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육체 쟁탈전 (10)
‘작전은 훌륭했어요. 아줌마!’
과거, 육체를 제공받은 세 명의 수혜자 중 하나는 저 빨간 머리 아줌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달랑 사과 한 쪽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동안 넥타이를 맨 남자가 남구에게 외쳤다.
“난 네 편이잖아! 난 왜 안 줘?”
‘네가 왜 내 편이야? 이 상황에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내 편은 나밖에 없단다.’
넥타이를 맨 남자의 착각과 억지에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남구가 넥타이를 맨 남자의 절박한 심정을 부추겼다.
“자기 몫은 알아서 챙겨야지요. 망치도 가지고 있잖아요. 조폭 두목 말이 생각나네요. 뒀다 국 끓여 먹을 겨? 회 떠 먹을 껴?”
순간 넥타이를 맨 남자의 눈빛이 사악하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돌연 망치를 꼬나쥐고 사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절박하고 두려울수록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명품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매너가 몸에 밴 듯 행동하던 처음 모습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유치한 꼬드김에도 어린아이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사과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 아우성치던 11명의 사람이 가벼운 몸싸움을 시작했다.
장바구니 아줌마가 사람들을 밀치고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회칼에 치명상을 입고 시체와 다름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가던 사람이 부들부들 간신히 손을 내밀어 먼저 사과를 잡았다.
장바구니 아줌마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아귀에서 재빨리 사과를 낚아챘다.
“이건 내 꺼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빡-
장바구 아줌마의 뒤통수에서 피가 튀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궤적을 따라 허공에 떠오른 핏방울이 길게 이어졌다.
털썩-
마치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맥없이 꼿꼿하게 바닥으로 엎어졌다.
허공에 떠올랐던 핏방울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으으으.”
엎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가 깨진 머리에서 흐르는 핏물과 함께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아줌마의 힘 잃은 손에서 사과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굴러떨어진 사과를 넥타이를 맨 남자가 부리나케 주워들었다.
그의 반대 손에는 방금 뒤통수를 강타한 망치가 새빨간 피를 머금고 들려 있었다.
“쌍년! 지 꺼 좋아하시네. 도망만 다닌 주제에. 니들도 다 마찬가지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아삭-
넥타이의 남자는 피가 쭈르륵 떨어지는 망치를 들고 눈을 부라리며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더는 바닥에 떨어진 장바구니를 챙겨주고 구토하는 이의 등을 두드려 주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명품 정장은 같은 옷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할 피에 절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부드러운 표정에 점잖았던 그의 인상은 악귀와 다름없었다.
눈썹을 치켜세운 채 안면의 모든 근육을 꿈틀거리며 사과를 씹어 먹는 얼굴은 마치 식귀와도 같아 보였다.
“저, 저······.”
“저 새끼가 다 처먹는다.”
“뺏어!”
“씨발 내놔!”
사람들은 넥타이의 남자가 살인을 저질러서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군데군데 베어 물려 앙상하게 갈변한 사과가 사람보다 우선이었다.
10명의 사람이 넥타이의 남자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사과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보기 처참한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저리 비켜! 버러지 같은 새끼들!”
넥타이의 남자가 악다구니를 썼다.
허공에 망치를 휘두르며 한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사과를 가져다 댔다.
누군가 사과를 들고 입으로 향하는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내놔!”
“안 놔?. 이건 내 꺼야!”
기를 쓰고 버티던 넥타이의 남자는 결국 넘어져 바닥에 깔리고 말았다.
“죽어! 이 새끼야!”
“죽어! 죽어!”
“씨발 새끼!”
도망만 다녔다고 비난받았던 억울함의 분풀이일까?
연명하고자 하는 간절함일까?
환자와 노인과 여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넥타이의 남자는 바닥에 깔려 무수한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망치와 사과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환자와 노인과 여자들은 목수의 자질구레한 공구를 주위 들고 한데 뭉쳐 넥타이의 남자에게 모진 린치를 가했다.
군중 속에서 먹다가 만 사과가 튕겨져 나왔다.
