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종 친 학교는 (1)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던 널따란 학교 운동장 위에 휘황찬란한 광채가 순식간에 일어나며 세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났다.
화악-
“으윽!”
“헤엑!”
눈이 부시도록 환한 대낮이었지만 진에서 뿌려지는 광채는 조금도 그 빛이 바래지 않았다.
그러나 세 명을 토해내고는 그 즉시 종적을 감추었다.
강렬한 빛무리로 학교 운동장을 뒤덮었던 소환진은 소임을 다했다는 듯 소멸한 자리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소환진이 사라진 휑한 운동장에는 공허하게 흙먼지만 흩날렸다.
남구가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발밑을 내려다보며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빛을 발하게 되겠지! 그 징글징글한 놈들을 엄청난 규모로 토해낼 거야!’
모습을 드러낸 세 명은 애초에 사라졌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예솔이 상대적으로 홀쭉해진 몸으로 공간 이동의 영향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두 손 모아 꼭 쥔 손안에는 분리된 조경 가위의 한쪽 날이 햇살의 반사광을 번쩍이며 들려 있었다.
중심을 회복하자마자 예솔의 모습이 남구의 당부대로 서서히 지워져 갔다.
2 미터가 훌쩍 넘는 장신의 거구로 돌아온 은성 역시 잠시 휘청거렸지만, 통나무 같은 굵은 다리로 굳건히 버텨 섰다.
손아귀보다도 작아 보이는 회칼을 움켜쥐고 앞을 향해 내밀며 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남구도 소환진의 광채가 사라진 발밑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사방을 돌아보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남구의 새까만 눈동자가 베일 듯이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를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으음······. 역시 전과 똑같군!’
휑했던 눈 밑의 짙은 눈그늘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정결한 백자같이 투명한 윤기가 자르르 흘러 다녔다.
스치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 앙상했던 몸뚱이는 역삼각형의 부피 있는 몸태로 위풍당당한 기세를 뿜어내며 운동장 위에서 여유롭게 짝다리를 집었다.
조각조각 쪼개진 각각의 근육 덩어리들이 줄기줄기 찢어진 교복 틈 사이로 부위마다 꿈틀꿈틀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깨 위에 드리워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는 마파람에 산산이 부서지며 춤을 추듯 나부꼈다.
남구는 윤기 가득한 검은 물결로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생각했다.
‘아이씨! 머리칼 때문에 앞이 안 보이잖아! 빡빡 밀어버리든가 해야지 원!’
충격을 받은 예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저, 저게 뭐야? 좀비야?”
예솔은 평정심을 잃어 투명해졌던 모습이 다시 드러나고 있었다.
드러나는 예솔의 모습을 곁눈질한 남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똑바로 안 해? 그런 식이면 아무리 좋은 명품 스킬을 얻어도 아무 소용 없어. 이거야 원, 돼지 목에 진주를 건 격이구만!”
콤플렉스에 직격당한 예솔이 남구를 가자미눈으로 째려봤다.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래, 잡아먹을 것 같은 그런 눈빛 좋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자세면 돼!”
예솔은 분한 표정으로 거친 호흡만 씩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구는 좀비들 사이에서 구울의 모습을 찾아봤다.
‘이미 학교를 벗어난 건가? 아니면 어딘가에 짱박혀 있나?’
구울은 눈에 띄지 않았다.
‘생명 에너지를 대량으로 한꺼번에 거둬들이기에는 구울이 제격이지. 특히 인류에게 써먹기는 구울만한 게 없을 거야. 단 한 마리만 소환해서 똑 떨어뜨려 놓는다고 하더라도 나약한 인간들은 초토화되니까. 에너지 효율이 아주 그만이거든.’
남구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상황을 냉정하고 면밀히 살피는 것과는 다르게 은성의 커다란 눈은 더욱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마, 말도 안 돼! 네 말을 듣긴 했었지만······.”
남구에게 간단한 언질은 받았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현실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은성이 경황없이 고개를 휘적대며 말했다.
“운동장에는 하나도 안 보여.”
남구의 목소리가 무던하게 흘러나왔다.
“진원지는 운동장이지만 학교 건물 안에서 애들이 난리를 쳤을 테니 그쪽으로 모두 쫓아갔겠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교문 밖으로도 어느 정도 빠져나갔을 테고.”
‘전과 마찬가지로 육체 쟁탈전이 시작된 직후 곧바로 소환진에서 구울이 튀어나왔을 테지.’
소환된 구울에게 당한 사람, 당한 사람에게 물린 사람, 물린 사람에게 또 물린 사람들이 운동장에 줄줄이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되살아난 좀비들은 소란을 떠는 사람들에게 이끌렸을 테니 운동장이 텅텅 비는 것은 당연했다.
