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안전지대 (2)
‘스페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 터키, 브라질이라······. 나 참! 국제적으로 여복이 터졌구만.’
각자의 국적과 이름과 살아온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남구를 힐끔거렸다.
‘고기가 익을 동안 너희는 개념 좀 익히자!’
솥 안을 뒤적거리며 듣기만 하던 남구가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남구의 조용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제각각 다른 주제로 산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남구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순간 진공 상태에 빠진 듯 석실 안은 숨소리조차 일지 않는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들은 이곳 안전지대에 들어선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입을 닫고 있기에는 적막과 함께 시시각각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를 도무지 견뎌내기 어려웠다.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별 영양가 없는 수다라도 떨어 가며 적막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그녀들의 묵시적 합의가 단번에 깨어졌다.
자기들끼리 맞장구를 쳐가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와중에도 다들 남구를 힐끔거리며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려 왔었다.
무엇보다 여자들의 관심은 묵묵하게 자기들을 지켜준 남구에게 있었다.
여자들도 생명 포인트를 이용해 신체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던 바였고 그로 인해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자들도 어렵지 않게 보아 왔었다.
예솔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곳에 소환된 여자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우월한 미모를 무기로 바로 그런 자들의 소유물이 되어 참혹한 세상으로부터 모진 목숨을 여태 연명해 온 처지였다.
강자 중의 강자이자 한 지역의 지배자들을 언제나 바로 곁에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보필해 온 여자들은 비교 할 수 없는 격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남구에게 그 지배자들은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남구는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신비롭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또한 자의는 아니었으나 시스템이 점지해준 남편이었다.
남구가 다른 남자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얼마든지 짝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에 그것을 원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구가 살갑지는 않았으나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강자 특유의 감당하기 힘든 고약함이 남구에게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 관심을 보이지 않아 서운할 지경이었다.
남구가 모두의 시선을 한데 모아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위는 숨죽인 호흡 소리만 계속됐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남구의 이야기는 기대 이상으로 상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선명한 입술이 들썩거릴 때마다 믿기지 않는 다른 세상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여자들은 당면한 현실에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닥친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살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자기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리 있는 남구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개념과 방향이 잡혀 나갔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남구를 여자들은 절대자를 마주한 듯한 경건한 눈빛으로 마냥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것 참, 가장이라도 된 것 같구만. 여자가 일곱이라니! 내 팔자에 이런 일이 다 생기다니!’
남구는 다 익은 게살과 보쌈 고기와 간, 허파, 심장을 꺼내 놓고 허리에 찬 투척용 뼈 칼을 한 자루 꺼내 예솔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처량하게 홀로 한쪽 귀퉁이에 기대앉아 달뜬 호흡을 쌕쌕거리는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먼저 먹고 있어. 다 죽어가는 얘도 좀 챙겨 주고.”
예솔은 장바구니에 있던 파뿌리까지 몽땅 씹어먹던 남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먹을 것에 환장하던 남구의 의외의 태도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배고플 텐데 안 먹고 어디가?”
“쓸만한 게 있나 새로 얻은 배낭 좀 뒤져 봐야지! 쓸데없는 건 버리고.”
“네 것 따로 빼놓을게. 안 그러면 저것들이 다 처먹을 기세야.”
‘말투가 상당히 거칠어졌군.’
예솔의 거친 언사에 슬쩍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아주 침샘이 폭발했구만.’
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줄기차게 들락날락했다.
“쓰읍!”
“꿀꺽!”
“마, 맛있겠다.”
“지금 같아선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나도 나도.”
“저 고기 너무 먹음직스러워!”
“저 탱글탱글한 게살 좀 봐!”
“심장이랑 허파는 무슨 맛일까?”
“쫄깃쫄깃할 것 같아.”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들을 예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채소 따서 물에 씻어 와.”
“아, 알았어.”
“우, 우리 일어나자!”
“빠, 빨리 가자!”
예솔의 기세에 눌린 여자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텃밭으로 향했다.
얼굴을 맞대고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생긴 건 귀여운데 너무 무섭다.”
“남자를 혼자 독차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서열을 확실히 하려는 거 같지 않아?”
“개기지 말라는 거지!”
“둘 사이가 되게 친한 거 같아. 좋겠다. 저 여자만큼은 확실히 지켜줄 거 아니야.”
“아무래도 유일하게 선택해준 여자니까 더 애착이 가기도 하겠지. 아, 나도 선택을 잘해야 했는데.”
“키스 제일 진하게 해놓고 인제 와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흠!”
“우리한테 별로 관심 없는 거 같아.”
“그래도 잘 지켜주잖아. 난 그거면 됐어.”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기회 있을 때 진하게 키스해 보던가.”
“흠! 으흠!”
투척용 뼈 단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반듯하게 썰던 예솔이 피식거리며 입꼬리를 들쳐 올렸다.
자기들끼리는 속삭인다고 속삭인 것이었지만 40 스텟에 이른 예솔의 감각에는 한 자 한 자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남구는 그런 예솔을 힐끗 쳐다보며 마찬가지로 씩 입꼬리를 비틀었다.
단지 대각선으로 삐뚜름히 비틀린 입꼬리가 야비하게 보인다는 점이 귀엽게 보조개진 예솔의 미소와 다를 뿐이었다.
‘찾았다. 역시 있었군.’
남구가 라벨이 붙은 원통형 알약 통과 알코올을 배낭에서 꺼냈다.