사과를 발견한 몇몇이 뛰어들어 쟁탈전이 벌어졌다.
아무도 먹지 못하고 이 손 저 손 옮겨 다니다 바닥을 여러 차례 굴렀다.
이제는 모두가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자기들끼리 2차전이 벌어졌다.
사람이 모두 떠난 자리에는 넥타이의 남자만이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으으, 으윽. 쿨럭!”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토해진 각혈이 분수처럼 얼굴로 쏟아졌다.
넥타이의 남자는 대자로 누운 채 가슴만 꿀렁댈 뿐이었다.
망치에 얻어맞은 한쪽 눈두덩이가 함몰되어 있었다.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었다.
여기저기 깨어지고 찢겨 얼굴과 머리 주변이 피투성이였다.
바로 옆에는 자신에게 뒤통수를 강타당한 장바구니 아줌마가 간신히 숨만 몰아쉬며 엎어져 있었다.
일련의 상황을 남구와 예솔, 은성, 빨간 머리 아줌마만이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예솔은 충격을 받은 듯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켰다.
우두커니 서서 손에든 사과를 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은성 역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먹다가 만 사과를 들고만 있었다.
빨간 머리 아줌마는 사과는 물론이거니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동료들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긴장된 눈빛으로 같은 교복을 입은 세 아이를 내내 주시했다.
특히 유별난 행태를 보이는 남구를.
남구는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이 아닌 듯했다.
쪽쪽-
사과 꼭지와 씨까지 몽땅 씹어 먹고 텅 빈 손에 손가락을 빨아 댔다.
표정도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남구 역시 다른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빨간 머리 아줌마만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말수 없는 빨간 머리 아줌마의 입이 열렸다.
“사과는 저쪽에도 있어.”
손가락이 예솔을 가리켰다.
사과라는 단어에 피를 튀기며 서로 옷과 머리채를 잡고 뒤엉켜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솔에게 향했다.
눈이 뒤집힌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과를 가진 예솔과 은성을 향해 디뎌졌다.
“내놔!”
“너희만 먹냐? 우리도 줘!”
“망치 나한테 있다. 안 내놓으면 대가리 부숴 버린다?”
“저 작은 새끼, 삐쩍 마른 저 새끼가 다 처먹었어!”
못 먹으면 죽게 된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앞다투어 뛰어들 태세였다.
남구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알았어! 줄게.”
예솔의 손에 있던 사과를 낚아채 군중 속으로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사과를 한입이라도 베어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사과다.”
“나도 좀 먹자, 개새끼들아!”
“씨발 비켜!”
“꺄악!”
2명을 제외한 8명의 무리는 떨어진 사과를 향해 앞다투어 몸을 날렸다.
1명은 망치에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머지 1명인 빨간 머리 아줌마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시나리오대로 안 흘러가요?”
남구의 비웃는 듯한 말에 빨간 머리 아줌마는 보일 듯 말 듯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멍청한 자들 때문에 일을 망쳤다는 실망과 체념을 빨간 머리 아줌마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또 한차례의 사과 쟁탈전을 벌인 사람들은 6명 만이 남았다.
사과가 누군가의 뱃속으로 사라지게 되자 또 교복을 입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구는 은성의 먹다가 만 사과를 뺏어 들고 가볍게 던져 버렸다.
“많이 드세요.”
“악! 고마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겠지만, 이제는 고맙다는 말까지 하는 이가 있었다.
“넌 몇 입 먹었잖아! 난 못 먹었어!”
“비켜,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반말이야!”
“이 노친네가? 꺼져!”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가스나가? 죽어라!”
한 입이라도 베어 물려 얼굴을 들이미는 여자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쳐 버렸다.
뻐억-
하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인이 사방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가 둔탁한 소리를 여기저기에 뿌려 댔다.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여자와 정수리가 원형으로 휑하게 벗겨진 대머리 노인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시한부 여자가 들고 있던 회칼을 축 처지게 늘어뜨리고 옆에 있는 대머리 노인을 돌아보았다.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던 대머리 노인도 불안한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빨간 머리 아줌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빨간 머리 아줌마는 남구만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침음을 뱉었다.