학교 운동장은 개미 한 마리 없이 깨끗했다.
은성의 시선이 텅 빈 운동장을 훑고 나서 학교 건물로 향했다.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교실에서 고립되어 숨어있는 반 친구들을 발견했다.
반색한 은성이 벅찬 음성을 발했다.
“아직 우리 반 애들은 모두 살아있어!”
‘전에는 나도 저 교실에 숨어있던 겁에 질린 한 아이에 불과했었지. 문을 봉쇄하고 책상 밑에 숨어서 숨도 안 쉬고 마냥 벌벌 떨고만 있었단다. 네가 지금 그 모습으로 창문을 넘어 들어오기 전까지.’
예솔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득 차오른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였다.
“우, 우리 반 애들은 다 죽었나 봐! 우리 교실에는 좀비만 돌아다녀!”
‘너희 반은 버티지 못한 모양이군. 다른 교실들처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실 대부분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은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구야, 빨리 교실로 가자! 일단 애들부터 구하고 봐야지!”
남구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 나갈 것 같은 은성에게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매점으로 갈 거야!”
“뭐?”
남구는 은성의 휘둥그레진 눈을 뚫어버릴 듯 노려보며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일단 저기, 저 수돗가에서 물부터 마실 거야! 안 그러면 예솔이 탈수로 쓰러져.”
은성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남구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불똥이 튈 것만 같았다.
‘넌 정말 나와 너무도 맞지 않는 성향이야!’
딜레마에 빠졌던 수많은 순간에 은성은 항상 이와 같은 선택을 해 왔었다.
은성의 선택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었다지만 남구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희생양이 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 경험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은성의 선택에 주제넘게 반대를 했었던 적도 많았었다.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지만.
은성은 독보적인 리더였다.
남구는 존재감조차 희미했었다.
단호한 목소리가 남구에게서 흘러나왔다.
“난 저기로 갈 거야!”
꽉 다문 턱 근육을 꿈틀거리며 남구의 검지가 다시 한번 수돗가를 가리켰다.
기리킨 수돗가는 보지도 않고 안광을 번뜩이며 은성을 쏘아봤다.
은성은 남구의 과민반응에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그러자!”
다들 발소리를 죽여가며 학교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수돗가로 향했다.
어느새 예솔의 모습은 다시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운동장 흙바닥에 찍히는 발자국이 남구와 은성을 따라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수돗가에 도착한 뒤 조심스럽게 물을 틀었다.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던 물길이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급하고도 숨 가쁘게 물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꿀꺽 들려왔다.
예솔의 입을 벗어난 물줄기가 투명하고 볼록한 몸매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예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아! 이제 살겠다.”
남구와 은성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급하게 물을 마신 은성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자, 이제 가자!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가면 들키지 않고 교실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남구가 수도꼭지에서 입을 떼고 지긋이 은성을 쳐다봤다.
“딱 한 번만 내 말 들어줘! 더는 너한테 아무것도 안 바래.”
은성이 딱 한 번이라는 단어에 다급했던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남구에게 물었다.
“어떤 말?”
“예솔이는 우리와 달라. 까딱하면 죽어버릴 수 있다고.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대규모 접전이 일어날 수 있어. 일단 매점을 점령하자! 거기에 예솔이를 놔두고 그다음에 뭘 해도 해야 해. 매점을 확보하고 나면 난 바로 떠날 거야.”
은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솔은 상태가 보이지 않았다.
은성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 왜? 혼자 어딜 간다는 거야?”
“매점에 반 애들 데려오면 예솔이도 잘 챙겨줘. 따돌리지 말고.”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서럽게 지냈단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예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긴 자꾸 어딜 간······.”
“매점으로 가자!”
남구는 예솔의 말을 끊어버리고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먼저 앞장서 걸어 나갔다.
다기능 목공 벨트에서 사용할 무기를 꺼내 들었다.
왼손에는 기다란 조경 가위의 한쪽을, 오른손에는 예리한 회칼을 뽑아 올렸다.
뒤처진 아이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말했지? 한번 물리면 끝이라고. 한꺼번에 몰려도 끝장이야! 각개 격파해야 해. 조심해서 조용히 따라와!”
은성과 예솔 모두 입을 뻥긋거렸지만, 남구는 벌써 학교 건물로 들어서려 했다.
재빨리 남구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빨리 움직일 수가 없어.”
예솔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은둔을 계속 유지할 심력이 부족했다.
탈진 직전이라 은둔을 그냥 풀어 버렸다.
