝꽝꽝꽝꽝꽝꽈아앙-
광범위한 범위에 방사포가 차례로 꽂히듯 폭발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굉음과 비명이 섞여 마왕군의 주둔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뒤를 이어 공격대 대원들이 발사한 화살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쑥대밭이 된 주둔지로 날아들었다.
남구가 사용한 스킬과 비슷한 스킬이 곳곳에서 수직으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폭발음이 이어지며 대지를 흔들어 댔다.
폭발에 휘말린 흙더미와 살덩이와 핏줄기가 허공에 뒤섞여 난무했다.
휘몰아치는 각종 소음을 뚫고 날카로운 남구의 목소리가 깊은 산맥 전체에 쩌렁쩌렁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
삽시에 정적이 찾아왔지만 곧 마왕성이 뒤흔들릴 것만 같은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돌격! 싹 다 죽여버려!”
-와아아아아아아!
산등성이에서 수만의 군세가 쑥대밭이 된 마왕군의 진영으로 각종 이동기를 펼치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남구가 질펀한 진흙을 지르밟으며 산책하러 나가는 양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전선에 들어서자 남구의 호위대가 앞서 나가며 덤벼드는 마왕군을 처리해 나갔다.
흙칠과 피칠을 하고 조금만 움직이면 옆 사람과 어깨가 닿을 듯 빽빽하게 뒤엉켜 싸우던 마왕성의 병사들이 남구의 진행 방향에 따라 짚단 넘어가듯 신체 일부를 허공에 흩날리며 픽픽 쓰러져 나갔다.
남구의 눈동자가 스르륵 옆으로 돌았다.
독보적으로 마왕군을 박살 내며 성을 향해 돌진하는 공격대가 보였다.
‘하여간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최남단이 파르티잔의 진동하는 창날로 두꺼운 흉갑과 함께 심장을 뚫어 버리고는 말했다.
“야봐레이, 점마 은성이 아이가? 누가 지 센 거 모르나? 혼자 너무 깊이 들가뿌다. 엔가이 좀 하지!”
머리통이 날아간 허공에서 박도를 든 예솔의 모습이 아직 떠 있는 핏줄기와 함께 나타났다.
예솔의 주변에는 수십구의 시체들이 일어나 마왕군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남구야! 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대원들 피해가 심해!”
과거에는 은성의 보조를 맞출 출중한 실력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정예화된 남구의 공격대도 주변의 속도에 맞추어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은성이 이끄는 공격대만 너무 앞선 나머지 길게 늘어진 허리가 토막토막 뚝뚝 끊기고 있었다.
팽석수가 백색 광채를 흩뿌리는 에뻬로 한꺼번에 세 명의 목덜미를 꿰뚫어 버리고 물러서며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저러다가 은성 씨만 남고 다 죽을 것 같은데요?”
검기로 단칼에 대여섯을 베어버린 베드로가 은성을 힐끗 돌아보며 그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훌륭해! 대단한 무위군.”
꽈앙-
거대한 해머로 바닥을 찍어 주위에 몰려든 마왕군 한 무더기를 통째로 날려버린 삼식이 돌아보며 물었다.
“형님! 제가 가서 좀 도울까요?”
퍽- 크악!
조무모의 어깨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박힌 화살을 뽑자마자 새살이 차올랐다.
길고 촌스러운 주문을 순식간에 속으로 외운 박영호가 조무모에게 핀잔을 날렸다.
“무모형! 무모하게 어디 보는 거예요? 형이 지금 은성이 형이나 힐끔거릴 때예요?”
조무모가 활에 맞았던 어깨를 빙글빙글 돌려 보며 변명해댔다.
“아, 아니, 나도 전장 파악 겸 무슨 일인가 좀 보려고 했지!”
남구가 입을 열었다.
“놔둬도 되겠군.”
남구의 말에 모두가 전방에 고립된 은성을 넘겨다 보았다.