“으흠, 이거 말린 것 같은데······.”
망치를 든 덥수룩한 수염의 노인이 세 명을 때려눕히고 사과 반쪽을 독차지했다.
만면에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급히 씹어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구만을 살피고 있던 빨간 머리 아줌마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나 너 알아. 사냥개 남구!”
“어?”
처음이었다. 남구의 얼굴이 굳은 것은.
줄곧 조금의 변화도 없이 덤덤했던 남구의 표정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사람들을 비웃듯 가늘게 처져 있던 눈꺼풀이 화등잔만 하게 치켜 떠졌다.
“어, 어떻게?”
당황한 티가 역력한 남구의 질문에 빨간 머리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기 혼자 수긍했다.
“역시 그랬군!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어.”
“당신도?”
확인차 묻는 남구에게 빨간 머리 아줌마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다 기억해.”
“정신방벽?”
빨간 머리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난 숙련도 100%였거든.”
남구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음, 그렇군! 그렇다면 여럿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쓰레기 취급받던 스킬 정신방벽을 나 말고도 100%까지 올린 정신 나간 사람이 또 있었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은성이 치고 나가지 못할지도······.’
상념을 끊는 빨간 머리 아줌마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놀랐어.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거든.”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지?”
“말해도 모를 거야. 별 볼 일 없었거든.”
“불리던 이름이 없었나?”
“워낙 보잘것없던 인사라 별명도 붙지 않았었어.”
‘그럴 리가! 적어도 정신방벽을 마스터할 때까지 살아남았던 생존자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그런데 날 어떻게 알지?”
남구의 질문에 빨간 머리 아줌마는 평소 남구와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훗,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번 찍으면 죽을 때까지 쫓아 기어이 끝을 보는 사냥개를.”
“음······.”
남구가 무언가 골똘하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빨간 머리 여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짜 놓았던 차선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남구를 포섭하는 게 최선이었다.
“사람들은 사람 좋은 네 주인보다 너를 더 무서워했지. 그래서 죽을 걸 알면서도 군말 없이 따랐던 건 아나 모르겠네?”
“풋, 그랬나?”
은성을 힐끗 쳐다본 남구는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과거, 은성은 한번 생각이 굳어지면 앞뒤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였다.
무모한 판단에 죽어 나간 사람도 여럿 되었다.
빨간 머리 아줌마의 질문이 계속됐다.
“지금 상황을 보니 결국 성공하지 못한 모양이야?”
남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저 빨간 머리 아줌마, 최후의 결전까지 살아남았던 사람이군.’
은성과 예솔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남구와 빨간 머리 아줌마를 번갈아 돌아보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빨간 머리 아줌마가 눈빛을 빛내며 제안했다.
“어때, 나와 손잡는 건? 나가서 못다 한 이야기도 마저 하고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는 거야. 함께 말이야.”
남구는 말이 없었다.
빨간 머리 아줌마가 남구의 눈치를 살피며 제안을 계속 이어 나갔다.
“저기 체격 좋은 놈과 너와 나, 이렇게 세 명이면 앞으로의 일들을 헤쳐 나가기 훨씬 수월할 거야.”
순간 예솔은 울상이 됐고 은성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은성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빨간 머리 아줌마는 은성의 대답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픽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오직 남구만을 바라보며 절실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흐흐, 당신이 무시하는 저놈이 몸을 바꾸기 전 바로 그 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표정이 어떨지 심히 궁금하군.’
은성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남구도 마찬가지였다.
남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말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셈이다.
남구가 모르는 정보를 저 여자는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경험과 정보와 기억이 있는 둘과 최강자였던 은성이 힘을 합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토록 원하던 안식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겹겹이 닥쳐올 고난의 길을 보다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 여자와 사생결단을 내야 하겠지.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자를 과연 이 몸뚱이로 감당할 수 있을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던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서서히 비틀려 올라갔다.
그에 따라 빨간 머리 아줌마의 입술도 같이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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