남구는 진입로를 수돗가에 인접한 출입구로 선택했다.
선택한 출입구는 길쭉한 학교 건물의 가장 끝에 위치해 매점으로 가려면 긴 복도를 지나야 했다.
매점과 가까운 중앙 출입구를 선택하지 않았다.
복도 양쪽에서 협공당한다면 위험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문을 통과해 학교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몸을 숨기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기적거리는 힘없는 발걸음 소리와 호흡에 따라 그륵그륵 성대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왔다.
“캬악!”
간혹 누구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분노에 찬 괴성을 의미 없이 내지르고는 했다.
‘너흰 대체 뭐에 그렇게 성이 난 거니?’
위층에서도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며 걷는 소리와 낮은 톤의 가래 끓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방이 온통 그런 소리로 가득했다.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살폈다.
감염되기 전 치열하게 저항한 흔적이 좀비의 형상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남구가 입고 있는 교복과 마찬가지로 온통 피에 젖어 찢기고 헤졌다.
내장이 기다랗게 빠져나온 모습도 있었다.
길게 늘어진 내장을 바닥에 질질 끌며 어디론가 천천히 움직였다.
얼굴을 물어뜯겨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은 다반사였다.
안구가 없거나 코나 귀가 없는 모습도 여럿 됐다.
생명 에너지로 따진다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단 1 LP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참혹한 형상으로만 놓고 본다면 100 LP 정도는 될 듯싶었다.
남구와 예솔과 은성이 소환된 장소에서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벌였듯이 이곳 학교도 처절하게 서바이벌이 치러진 장소였다.
예외 없이 세상 모든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교복을 입고 있는 좀비들은 문이 열린 교실과 복도를 느린 걸음으로 오고 갔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숨어있는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면 이미 학교 건물 내부는 끝장이 나 있는 상태였다.
남구는 긴장된 상황에서도 눈을 감고 잠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좀비가 득실거리는 긴 복도를 어떤 방식으로 조용하게 뚫고 나갈지 고민했다.
[단검 던지기]
‘응? 스킬이 등록돼 버렸네?’
시스템에 등록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전에 쓰던 스킬이 저절로 등록되어버렸다.
회칼을 던져 단단한 두개골을 뚫어낼 수 있을지 생각을 한 것뿐이었다.
‘하! 이미지트레이닝 중에 저절로 등록돼 버리는군.’
기왕 등록된 것 스킬 내용을 열어봤다.
[단검 던지기]
[내용 : 단검 투척 시 운동 에너지 보정]
수월하게 습득이 가능한 스킬이었다.
LP도 비교적 싼 편이고 당연히 별도 붙지 않았다.
단검에만 국한된 기술이었고 효능이래 봤자 단순히 던지는 단검에 힘을 더 실을 수 있게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적중률도 올려주지 않아서 있으면 좋지만, 굳이 LP를 들여 얻어야 하나 싶은 계륵 같은 스킬이지.’
역시 친구들이 LP를 아끼려는 의도 때문에 남구가 얻게 된 스킬이었다.
회칼을 빙글 돌려 칼끝을 세 손가락으로 붙잡고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 중 가장 가까이 접근한 개체의 머리를 겨냥했다.
“흡!”
칼끝이 손끝을 떠났다.
휘리리리리리리릭- 뻑-
“카악!”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가 뒤통수에 제대로 꽂혔다.
들키지 않으려 잽싸게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호오! 이 몸, 위화감이 전혀 없군.’
무지막지한 근력에 두개골을 간단히 뚫어 버렸다.
털퍼덕-
몇 걸음 뒤뚱거리다가 바닥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새로운 메시지 텍스트가 깜박였다.
[글탄 투척술]
‘응? 이건 또 뭐지? 허어, 육신이 익히고 있던 스킬이 활성화됐군.’
체화된 기술이 발현되었다.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글탄 투척술]
[1. 투척 시 투척물의 속도와 힘 상승]
[2. 투척 시 적중률 상승]
[3. 던지는 모든 물체에 유기적 작용]
[4. 중력제어와 연계 시 상승효과 적용]
‘투척에 필요한 모든 능력이 다 들어있군. 설마 이것도 명품 스킬?’
시스템에 감정평가를 요구했다.
[글탄 투척술 ★★★]
‘쓰리 스타! 이것마저 명품이네!’
투척술 중 별이 붙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예 투척을 메인 뿌리로 삼지 않는 이상 거의 없는 경우였다.
‘흐흐, 글탄이 대단한 가문이긴 한가 보지?’
벽체 뒤에 숨어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는 남구의 모습을 은성과 예솔도 똑같이 멍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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