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간택 (2)
‘숨어 있는 놈이 또 있군. 볼 빨간 놈보다도 더 오래 있었나 보네?’
여태 몸을 숨기고 있던 볼 빨간 남자도 숨어 있는 또 다른 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숨긴 또 다른 사람은 1.5t 트럭 짐칸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남구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슬쩍 눈동자를 돌려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짐칸에 엎드린 자는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갔지만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미동도 없었다.
박 부장의 몸인 라이칸과 필적할 정도의 감각을 지닌 남구였다.
전투화나 등산화 같은 두툼한 밑창을 가진 신발 앞꿈치와 짐칸 바닥이 한 차례 부딪히는 소리가 났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남구의 레이더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볼 빨간 남자는 눈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어오는 남구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듣지 못한 듯했다.
뒤쪽에서 볼 빨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적지가 같은 것 같은데 같이 갑시다.”
무시로 일관하며 계속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진짜 외국 사람인가? 설마 한국말을 못 하나?”
볼 빨간 남자의 조용한 혼잣말이었지만 집중한 남구의 청력에는 허연 입김을 뿜어대는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서걱서걱 눈 밟는 소리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남구의 뒤를 따랐다.
남구는 조심조심 뒤따르는 볼 빨간 남자와 트럭 짐칸에서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게 꼭꼭 숨은 존재를 뒤로한 채 망설임 없이 단번에 투명한 빛의 결계를 그대로 통과해 들어갔다.
마치 내리쬐는 햇살 속에 들어서듯 했다.
느껴지는 저항감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남구가 미지의 공간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 버리자 볼 빨간 남자의 뒤 따르던 발걸음 소리가 한차례 주춤했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재차 점검한 남자가 망설이던 발걸음을 재촉해 투명한 결계가 쳐진 돔으로 다가섰다.
눈 앞에 펼쳐진 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광경에 볼 빨간 남자의 표정은 심각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추고는 결계를 통과하지 못해 수두룩하게 나뒹군 불타버린 좀비의 시체를 불안한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결계 앞에 우뚝 멈추어 서서 총부리를 넣어보고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발끝을 대어보는 등 온갖 허튼짓을 다 하다가 결국 몸을 밀어 넣었다.
“허! 이, 이것은?”
좀비를 통째로 구워버린 결계는 볼 빨간 남자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입하는 순간 얼굴에 햇살이 닿은 듯 따뜻한 느낌만이 감돌았을 뿐이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정신을 수습한 남자가 눈에 힘을 주고 전방을 바라봤다.
먼저 들어갔던 남구가 태연한 자태로 주위를 빙 둘러보며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남구가 머뭇거리다 들어온 볼 빨간 남자를 슬쩍 돌아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 이내 고개를 바로 했다.
결계 안에는 남구보다 먼저 도착한 7명이 짝지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거나 군용 전투 식량을 개봉해 데워 먹거나 멀찍이 혼자 떨어져 사색을 즐기는 등 각자의 개성대로 제각각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모두 한결같았다.
남구의 구석구석을 훑어대던 사람들의 침잠한 눈빛은 뒤를 이어 들어온 남자에게 재빨리 옮겨졌다.
그들의 흉흉한 눈빛은 남구와 볼 빨간 남자를 왔다 갔다 오가며 면밀하게 돌아다녔다.
남구가 이곳까지 아무리 빠르게 이동했다고 해도 작별을 준비하느라 소모한 시간이 많았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움직였다면 한참 전에 도착해 서로를 어느 정도 알아가고도 남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막판에 들어온 새로운 인원에게 관심이 폭발했다.
볼 빨간 남자도 쏟아지는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넘기며 그들을 살폈다.
각자가 각자를 살피느라 저마다 떼굴떼굴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려댔다.
‘다들 어지간히 굴려 대는군. 바위 구르는 소리라도 날 것 같구만.’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남구를 노려보는 그들은 하나같이 남구와 비슷한 복장이었다.
방수 기능이 있는 무채색 계통의 아웃웨어를 입고서 큼지막한 다용도 배낭에 소총 한 자루씩은 기본으로 곁에 두고 각종 유용한 서바이벌 장비를 곳곳에 착용하고 있었다.
