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누구냐, 넌 (1)
예솔이 번개처럼 남구를 돌아봤다.
“저기 남구 온다.”
은성의 표정에도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남구가 무너지지 않아 다행이야.”
무너지기는커녕 살짝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남구가 굳게 닫혀 있는 철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짓했다.
은성이 힘겹게 일어났다.
“끄으응, 가보자!”
예솔이 힘겨워하는 은성을 부축했다.
철문을 향해 나란히 걸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 너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은성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힘이 너무 없기는 하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눕고만 싶어.”
“조금만 참아봐. 빨리 나가서 병원······. 아니! 어쩌면 진짜 몸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나도 이제는 실감이 가. 새로운 육체라······.”
예솔은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 더 의연해졌다.
“이제 남의 몸 따위 얻고 싶지 않아. 난 그냥 내 몸으로 살 거야.”
은성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할까? 우리에게 거부권이 있을까?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제는 정말 한 치 앞도 모르겠어.”
“대체 몸을 어떻게 바꾼다는 거지?”
중얼거리는 예솔의 혼잣말에 은성이 대꾸했다.
“수술 같은 거 하려나?”
“헉! 수, 수술?”
휘둥그레진 예솔의 눈처럼 철문이 활짝 열렸다.
딸깍- 끼이익-
남구가 너무도 간단하게 철문을 개방했다.
오십 명이 넘는 사람이 그렇게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던 철문이 마찰음을 발하며 자연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이리 와!”
남구의 부름에 예솔과 은성이 절뚝절뚝, 느릿느릿 따라갔다.
50구의 시체가 가득 쌓인 지하실을 나서자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지하실이 또 있었다.
“들어가 보자!”
남구가 새로운 지하실의 철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끼릭- 끼이익-
어렵지 않게 열렸다.
문틈이 벌어짐에 따라 남구의 한쪽 입꼬리도 서서히 비틀려 올라갔다.
“후후, 여기 있었군.”
활짝 열린 새로운 지하 공간의 내부를 바라보는 은성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함했다.
“헉! 이, 이럴 수가!”
은성을 부축하고 있는 예솔의 반응도 똑같았다.
“어머! 말, 말도 안 돼!”
은성과 예솔은 감탄성을 지른 뒤 언어 장애가 온 듯 말을 잃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일행의 눈에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은성과 예솔의 눈빛에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떠올랐다.
새롭게 들어온 지하공간에는 또 다른 형태의 진이 영롱한 푸른 빛을 은은하게 발하며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소환진 보다는 그 크기가 아주 작았다.
“이런 거였나? 개인용이군.”
남구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빈 공간에 윙윙 울렸다.
원형으로 딱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그런 것이 여섯 개가 존재했다.
세 개의 진 안에는 각각 한 사람씩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사람이 들어있는 진에서는 지속적인 발광이 이루어졌고 빈 곳에서는 깜빡이며 점멸했다.
사람을 품고 지속적인 빛을 발하는 진과 텅 비어 점멸하는 진이 핏줄같이, 전선같이 둘씩 빛줄기로 짝지어 연결돼 있었다.
‘저 깜빡이며 비어있는 세 개의 진 중 하나에 들어가면 되는 건가? 딱 봐도 알겠네! 원하는 육체에 연결된 진으로 들어가서 누우면 되는 거로군. 저기 누우면 영혼과 의식이 새로운 육체로 전이되겠지?’
남구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광경에서 눈을 돌려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이제 이 몸과는 영원히 안녕이구나!’
일말의 미련 없이 진 안에 누워있는 육체로 눈길을 돌렸다.
바라보는 남구의 눈동자에 희열이 차올랐다.
‘셋 중 하나는 내 것이란 말이지?’
모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남구는 영혼과 의식이 소멸한 빈 껍데기뿐인 육체를 보며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포로가 된 동료 중에서 최고 형을 받아 저렇게 껍데기만 남은 친구가 있었다.
영혼을 멸하는 형벌은 최고 형이었다.
제공된 육체의 원래 주인도 대항하고 저항했던 자들이리라.
순간 남구의 눈빛이 빛났다.
‘저것이다!’
원형의 진 중 하나에 은성이 누워있었다.
아니,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가 누워있었다.
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였다.
사용하라고 주는 육체인데 몇 년 못 쓸 늙은 육체를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위험에 취약한 아기의 몸도 아니었다.
‘또래라고 볼 수 있겠군.’
2m에 달하는 키에 온몸이 우람한 근육질이었다.
그냥 예쁜 근육이 아니라 두껍고 육중했다.
손아귀에 손목이 잡힌다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이 생겼다.
샛노란 머리카락에 남자답게 굵은 선의 얼굴형.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했다.
