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결전 (3)
정신없이 회피를 이어 나가던 남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정신방벽!’
눈앞에 드리워진 모든 환영이 물에 씻겨 내리듯 말끔하게 지워졌다.
남구의 눈동자에 맺혔던 붉은 광채가 거치며 본연의 빛이 찾아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또렷하게 초점을 잡고 마왕을 노려보았다.
느긋했던 마왕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데스 게임을 관람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살짝 드러낸 채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어 보이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뱉어냈다.
“큭큭큭, 너무 쉬워도 재미없겠지. 얼마나 버티나 어디 구경이나 해 볼까?”
‘웃기는? 더는 내 영혼을 가지고 놀 수 없을 거야. 속전속결로 끝내야겠군.’
마왕은 셀 수 없이 수많은 병력에 포위된 상태였으나 위축되는 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신방벽의 지속시간은 15분.
적용 시간 안에 끝을 봐야 했다.
‘은성과 조무래기 셋, 그리고 마왕 마라야스!’
공기가 갈가리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쌔애애액-
남구는 날아오는 윈드 커터를 그대로 맞으며 파고들었다.
퍼억-
바람의 칼날이 남구의 황금색 흉갑을 베고 지났다.
가슴뼈에 금이 갔지만 금방 붙을 것이다.
파고든 남구가 은성의 멱살을 낚아챘다.
‘내 언젠가 너를 꼭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
멱살을 꽉 틀어쥐고 은성의 얼굴에 정권을 찔러 넣었다.
뻑-
‘진짜! 아구창을 날려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이 빌어먹을 놈아!’
뻑- 뻐억-
은성의 높은 콧대가 주저앉았다.
붙잡힌 은성이 코피를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벗어나려 발광했다.
바짝 붙어선 남구의 옆구리와 겨드랑이에 칼날을 번갈아 들이대고 베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마법과 물리 공격을 모두 커버하는 무적의 황금색 흉갑 덕에 남구의 육체는 찰과상조차 입지 않았다.
남구의 연타가 은성의 안면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뻑뻑뻑뻑뻑뻑-
아무리 높은 스텟의 육체 능력을 갖췄다 해도 계속되는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은성이 어느 수준까지 신체 능력의 스텟을 올렸는지 알 길은 없었으나 남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은성은 잡힌 멱살에 작용하는 남구의 엄청난 완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복날 개처럼 얻어맞던 은성의 붉은 눈동자가 턱에 적중한 막타에 뒤집혔다.
빡-
붉게 물든 흰자위를 드러낸 은성을 뻥 뚫린 입구로 날려 버렸다.
“꺼져! 새끼야!”
멱살을 틀어 잡힌 채 그대로 한 팔 업어치기를 당한 은성이 야구공처럼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복도 벽면과 충돌했다.
꽈앙- 짜자자자작-
온몸으로 처박힌 벽면에서부터 거미줄 같은 균열이 물결치듯 퍼져나갔다.
벽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은성이 부서져 내린 돌조각을 뒤집어쓴 채 정신을 잃었다.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눈동자의 색깔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복도에 대기 중인 대원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힐링 스킬의 사용 여부를 망설이고 있었다.
‘13분.’
시간이 촉박한 남구가 냅다 집어던진 몸을 틀어 곧바로 마왕에게 걸음을 옮겼다.
검을 말아쥔 마왕의 수하 둘이 앞을 막아섰다.
‘마왕의 정신계 마법을 견딜 정도면 대단한 놈들이겠지. 그래봤자 스킬빨!’
남구의 신중한 전투 스타일이 기존과 궤를 달리했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며 희번덕거렸다.
기다란 지팡이를 짚은 마법사로 보이는 수하는 한발 물러나 위치를 점했다.
마법사의 앞을 검을 든 수하 둘이 엄호하며 협공을 하려는지 서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나란히 붙어 있었다.
발걸음을 이어나는 남구의 눈동자가 우측으로 돌았다.
우측에 있는 마왕의 수하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눈동자가 곧바로 좌로 돌았다.
좌측에 있는 수하는 고트족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촉수가 돋아난 사신과 같은 종족으로 근육질의 대단히 거대한 체구였다.
순식간에 눈동자를 휘돌린 남구가 손을 어깨 뒤로 넘겨 참룡도의 칼자루를 쥐었다.