활이나 석궁이 없는 사람이 없었고 소음기가 달린 권총뿐만 아니라 남구처럼 K7 소음기관단총을 소지한 이도 있었다.
거지꼴로 연명하는 여타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몸에 얼마짜리 명품을 몇 개나 걸쳤는지 한눈에 스캔하는 된장녀, 된장남같이 멸망한 세상의 서바이버들은 서로의 전신을 샅샅이 스캔했다.
‘재미있군. 여자가 한 명 끼어 있네?’
기세등등한 남자들 사이에서 온몸에 산악 장비를 두른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남아인과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태평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식량을 잔뜩 펼쳐 놓고 점점 줄어가는 숫자가 제로에 가까워지는 이때 최후의 만찬이라도 하려는 듯 유유자적 젓가락을 놀렸다.
하지만 젓가락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도 새로 들어온 남구와 볼 빨간 남자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색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딱 봐도 한가락 하게 생겼군.’
보통이 아닌 남자들 틈바구니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곳 결계 안에 있는 자는 예외 없이 다들 기세와 위용이 흘러넘쳤다.
직업 군인이 아닌 자가 없어 보였다.
‘힘만 세다고 살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시절이 아니지. 풋, 힘까지 센 놈들이군. 모두 육체 전이자네?’
아무도 소란을 떨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자신감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어떠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기 한 몸 정도는 지킬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준비된 육체에 멘탈까지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과 팀을 이룬다면 그곳의 게임을 휩쓸어 버릴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남구를 포함한 여기 있는 모두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 족속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특별 케이스였다.
일정 기간까지 생존한 자들을 무작위로 뽑아가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 전부를 혼자서 몽땅 데려갈 만큼 모든 족속을 압도하는 독보적인 가문은 있을 수 없겠지.’
돔 안에서 날 선 기세를 뿜어내는 한 명 한 명마다 둘 이상의 족속이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을 것이다.
그 족속들에게는 인류 침공과 함께 시작한 이번 게임에 목숨과도 같은 권위와 명예와 생명 에너지의 득실이 걸려있었다.
치열하게 경매가 붙어 꽤 많은 LP를 투자했을 것이고 따라서 이곳에 모인 자들이 같은 소속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경매에서 승리한 족속의 소속으로 각자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생각을 이어가던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 비틀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풋! 그래 봤자 대부분이 죽어 없어질 단순한 게임 말에 불과할 뿐이지.’
여기 모인 자들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중 대다수는 얼마 가지 못해 누군가의 몸 속이나 생명의 핵 속을 꾸물꾸물 누비는 생명 에너지 따위로 화할 것이다.
남구는 구석구석 날아드는 여러 쌍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무던하게 받아내며 원조라고 떡하니 간판을 내건 옛날짜장 집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짜장면도 원조가 있나?’
사기가 난무하던 세상을 그리워하며 곳곳에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가 소복이 쌓인 가게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할머니가 짜장면을 사주었던 추억이 돋아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아 보았다.
‘중국집 생김새가 다 거기서 거기라 그런가?’
어쩌다 한번 할머니와 같이 갔던 허름한 중국집과 꽤나 비슷하게 생겼다.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선 벽면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메뉴를 물끄러미 훑었다.
지퍼라도 채워진 듯 굳게 닫혀있던 남구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젠장! 짜장면 한 그릇을 못 얻어먹고 가는 구만.”
오랜만에 입을 연 남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 빨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장면 먹고 싶어요?”
조심조심 남구의 뒤를 쫓아 더욱 조심조심 결계 안으로 들어왔던 볼 빨간 남자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 의자를 조심조심 빼고 앉으며 친한 척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불그스름한 뺨에는 더욱더 불그스름한 칼자국이 기다랗게 나 있었다.
저 상처는 불그스름하므로 최근에 입은 것이고 칼에 베인 자상이기에 목숨을 건 대인전을 치렀다는 뜻이며 살아 있으니 볼 빨간 남자의 볼에 빨간 칼자국을 낼 만큼 실력 있는 사람을 한 명 이상 죽이고 승리했다는 의미였다.