마치 북유럽의 거인과도 같은 모습.
은성이 사용한 저 육신은 최강의 전사였다.
아무도 견줄 수 없었다.
‘저 모습으로 은성이 교실 창을 넘어 들어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하?”
탐내던 은성의 육체를 보고 잠시 시야가 좁아졌다.
다시 보니 세 명이 아니었다.
‘두 사람과 한 마리?’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와 처음 보는 또 다른 육체, 그리고 회색 털이 무성한 늑대 인간이 누워있었다.
저 늑대에서 진화한 듯한 인간은 세리야 대륙에 라이칸이란 종족이었다.
라이칸 족과도 부딪쳐 본 적이 있었다.
순수 인간의 육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고 강한 신체 구조를 가졌다.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가 아니라면 라이칸의 육체도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육탄전에서 가히 탑 급에 속하는 신체였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 대한민국, 서울!’
만약 저 육체로 밖을 돌아다닌다면 아무리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은성이나 예솔 중 한 명은 늑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 이것 참 재미있군. 뭐, 내 알 바 아니지!’
늑대가 되든 여우가 되든 돼지가 되든 뭐가 되든 자기 일이 아니었다.
남구의 관심은 오로지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에 있었다.
하지만 놓여있는 육체의 면면을 보니 연령까지 맞추어 상당히 강한 육체만을 제공했다.
‘제공자의 배려가 돋보이는군.’
나머지 다른 육체도 어떤 육체인지 보기나 하자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겼다.
바로 라이칸의 육체에서 관심을 끊어버리고 시선을 다른 육체로 돌렸다.
‘역시, 마찬가지로 십 대 중반에서 후반의 나이군. 키는 180cm 정도 되겠네. 음? 여자?’
옻칠한 듯 칠흑 같은 까만 머리카락이 굴곡진 어깨선 바로 위까지 흐드러지게 흩어져 있었다.
‘와! 예쁘게 생겼네? 남자가 아닌가?’
벌거벗은 육체는 분명히 있을 곳에 있을 것이 있었다.
저것을 보지 못했다면 여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세 구의 육체는 모두 수컷이었다.
예솔이 얼굴을 붉히는 까닭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진짜 더럽게 잘 생겼군.’
남구는 자기 외에 잘생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계집아이처럼 생긴 몸뚱이를 자세히 내려다봤다.
모난 곳 없이 유려하게 휘어지는 곡선의 미가 턱선을 따라 갸름한 얼굴형을 완성 시켰다.
그 안에 담긴 눈, 코, 입을 여자처럼 곱게 보이게 했다.
긴 속눈썹이 자라난 눈을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영락없는 여자라 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껏 가공된 대리석 같은 윤기가 흘렀다.
평생 햇빛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듯한 뽀얀 피부가 밤하늘같이 짙은 머리카락 색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예솔의 피부처럼 혼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얀 피부색은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흑백의 조화가 마치 예솔이 같이 예술이군!’
근육의 매스가 부위마다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우람하지는 않았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날렵한 몸태에 잔근육이 가닥가닥 갈라진 체지방이 거의 없는 근육질의 몸이기는 하지만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의 두꺼운 근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근데 인종이 뭐지? 혼혈인가?’
인종이 딱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동유럽 및 북아시아의 슬라브족과 동북아시아인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혼혈처럼 보였다.
‘아니? 이, 이건?’
남구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딱 한 번 마주했던 자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엄청난 무위와 권능을 발휘하던 자였다.
또한 대단한 규모의 일족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던 자였다.
생명의 핵을 이용해 막대한 생명 에너지를 운용하고 통제하는 자들.
핵의 전능한 힘 뒤에서 권력을 누리며 유희를 즐기는 족속.
그들은 인류와 사고 체계 자체가 달랐다.
선민사상이 기본이고 상식인 족속이었다.
오로지 힘만을 추앙하며 그 힘을 위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멸망의 원흉.
‘그런 족속이 왜 여기에 이 모양 이 꼴로?’
그들 최고위층은 육체를 갈아입고 영생하기에 영혼이 소멸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더불어 자신의 영혼을 담고 있던 육신을 타인이 사용하는 것을 무엇보다 치욕스러워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참수형을 치욕이라 생각했듯이, 이 족속은 영혼 소멸과 육체 이양의 형벌을 더없는 수치라 여겼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최고형이 바로 이와 같은 형벌이었다.
생각해 볼 여지는 딱 두 가지였다.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숙청된 권력자의 자제셨나 보군요. 어지간히 원한을 사셨나 보네요. 최고형을 받았군요. 아니면 그들의 족속이 아니든지.’