‘한 방만 맞아 준다면 시간을 꽤 단축할 수 있을 거야.’
등에서 뽑혀 나오는 거대한 도신에 맺힌 푸르스름한 광채가 어두침침한 대전을 환히 밝혔다.
스르르르릉-
발도술처럼 뽑아내는 동시에 한기파동을 뿌렸다.
쌔애애액- 꽈과과과과광-
마왕의 수하들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한기파동을 각자 좌우로 튀어 나가며 피했다.
허무하게도 넓은 빙판 지대만 생성됐다.
‘호락호락하지 않구만.’
한기파동을 사용한 참룡도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뛰쳐나간 날개 달린 수하에게 원반 던지듯 손을 뿌렸다.
휭휭휭휭휘이잉-
목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든 참룡도를 날개 달린 수하가 비스듬히 올려 쳤다.
카앙-
그대로 솟구쳐 오른 참룡도가 높은 천장에 틀어박혀 부르르 떨었다.
참룡도를 쳐낸 날개 달린 수하도 연신 뒷걸음질 치며 진동하는 칼자루를 더욱 움켜쥐었다.
왼쪽에서 촉수 다발이 들이쳤다.
퍼버버버벅-
남구는 전부 몸으로 받아냈다.
심장 부근에 무더기로 꽂힌 촉수 다발을 한 손에 움켜쥐고 채찍을 휘두르듯 반대편으로 휘둘렀다.
꽈앙-
아무리 날랜 몸이라지만 몸의 일부인 촉수를 붙잡히고 반대편으로 던져지는 몸뚱이를 제어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힌 촉수의 수하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서려 했다.
또다시 꽉 틀어쥔 촉수 다발을 반대편으로 휘둘렀다.
쿵-
촉수가 붙들려 던져지는데도 두 번째부터는 낙법이라도 치는 듯 바닥에 착 내려앉았다.
남구의 얼굴을 향해 마법사가 발사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그대로 이마로 받아버렸다.
파앙-
불꽃이 번쩍했다.
얼굴에 휘감겼던 연기가 거치자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남구의 사나운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커다란 폭발이 일었지만 남구는 멀쩡히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지팡이를 짚은 수하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마왕을 힐끔거렸다.
마왕이 붉은 눈동자를 연신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깨어지는 법.”
저들은 남구가 착용한 황금색 흉갑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줄기차게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불덩이가 날아왔다.
자기 촉수를 스스로 전부 잘라버린 마왕의 수하가 핏줄기를 허공에 길게 늘이며 남구의 곁을 스쳐 지났다.
공중에 날아오른 날개 달린 수하가 검기를 뿌려댔다.
남구는 협공해 오는 모든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몸을 젖혀 피해내고 중력제어로 궤적을 비틀었다.
남구의 손바닥에서 뻗어나가는 백색 광선이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고 오러에 둘러싸인 검신에 가로막혔다.
환영 마법이 거미줄처럼 펼쳐진 대전에 남아 있던 수족들은 그만한 역량을 갖춘 마왕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공수 병행을 포기한 남구가 모든 데미지를 몸으로 받아내며 오직 공격에 집중했다.
빛살처럼 쏟아내는 남구의 반격에 맞추어 수하들의 움직임도 순식간에 변화했다.
공격에만 전념하는 남구에게 마족의 수하들도 공수를 병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바닥에서 쏘아지는 핵산의 기운은 너무나 빠르고 끊임이 없었다.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오로지 회피에만 전념했다.
중력제어로 움직임을 구속하면 기다란 지팡이를 휘두르는 마법사가 순식간에 해제했다.
마법사에게 중력 제어를 펼쳐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법 해제의 달인이었다.
레이저 광선처럼 쏘아지는 핵산의 기운까지 이따금 무위로 돌려 버렸다.
마왕의 수하들은 남구의 눈동자가 마왕에게 향할 때만 목숨 걸고 공격을 감행했다.
마왕의 환영 마법이 남구의 정신을 파훼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마왕은 정신방벽을 뚫기 위해 연신 눈동자로 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마왕의 수하 셋은 남구가 빛살처럼 쏘아대는 핵산의 기운에 온몸이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대전을 최대한 활용하며 작정하고 회피에만 전념하는 그들에게 치명타를 넣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격대 대원들은 대전 안에서 남구와 마왕의 수하 셋이 물 찬 제비처럼 끝도 없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입구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스킬 정신방벽의 카운터가 점점 줄어들었다.
