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육체 쟁탈전 (11)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던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서서히 비틀려 올라갔다.
그에 따라 빨간 머리 아줌마의 입술도 같이 호선을 그렸다.
‘저 여자는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생존자임에도 내게 자신의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어. 고로 신뢰할 수 없다. 어떤 깽판을 치고 다녔을지 알 수가 있나! 솔깃한 말을 여럿 뱉어냈지만, 말이란 단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지.’
남구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았지만 뱉어내는 말은 더욱 믿지 않았다.
기억을 가진 자 중 일말의 인간성이라도 남아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목숨을 담보로 한 시스템의 데스 게임을 경험한 자들은 안면 바꾸기쯤은 서슴지 않는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듯 상황에 따라 웃는 얼굴로 주저 없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남구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 똑같고 마찬가지로 변해 갔다.
그래야 살 수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그런 자들이었다.
‘나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 내게 인간성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강력한 아군이 가장 치명적인 적으로 돌변하는 경우를 남구는 여럿 보았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현재는 다음을 기약하기가 요원하다.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도 의지할 수도 없는 시국이었다.
각자의 유불리에 따라 필요한 만큼 이용할 뿐이다.
의지했던 이들을 희생양 삼아 살아남은 자가 부지기수인 아수라장에서 은성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 기준은 모호했으나 자신을 정의라 생각했고 생각대로 행동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은성같이 자기가 믿는 가치관과 신념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별난 성격의 사람은 많았지만 모두 은성처럼 할 수는 없었다.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아사리판에서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건 바로 가공할 힘을 가진 몸뚱이.
침공을 자축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벤트에서 즐거움을 채워준 보상으로 제공된 육체.
그 육체 중 최강의 육체를 얻은 덕분이다.
그런 강력한 육체를 얻지 못했다면 송곳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성격의 은성은 벌써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골백번은 더 됐을 것이다.
은성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렀기에 처지와 생각이 달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경이로운 성과를 보였기에 모두의 희망으로까지 자리 잡았었다.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은성에게 의지한다면 편할 것이다.
적어도 최후까지 살아남을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남구로서는 과거와 같이 꽁무니만을 쫓을 수는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은성의 힘에 기댔었기에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또다시 무간지옥에 떨어져 버린 것이겠지.’
생각지도 못한 기억을 가진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었지만 남구는 어느새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쪽 입꼬리만 삐쭉 치켜올리는 평소의 미소를 지으며 빨간 머리 아줌마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웃는 낯의 눈길을 받은 빨간 머리 아줌마는 환희에 차 들떠 말했다.
“고마워, 남구! 우리 잘해 보자고. 내가 잘 보필하지. 호호호···”
“시도는 좋았어요.”
“···호호, 응?”
“서로 패가 다 까졌는데 슬슬 들어오시죠.”
“아, 아니, 왜? 설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 계집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매우 당황하는 빨간 머리 아줌마의 행태를 충분히 예상하였다.
예솔은 절대 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없을 테니까.
“풋, 쓸모가 없다니,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잖아요. 너무하네!”
남구는 자조 섞인 헛웃음을 흘리며 예솔을 돌아보았다.
예솔을 보면 은성의 꽁무니를 쫓았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쓸모없던 거로 따진다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지.’
눈물을 글썽이며 불안에 떨던 예솔의 눈빛이 남구를 말갛게 바라보았다.
‘저 눈빛도 내가 은성이를 바라보던 눈빛과 비슷하려나? 나도 저런 눈빛이었을까?’
빨간 머리 아줌마의 목소리에는 미련이 뚝뚝 묻어 나왔다.
간절한 마음에 말이 따발총처럼 빨라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사냥개가 이렇게 멍청할 리가 없지. 무슨 생각이야? 왜 나를 거부하지? 무릎 꿇고 충성 맹세라도 할까?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저 계집은 절대 도움이 안 돼.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어떤 게 이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
“이번 생에서 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요.”
“뭐, 뭐야? 뭔 개소······. 큼, 인연이 뭐 별건가? 나를 선택한다면 절대 후회 안 할······.”
빨간 머리 아줌마는 남구를 설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더 말을 섞어봤자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도 계속 설득을 위한 주절거림이 이어졌지만, 남구는 대꾸 없이 은성을 돌아보았다.
은성도 빨간 머리 아줌마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남구를 보고 있었다.
은성은 예솔을 잘 몰랐지만 그래도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안을 듣자마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구와 빨간 머리 여자의 대화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미적거리는 남구의 결정을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봤었다.
예솔이 중간에 서서 눈빛을 교환하는 남구와 은성을 번갈아 돌아보느라 머리를 휘저어 댔다.
“네가 힘이 세니까 저기 세 명 맡아.”
은성은 남구의 퉁명스러운 말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조심해!”
“여기 냄새나서 더 못 있겠어. 빨리 나가자고.”
남구의 투덜거림에 은성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죽은 사람의 옷으로 삼각 붕대를 만들어 부러진 팔을 고정한 은성이 그 속에 넣어놨던 회칼을 꺼내 들었다.
남구도 겨드랑이 안쪽에 끼고 있던 분리된 조경 가위를 양손에 말아쥐었다.
기다랗고 날카로운 가위를 말아쥔 모습에 결국 빨간 머리 아줌마는 절실하게 이어가던 설득과 회유를 멈추었다.
낭패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의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젠 의지할 데라고는 저들밖에 없었다.