수철과 승아의 공격대가 전진에 박차를 가하며 은성과 합류하려 했다.
“이참에 조금 더 속도를 올리자고.”
남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무모가 소리 활촉을 쏘아 명적을 울렸다.
삐이이이이이-
돌격 신호에 인류의 군세가 난장판이 되어버린 마왕군을 더욱 몰아붙였다.
진영을 갖추지도 못하고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마왕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예상치도 못하게 마왕성 바로 뒷마당에서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받은 마왕군은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한 인원들이 허기질 때가 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굵어졌지만 이미 성안으로 모두 진입한 상태였다.
공격대별로 흩어져 성안에 남아 있던 잔당들까지 모두 소탕해 나가고 있었다.
남구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생명 에너지의 흔적을 쫓아 성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저기가 마왕의 권좌가 있는 곳인가?’
거대하고 육중한 두 짝의 문짝이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뭉텅이로 느껴지는 생명 에너지에 이끌려 온 사람은 남구만이 아니었다.
은성과 수철, 승아를 비롯해 많은 인원이 대전의 입구 앞에서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구가 활짝 열린 입구로 안쪽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대전 끝에는 권좌에 앉은 마왕과 그 옆에 늘어선 몇몇이 이제 막 들어서려는 승리감에 도취한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의리 없는 놈들! 고작 세 명만 마왕 곁을 지키는군.’
이미 싸우다 죽었는지 꽁무니를 내뺐는지 넓은 대전에 최후를 각오한 인원이 마왕을 포함해 딱 네 명뿐이었다.
은성이 남구를 돌아보며 울분에 찬 목소리를 발했다.
“마왕은 나한테 맡겨줘. 내 부모와 형제를 좀비 따위로 만들어 버린 저 개자식을 내 손으로 기필코 죽여버리고 싶어.”
남구가 분주하게 휘돌리던 눈동자를 멈추고 눈썹 끝을 꿈틀거렸다.
‘그래, 나는 할머니뿐이었다. 이 자식아!’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마왕을 누가 죽이든 솔직히 상관없었다.
베드로가 못마땅한 얼굴로 남구에게 물었다.
“마왕의 목은 마땅히 주군께서 거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거 보세요, 할아버지! 전 과거에 크리처랑 피투성이로 뒹굴면서 땅속을 박박 기어 다니느라 마왕 구경도 못 해봤는답니다. 저놈이 얼마나 강할지 어떻게 알아요? 나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마왕의 이모저모를 파악하기에 은성만큼 안성맞춤인 인사도 없었다.
은성이 마왕을 잡아도 좋고 못 잡아도 역량을 파악할 좋은 기회였다.
‘붕어한테는 떡밥을, 마왕한테는 은성을!’
남구는 속마음과 다르게 평온한 표정이었다.
삐뚤어진 입꼬리로 사람 좋은 미소를 빙긋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누가 잡든 뭐가 대수겠습니까? 잡는 게 중요하죠.”
남구는 인류 최강자의 경지를 달성하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생겨났던 비열한 속성은 아직도 여전했다.
베드로는 썩 내켜 하는 표정이 아니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대 주군의 복수를 꼭 주군께서 직접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만 넓으신 아량에 그저 탄복할 뿐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네요. 그래요, 맹목적인 충성심 좋습니다.’
남구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라 여긴 은성이 마왕의 권좌가 있는 넓은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은성을 따르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줄줄이 이어졌다.
은성과 은성의 얼마 남지 않은 공격대가 쿵쿵 발소리를 당당하게 울리며 대전으로 진입해 들었다.
모두 기세가 등등했지만, 솟구쳐 오른 권좌 위에 올라앉은 마왕이나 그 주변으로 늘어선 자들이나 동요가 일절 없었다.
마왕은 권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한쪽 팔걸이에 체중을 실은 채 진입하는 인간들을 무심한 눈으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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