‘1분.’
더는 공방을 이어갈 시간이 없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세 명의 수하를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명색이 마왕의 정예였다.
끈질기게 저항하여 그리 간단하게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다.
여건이 따라 주지 않았다.
남구가 마왕의 수하들보다 강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하는 수 없군.’
남구가 주특기를 꺼내 들었다.
신속하게 움직이던 남구의 한쪽 발이 대전 바닥에 깊숙이 꽂혀 들었다.
꽈앙-
강력한 발 구름에 잔잔한 수면 위로 돌멩이가 떨어진 듯 엄청난 파문이 퍼져나가며 돌바닥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남구에게서 삽시간에 멀어지던 수하들의 움직임도 순간 우뚝 멈추었다.
산산조각이 난 대전 바닥에 중력제어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광범위하게 깔린 중력제어에 발이 묶인 수하들은 옴짝달싹 못 하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구의 반득반득 광채를 발하는 까만 눈동자가 마법사를 뚫어버릴 듯이 쏘아보았다.
게다가 손까지 뻗고 있었다.
마법사를 발바닥과 손바닥과 동공으로 치덕치덕 옭아맸다.
중력제어가 하나의 대상에 3중으로 퍼부어졌다.
마법사가 중력제어를 해제해도 연달아 중력이 작용했다.
마법사의 주특기가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강력한 한 방과 함께 최고 출력을 광범위하게 지속하느라 중력 게이지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촉수를 스스로 모두 잘라냈던 수하는 체격만큼이나 근력이 대단했다.
검 끝을 남구의 목에 겨눈 채 한 발 한 발 느릿느릿 꾸준하게 접근해 왔다.
‘썩을 놈!’
중력제어가 역으로 작용했다.
다리를 부들거리며 버티던 수하들이 공중으로 곧장 떠올랐다.
남구가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일소!’
우우우우우웅-
활짝 펼쳐진 손바닥으로 배배 꼬여 꽈리를 튼 세 줄기의 백색 빛줄기가 쭉쭉 빨려들었다.
-크아아악! 히이이익! 끄으으윽!
셋은 공중에 떠올라 지탱할 곳 잃은 발을 바동거리며 속절없이 생명력을 잃어갔다.
5초 만에 모든 생명력을 남구에게 갈취당했다.
일소와 중력제어가 동시에 해제됐다.
미라처럼 바싹 마른 셋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퍼석- 퍼서석-
단 한 방울의 수분도 없는 몸뚱어리는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산산이 부스러져 먼지만 풀풀 날렸다.
마왕의 최정예 셋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마왕의 칼날 같은 이빨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게 무슨!”
마왕 마라야스의 휘둥그레 부릅뜬 눈꺼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놀라는 마왕을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남구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너한테 쓰려고 했는데 아쉽군.’
타격받은 부위가 핵산의 기운으로 서서히 회복해 가고 있었지만 더는 치유 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남구의 육체는 포탈을 타고 넘어오기 전으로 완전히 리셋돼 있었다.
갈취한 생명력이 온몸에 가득 들어차 기운이 쭉쭉 뻗었다.
‘10초.’
남구가 솟구쳐오른 권좌를 향해 넘치는 힘으로 바닥을 박찼다.
쿵-
마왕의 코앞에 들이쳐 세이버를 뽑아냈다.
발도한 도신에서 핵산의 기운이 초승달 형태의 오러로 뻗어나갔다.
쌔애애애액-
대각선으로 마왕의 잔상을 베고 권좌마저 베어버렸다.
쫙-
두 쪽 난 권좌의 윗부분이 스르륵 미끄러져 나갔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왕의 검이 검은 오러를 흩뿌리며 남구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품 안으로 파고든 남구가 세이버의 스킬을 발동했다.
푸른 뇌전이 튀기는 세이버의 검신이 그대로 옆구리를 베어냈다.
촤아아악-
겨드랑이 밑을 스쳐 지나 뒤로 돌아든 남구가 몸이 굳어버린 마왕의 무방비한 뒷덜미를 전광석화같이 쳐냈다.
촤아아악-
토막 난 허리와 머리가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삼등분된 마왕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드디어! 응?’
목덜미가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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