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생존의 열쇠
“어린놈이 어른을 그렇게 대놓고 비웃으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거야! 알아?”
‘대가리를 빠개 버릴까?’
괜한 트집을 보다 못한 김수정 대리가 남구를 두둔하고 나섰다.
“과장님, 또 무슨 심사가 뒤틀려서 그러세요? 우리 모두 남구 덕분에 산 거예요. 남구가 우리 때문에 감수한 위험은 생각도 안 하시는 건가요?”
‘여기 오는 거, 별거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진짜 잣 될 뻔했단다.’
평소 변 과장은 김수정 대리에게 채신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김수정 대리는 변 과장이 연장자이자 상사임에도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피력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변 과장은 김수정 대리의 역성에 기분이 상했는지 더욱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며 뚜렷한 자신의 주관을 내세웠다.
“흥! 밥은 우리만 먹었나? 우리가 없었으면 쟤도 못 먹었어! 그리고 옥상에서 그냥 기다렸어도 군인들에게 구출됐을 거야. 뭐 하러 위험을 사서 감수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둘의 언쟁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박 부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상냥하고 부드럽던 박 부장에게서는 처음 듣는 강단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들 해! 이제 우리밖에 안 남았어. 서로 생각이 다 다를 수 있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야. 세상이 망해 버렸다고.”
박 부장은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폭발했는지 고함을 내질렀다.
“지옥으로 변해버렸다고!”
박 부장은 곧바로 흥분했던 숨을 고르며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후, 군인들이 구조하러 오기 전까지 의지할 데라고는 미우나 고우나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네. 우리끼리라도 합심해서 똘똘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어. 원팀, 알지?”
“네, 부장님!”
“크흠, 그걸 누가 모르나요.”
안하무인인 변 과장도 박 부장의 위엄있는 채찍과 진솔한 당근에 풀이 죽었다.
직원들이 모두 침묵하며 엄숙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이곳에서 남구만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박 부장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박 부장은 사람만 좋은 게 아니네? 꽤 괜찮은 리더 감이군.’
남구는 박 부장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군인들은 도적 떼가 되면 됐지 결코 구조하러 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곧 좀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놈들이 출몰할 시기였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져 정적에 휩싸였다.
다시 한번 현실을 직시한 직원들의 표정이 경직됐다.
아작아작-
그들의 분위기에 전혀 개의치 않는 남구의 과자 씹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무던히 입을 오물거리며 덤덤한 목소리로 박 부장에게 한 가지 정보를 풀어냈다.
“1층 복도에 마트 사람들이 쓰던 장비가 그대로 있어요.”
할머니를 구하지 못한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는 본능에서였을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던 박 부장과 김수정 대리에게 그저 끌려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외로워서였을까?
혼자가 좋다는 생각은 비겁하고 궁색한 변명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기 최면에 빠져 스스로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일까?
남들이 죽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남구가 생존에 결정적인 열쇠를 넌지시 던져 주었다.
남구의 한마디에 순간 눈이 휘둥그레져 모두 남구를 쳐다봤다.
집중되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아랑곳없이 남구는 계속 과자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아작-
“쩝, 좀비 정도는 시위 진압용 보호구만 입어줘도 상당히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거예요. 진압 방패랑 쓸만한 도검류도 꽤 떨어져 있고 총도 여러 정 되고.”
막막했던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표정의 박 부장은 목소리까지 떨렸다.
“아, 아니! 그게 정말 사실인가?”
남구가 고개를 까딱였다.
“어차피 다 버려진 것들이니까 줍는 사람이 임자죠. 가져다 쓰면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배불뚝이 변 과장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근데 거기까지 어떻게 내려가? 중간에 좀비라도 만나게 된다면······.”
남구는 변 과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과자 봉지를 들어 올려 가루까지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쩝쩝, 계단은 다 정리해 놨어요. 그냥 저 나갈 때 같이 나가면 돼요.”