눈물은 그쳤지만,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는 눈빛으로 힘없이 기대앉은 여자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남구가 다가오자 애타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간절함이 함북 담겨 있었다.
이런 고립된 환경에서 상처 입은 몸으로 믿고 의지할 데라고는 남구밖에 없었다.
“죽지 않을 거야. 약 찾았어.”
남구를 통증에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저, 정말요?”
인상을 온통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태까지의 목소리 중 가장 밝았다.
“그래.”
화살에 꿰뚫린 상처 부위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남구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펄펄 끓는구나! 역시, 감염됐군.’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이고 알코올을 상처 부위에 들이부었다.
앙다문 이 사이로 떨려 나오는 목소리가 애절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저 버리지 않을 거죠?”
“미쳤어? 네가 얼마짜린데 버려?”
“고, 고마워요. 정말!”
안심한 듯 잠시 편안해졌던 얼굴에 급격히 당혹스러운 표정이 밀려들었다.
남구가 옷을 전부 벗겨나갔다.
겁에 질린 러시아 여자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을 흐렸다.
“지, 지금은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단호하게 남구의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눈 밖에 나기 싫었다.
오직 남구만이 목숨을 보전해 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몸이 안 좋으니까 이렇게 하지!”
야속하게도 남구의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했다.
옷을 홀라당 벗겨버린 남구가 번쩍 안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알몸인 여자를 안아 들고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는 남구에게 일제히 쏠렸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레진 눈, 야릇하게 바라보는 눈, 무언가 수긍하는 눈, 경멸하는 눈 등 각양각색의 빛깔을 띤 눈동자들이 나름의 의미를 담아 남구에게 꽂혀 들었다.
“죽기 전에 하려나 봐!”
“서, 설마!”
“설마는 무슨, 저런 거 한두 번 봐?”
바가지에 차가운 물을 퍼 올려 각종 채소를 씻고 있던 여자들이 손을 호호 불며 속닥거렸다.
남구가 그곳으로 터벅터벅 다가섰다.
흠칫 놀란 여자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
풍덩-
“하악! 차, 차가워!”
투명하도록 밝은 물이 가득 담긴 탕 안에 가타부타 말없이 담가 버렸다.
깜짝 놀라 첨벙첨벙 허우적거리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이씨! 물 튀잖아! 열 내려야 하니까 가만히 좀 있어.”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남구의 말에 첨벙거림을 멈추었다.
예솔이 종류별로 골고루 담아온 음식을 욕탕이 되어버린 탕의 턱받이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넌 그냥 여기서 먹어.”
남구도 한마디를 남기며 돌아섰다.
“상처에 물 안 닿게 해!”
탕 안이 추워서인지 남구의 뒤통수로 울먹임 섞인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네, 고, 고마워요.”
탕 안에서 꽤 밝아진 얼굴로 음식을 먹는 여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를 해 나갔다.
찐 감자도 메뉴에 추가돼 있었다.
여자들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까지 필수 영양소를 오래간만에 원 없이 보충해 나갔다.
남구는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뚝딱뚝딱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예솔이 빵빵해진 볼을 겨우겨우 움직이며 물었다.
“뭐 만드는 거야?”
“닭장하고 들것.”
남구의 말에 여자들이 하나같이 빵빵한 볼을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다봤다.
남구가 이어 말했다.
“버리고 가면 아깝잖아. 닭하고 염소하고 다 끌고 갈 거야.”
예솔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물어왔다.
“바로 가려고?”
남구의 시선이 탕에서 나와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 여자에게 향했다.
그러자 또 모두의 눈동자가 남구의 시선을 따랐다.
“쟤 상태 봐서. 그래도 되도록 하룻밤만 자고 움직일 생각이야.”
간만에 행복을 만끽하던 여자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울상이 된 터키 여자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여기서 조금 더 지내면 안 돼요?”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빨리 가봤자 또 데스 게임에 투입될 것 같은데요. 그럴 바에야 안전한 이곳에서 좀 더 살아도 괜찮지 않나요?”
터키 여자의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의견에 남구가 실소를 머금었다.
‘쟤는 역시 머리가 좋군. 한번 듣고 내 이야기를 다 이해했구만.’
남구가 손가락으로 두 군데를 가리켰다.
“저기랑 저기!”
손가락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이동했지만, 예술을 빼고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화들짝 놀란 예솔이 남구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저거 혹시!”
“맞아! 몬스터 대신 물이 나오고는 있지만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있는 구조야.”
남구가 가리킨 곳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갈라진 틈이 있었다.
“괜히 뭉기적거리다가 경쟁자를 마주치는 거보다 챙길 거 챙겨서 빨리 뜨는 게 좋지 않겠어?”
남구의 말에 예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내 아쉬워하던 여자들도 수긍했다.
입술이 번들번들해진 터키 여자가 남구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제가 좀 도울게요.”
“아니야, 다 먹었으면 가서 자.”
남구의 곁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터키 여자의 표정이 머쓱했다.
“아, 네! 짐이 늘어날 테니 체력 비축하는 게 도와주는 거겠네요.”
닭장을 만드느라 연신 재빠르게 손을 놀리는 남구가 끄덕거리며 말했다.
“석벽 열리는 소리가 커서 굳이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어. 푹 자라고.”
“네!”
쿠구구구궁-
여덟 쌍의 부릅뜬 눈동자가 풀풀 먼지를 일으키기 시작한 벽면으로 쏜살같이 향했다.
남구의 말마따나 석벽이 열리는 소리는 숙면을 방해할 정도로 우렁찼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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