볼 빨간 남자는 조용하게 자리에 앉아 남구의 시선을 따라 잠시 메뉴판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남구에게 두었다.
볼 빨간 남자도 남구의 얼굴에 난 발톱 자국을 눈여겨보며 말을 붙였다.
“댁도 크리처를 잡은 모양이군. 얼굴에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았다니 대단해! 혹시 실명해서 선글라스를 쓴 건가?”
‘내 소중한 스킬 ’일소‘가 없었다면 실명했겠지!’
남구의 얼굴에 난 발톱 자국은 선글라스의 커버 범위를 훌쩍 웃도는 기다란 상처였다.
남구는 그저 입맛을 다시며 메뉴를 읽어 나갈 뿐 대꾸하지 않았다.
볼 빨간 남자는 남구의 관심이라도 끌려는 듯 목에 걸어둔 가죽끈을 방탄조끼와 패딩 위로 꺼내 보여주었다.
가죽끈에는 길쭉한 크리처의 갈고리발톱이 주렁주렁 매어져 있었다.
“나도 몇 마리 잡아 봤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모르겠지만 크리처를 사냥해 본 사람끼리 손을 잡는 게 어떨까 싶은데? 서로 도움이 좀 될 것 같지 않나?”
‘육체 쟁탈전을 염두에 두고 미리미리 포섭하려 했던 거였구만. 내가 좀 괜찮아 보였나?’
볼 빨간 남자가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됐군. 카운터가 끝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혹시 알고 있나?”
남구도 점점 줄어가는 숫자를 힐끔 보았다.
“심정은 이해 갑니다만 같은 곳에서 보게 되면 그때 가서 친하게 지내죠.”
말을 마친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삐쭉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다른 곳으로 가 적으로 만날 수도 있답니다.’
남구의 비릿한 미소를 바라보던 볼 빨간 남자도 마찬가지로 씩 입술을 비껴 올렸다.
“한국말 잘하는구만. 역시 육체 쟁탈전의 생존자였어. 그래, 같은 곳에서 보게 되면 같이 잘해 봅시다. 건투를!”
남자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고춧가루통을 건배하듯 들어 올렸다.
“후후, 그럽시다. 저도 건투를 빌어 드리죠.”
“저도 건투를 빌게요.”
동남아인과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대화에 끼어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볼 빨간 남자가 들어오는 여자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아가씨도 한국말이 유창하군. 여기 있는 모두가 육체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모양이지?”
“푸훗, 아마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여자는 만찬이라도 즐기려는 듯 테이블에 식량을 잔뜩 깔아놓고는 미식가처럼 아주 조금씩만 깨작거리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먹고사는 것이 최대의 관건인 이런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볼 빨간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아휴, 아까워! 저거 내가 먹어도 되나?”
“나랑 손잡고 끝까지 간다면 까짓거 못 줄까!”
여자의 대답에 또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삐쭉거렸다.
‘다들 이번 소환을 또 다른 육체 쟁탈전으로 생각하는군.’
여자는 식량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해 자기편으로 하나하나 포섭해가는 중인 듯했다.
볼 빨간 남자가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를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좁히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여자가 맞기는 맞는 거요?”
“푸훗, 내가 남자 같아 보여?”
여자의 비웃듯 웃는 웃음은 상대를 깔보고 있었지만 매혹적이었다.
볼 빨간 남자는 까무잡잡한 여자의 미인계에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말 한두 마디 섞고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육체 전이자들은 암수 구별이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호호호! 내가 남잔지 여잔지는 차차 알아가면 되는 것이고. 소환되고 나서 시간도 널널할 텐데 몸으로 직접 알려 줄까?”
“큭큭, 이거 완전히 여왕벌이구만. 난 남자한테 취미 없는데? 되도록 여자였으면 좋겠군.”
여자가 남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선글라스 낀 귀여운 오빠!”
까무잡잡한 여자가 남구를 부른 후 긴 속눈썹이 자라난 고혹적인 눈을 찡긋거렸다.
“알지? 우리 들어가서 잘해 보자고. 혹시 알아? 잘하면 내가 한번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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