남구의 위용을 직접 본 사람들은 처음 옥상에서 마주했을 때보다는 한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갈색 머리 김수정 대리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가슴께에 맞잡고 감격해했다.
“진짜? 정말 그래 줄래?”
남구는 눈앞에 한껏 모여든 그득한 가슴에서 애써 머그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적지근한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는 마치 포도주처럼 입안에서 굴려 가며 음미하듯 넘겼다.
호로록- 꿀꺽!
“캬아! 나도 덕분에 식사 잘했으니 뭐, 밥값? 커피값이라고 해두죠.”
김수정 대리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남구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 진짜 고마워 남구야!”
‘그건 좀······.’
남구가 식사를 다 마친 것을 본 박 부장이 지금껏 참아 왔던 질문을 던졌다.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남구의 학교 상황을 시시콜콜 물어 왔다.
비록 아들은 다른 학교에 다녔으나 대략적으로나마 정황이라도 알고 싶어 했다.
“우리 아들도 고 2거든. 자네와 동갑이야.”
“다른 학교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그래도 살아남은 얘들이 꽤 돼요.”
말 한마디에 박 부장의 표정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밝아졌다.
“아, 그렇구나! 그나마 다행이구나!”
박 부장의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생존자는 매우 극소수뿐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극소수의 생존자도 은성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제로에 수렴하리라는 사족도 굳이 붙이지 않았다.
아련한 눈빛의 박 부장은 마치 아들을 마주한 듯 그윽하게 남구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붙여 왔다.
남구는 박 부장의 눈빛을 받고 있으니 추운 날씨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기분이 들었다.
술 한잔 걸치면서 박 부장과 미주알고주알 잡담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호사를 꿈꾸며 남몰래 미소 짓던 적도 있었다.
‘음, 해도 금방 떨어질 테고 언제까지나 마트가 비어있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식사 직후라지만 마냥 수다만 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슬슬 움직일 때라 느낀 남구가 한 가지 생각해 두었던 바를 말했다.
“기왕 내려갈 거면 저 앞 마트에 한 번 들려보도록 하죠. 무주공산으로 비어 있을지도 몰라요. 물자도 많고 방어 시설도 잘돼 있으니까 베이스캠프로 써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대수롭지 않게 성의 없이 툭툭 던지는 남구의 제안이 직원들에게는 삶의 동아줄과도 같았다.
“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군인들이 오기 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직원들도 희망에 찬 눈빛으로 침을 꼴깍꼴깍 넘겼다.
희열마저 느껴질 정도로 감탄성을 자아내는 박 부장에게 남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세요? 할인 마트에 몇 명이나 상주하고 있었는지?”
“음, 스무 명 정도였지?”
박 부장이 매일 밖을 자세히 살피던 이성우 대리를 돌아봤다.
시선을 받은 이성우 대리가 냉큼 말을 덧붙였다.
“열다섯 명이 주로 좀비를 잡으면서 돌아다녔어. 모두 남자였고 간혹 사람들에게도 활과 석궁을 쏴댔지. 아마 마트 안에 여자들이 대여섯 명 정도 있을 거야.”
남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의 여자들만 남아 있겠군요.”
배불뚝이 변 과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허어! 정말 남자들은 싹 다 죽은 거야? 좀비도 막 사냥하면서 꽤나 설치고 다니던 놈들인데? 그 짐승 같은 놈들이 사람도 막 쏴 죽였었어.”
“다 죽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죠. 아무튼 시체는 열다섯 구예요.”
남구의 말을 들은 변 과장의 얼굴에 한껏 조소가 떠올랐다.
“쯧쯧, 거들먹거리면서 다닐 때부터 내 알아봤지. 아주 좀비들에게 전멸을 했구먼.”
배불뚝이 변 과장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지만 고소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남구는 굳이 자신이 죽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남구가 박 부장을 지그시 쳐다보며 그동안의 가벼운 말투와는 다르게 진중히 물었다.