그들은 내분으로 자기들끼리 갈라져 싸우는 일이 다반사인 역사를 이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앙숙이라 해도 외부 세력과 협력하여 내부의 다른 파벌을 치지 않았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거만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자기들끼리 싸우더라도 이렇게 영혼을 소멸시키고 그 육체를 지구의 인류에게 양도하는 치욕을 안기는 일을 남구의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 보는군. 과연 그들의 족속이 확실할까? 음, 확신할 수는 없는데······.’
세리야 대륙인들은 이들을 마족이라 불렀다.
마치 다민족이 모여 사는 것처럼 그들의 생김새는 워낙 다양했다.
가문마다 선호하는 육체가 다 달랐다.
각자 고유하게 계승되는 권능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육신을 원했다.
마족이라 불리는 한 가문의 수장과 일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수장과의 일전에서 당했던 패배가 결국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 육체는 그때 본 수장과 너무도 닮았다.
‘으흠, 마치 그 수장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아니면 형제든가. 이것 참, 머리가 복잡해지네.’
일명 마족이라 일컬어지는 그 족속이 확실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은성이 사용하던 육체는 포기하고 이 육체를 선택해야 한다.
은성이 사용하던 육체가 아무리 인류 최강자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계집애 같이 생긴 육체의 주인은 다른 차원이었다.
그들은 가문마다 전승되는 그들만의 권능이 있었다.
마치 악어는 치악력이 센 것 같이, 코끼리는 코가 긴 것 같이, 상어는 이빨이 무한한 것 같이, 카멜레온은 보호색을 띠는 것 같이 고유의 능력을 계승 받았다.
남구가 겪어봤던 그 수장은 중력을 사용했었다.
생명의 핵에서부터 파생된 시스템은 생명 에너지만 투자하면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기에 LP를 투자해 중력의 권능을 획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디서 얻고 싶어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구하고 싶어도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었다.
만약 어디서 보게 되더라도 얻기 위해 사용되는 LP의 소모가 경악스러웠다.
‘평생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하지.’
세상을 움직이는 힘 중의 하나인 중력은 어디에나 있는 흔하게 작용하는 힘이지만 막대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엄청난 권능이었다.
이 육체가 그런 방대한 잠재력의 힘을 계승한 그 수장이라면 또는 그 가문의 직계라면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어도 상관없었다.
‘중력이란 권능의 성취를 내가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육체를 선택해야만 해!’
전장에서 활약하던 그 수장의 위용을 봤을 때 분명 중력의 권능은 엄청난 등급일 것이다.
그런 위용의 스킬은 구경조차 해본 적 없었다.
‘모험을 한번 걸어봐? 그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면 진짜 잣 되는데?’
고민을 거듭하던 중 먼저 마음을 정한 은성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이 육체로 할게.”
‘역시 그놈을 고르는군.’
은성은 북유럽인과 모습이 흡사한 원래 선택했던 거구의 육체를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택했다.
예솔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없잖아! 난 어떻게 하지?”
‘늑대로 한번 살아보지 않으련?’
남구도 마음을 정했다.
원래의 계획에서 선회했다.
도박 같은 일이었지만 터지면 대박이었다.
‘젠장! 아니어도 현재의 몸보다는 낫겠지.’
남구는 확실한 카드인 은성이 사용했던 육체를 포기하고 자신의 눈썰미라는 불확실한 카드에 올인했다.
‘그 수장의 가족이 분명할 거야. 직계가 맞을 거야. 또는 본인일 거야. 너무 닮았어!’
예솔이 오히려 잘 됐다는 투로 말했다.
“난 나로 살 거야! 여기 끌려왔을 때부터 그렇게 마음먹었어.”
‘그래, 은성이 꽁무니만 잘 따라다닌다면 죽지 않을지도 몰라. 운이 좀 따라 줘야 하겠지만.’
은성이 남구와 예솔을 번갈아 보며 확신 없이 중얼거렸다.
“저기 빈 곳에 누우면 되는 건가?”
알 리가 없는 예솔이 긴장된 표정으로 도리도리 고갯짓을 했다.
남구가 덤덤하게 말했다.
“해 보지 뭐!”
비록 시체처럼 누워있지만, 예술품과도 같은 자태를 지닌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육체의 곁으로 남구가 뚜벅뚜벅 걸었다.
비어있는 진 안에 망설임 없이 다가간 남구가 자리를 잡고 드러눕자 점멸의 간격이 차츰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은은하게 지속적인 광원을 발했다.
그 빛은 갑자기 강렬해졌다.
화악-
“허억!”
“꺄악!”
푸른 광원은 그 빛깔이 흰색에 가깝도록 강렬해지며 남구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크윽! 이것이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인가? 유체이탈이 이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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