“마트에서 버티려면 무력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죠?”
마주한 눈빛을 빛내며 각오가 됐느냐는 듯 묻는 남구의 질문에 박 부장은 순간 침음을 흘리며 긴장했다.
“으흠······.”
‘판단도 빠르고 리더십이 있어 보여서 알려준 건데 괜히 말을 꺼냈나? 이거 영 불안한데? 괜한 말을 꺼내서 이 사람들 다 죽어버리는 거 아냐?’
그늘이 짙게 드리운 박 부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남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흠! 하긴, 바로 얼마 전까지 평화에 푹 젖어 있던 일반인이었으니 망설임이 없을 수가 없겠지! 내가 좀 빡빡했군.’
각오 없이 마트에 무작정 진입했다가는 오히려 명을 재촉할 수 있었다.
망설임을 보이는 박 부장 때문에 남구의 말이 길어졌다.
“좀비뿐만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습격할지 몰라요. 싸울 의지가 없다면 아예 여기서 버티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방금 거의 다 먹어 치워서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순박하게 생긴 오정아 대리가 한꺼번에 식량을 너무 많이 먹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 섞인 표정으로 쓰레기 더미로 바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남구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남구 학생 통찰력이 보통 아니네? 정말 똑똑하다.”
‘아가야, 질릴 정도로 겪다 보면 그 정도는 그냥 알게 되는 거란다.’
이성우 대리가 동의한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러니 지금까지 혼자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았지.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돼!”
‘어리다라······. 내 나이가 대체 몇이지? 나도 내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군. 벌써 마흔을 넘겼을까? 아마도 서른 후반쯤이지 않으려나?’
그곳에서 언제나 투지와 희망을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절망하고 좌절했을 때 날짜를 세는 것도 그만두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 그곳에 얼마나 붙잡혀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남구와 마찬가지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 부장의 눈빛이 굳세졌다.
“나 혼자만 각오한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군.”
박 부장이 굳세어진 눈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에게 피를 묻힐 각오가 됐느냐고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박 부장의 눈빛을 받은 직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성우 대리는 눈을 부릅뜨며 두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다들 생존 의지를 다시금 다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의견을 모은 박 부장이 시선을 남구에게 돌렸다.
결연한 눈빛을 받은 남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건물에 병원이 많으니까 의약품을 좀 챙겨서 나가면 되겠네요. 쓸모가 아주 많을 거예요.”
남구가 일어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순간 긴장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바야흐로 행동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햇병아리 초보자들에게 의지는 그저 의지일 뿐.
실전은 완벽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래도 남구의 활 솜씨를 보고 난 뒤라 몇몇은 믿음을 담은 눈빛으로 따라 움직였다.
남구가 벨트를 착용하며 너무도 익숙하게 당연한 듯 지시했다.
“가방에 필요한 것들 챙겨 넣으세요. 의약품 담을 만한 것도 준비하고요.”
남구의 말에 박 부장이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네.”
“벌써 나가려고?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좀 쉬었다 나가면 안 될까?”
신입사원 최영민의 응석에 좀비의 대가리에 틀어박힌 화살들을 회수하러 나서던 남구가 되돌아봤다.
“마트가 비어버린 지 꽤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기왕 그곳에 자리 잡을 거면 빨리 선점하는 게 좋을 듯한데?”
“그, 그건 그렇구나!”
바짝 긴장하여 목소리가 떨려나온 최영민의 옆구리를 노병철이 괜한 말을 한다는 듯 팔꿈치로 꾹 찔렀다.
박 부장이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짝짝-
“자, 그러면 어서 움직이자고.”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네, 부장님!”
“남구야! 정말 고마워.”
“그래도 남구 덕분에 살길이 보이는구나!”
“맞아 정말 암담했는데.”
“넌 정말 복덩이야!”
‘이러다 단체로 찬송가라도 부를 기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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