자중지란 중 3명만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망치로 자신의 편에 섰던 이들을 거의 다 때려눕힌 흰 수염의 노인, 회칼로 차마 동료를 찌르지 못한 환자복의 시한부 여자, 목수가 들고 있던 드라이버를 챙긴 머리가 다 벗겨진 노인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작전 모의가 시작됐다.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드라이버를 든 대머리 노인이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저놈, 칼은 들고 있지만 팔이 부러졌어. 외팔이야!”
덥수룩한 수염에 사과 과즙을 잔뜩 묻힌 노인이 망치 자루를 불끈 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이길 거야!”
회칼을 들고 손을 떠는 환자복의 여자가 다짐받듯 이야기했다.
“우, 우리 셋이 최종 삼 인이 되는 거예요. 알았죠? 우리 살 수 있어요.”
빨간 머리의 아줌마가 다급히 외쳤다.
“이쪽으로 한 명 와줘.”
절박한 외침이었으나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환자복의 여자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우, 우리가 빨리 해치우고 도와줄게요.”
그냥 혼자 싸우라는 말이었다.
세 명이 빠른 시간에 은성을 죽인다고 해도 도와주러 갈지는 미지수였다.
이번 격전에서 남구와 은성과 예솔이 모두 죽고 셋이 살아남는다면 다음 목표는 빨간 머리 아줌마가 될 것이 분명했다.
예솔이 언제 주웠는지 주머니에서 작은 목공 끌을 꺼내더니 나서려 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남구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풋, 아서라!”
“나, 나도 도와······.”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예솔이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
남구가 목소리의 톤을 살짝 높여 말했다.
“어이, 예솔! 잘 들어. 명심해!”
예솔의 눈이 땡그래졌다.
‘내 이름 처음 부른 거 같은데?’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어투에 예솔은 자석이 이끌리듯 저도 모르게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남구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남구의 말이 정확한 발음으로 단락 단락 절도 있게 딱딱 끊어져 예솔의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내 무기는 길어. 옆에서 알짱거리면 움직임에 방해돼. 또 네가 칼이라도 맞으면 은성의 신경이 분산될 거야.”
‘네 신경은 분산 안 되고?’
예솔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덤비는 놈 있으면 도망만 다녀. 끌은 최후에 사용해.”
처음 보는 의외의 모습에 예솔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아이였나?’
남구는 대답도 잘 안 해주던 지독히 말이 없던 아이였다.
무시가 습관이었다.
그동안 받았던 개 무시를 생각하니 지금도 울컥하려고 했다.
지금 남구는 마치 예솔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상관 같았다.
핵심만 간단명료하게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전장은 움직인다. 넋 놓지 말고 항상 안전거리 유지해.”
어느덧 예솔은 상관의 작전명령을 하달받는 부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찌그러져 있으라는 이야기를 상당히 논리정연하게 얘기하네?’
“얼마 안 걸려. 다녀올게.”
남구의 마지막 말에 예솔은 공포심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후들거리던 다리의 떨림이 멈췄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작은 목공용 끌의 손잡이를 굳게 잡고 발목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성이 굳센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의지를 다지듯 둘을 향해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힘있게 말했다.
“살아서 만나자!”
예솔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돌리던 발목을 그대로 멈췄다.
표정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눈 녹듯 사라졌던 공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순식간에 겁을 먹고 다리를 후들거렸다.
‘자식! 쓸데없이 비장하기는.’
남구가 절레절레 고갯짓하며 빨간 머리 아줌마를 주시했다.
때를 같이 해 빨간 머리 아줌마의 시선은 자신의 무리로 향했다.
‘합류해서 저 연놈들을 방패막이 삼아 슬슬 피해 다니는 게 안전할 거야!’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성을 쏘아봤다.
‘저 덩치 큰 놈의 회칼이 누군가 몸에 박힐 때, 그때를 노린다면 충분히 멱을 딸 수 있어! 사냥개를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승산이 있겠지!’
빨간 머리 아줌마가 자신을 노려보는 남구를 힐끔 쳐다봤다.
왜소한 체격과는 다르게 조폭들을 해치우는 남구의 실력이 너무나 대단했었다.
나이 들고 피둥피둥 살찐 지금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사냥개와 일 대 일은 이길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연놈들과 합류해야 해!’
빨간 머리 아줌마가 자신의 편이라 할 수 있는 3명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몇 발짝 떼지 못했다.
“헉! 정말 나한테 왜 이래?”
어느새 남구가 진로를 막아섰다.
두 명의 노인과 환자복을 입은 여자에게는 회칼을 빼든 은성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남구는 표정 없이 싸늘한 눈빛만을 번득였다.
‘이 아줌마를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먼저 끝을 내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얼굴에 티는 안 냈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기억이 있는 자라니! 의외의 복병을 만났어. 일 대 일이라면 내가 유리할까?’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았다.
수분도, 수면도, 에너지도 충분했다.
이런 때가 올 줄 알고 있었기에 컨디션 유지에 만전을 기했다.
빨간 머리 아줌마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잠도 한숨 못 잤다.
소지한 무기의 사정거리도 월등했다.
단 정확도에 확신이 없었다.
무기는 자기 몸처럼 다루어야 했다. 특히 길수록.
무기의 상성 상 붙게 된다면 유불리가 한순간에 뒤바뀔 것이다.
‘따라주지 않는 몸뚱이가 문제인데······.’
힘이 없어도 너무 없는 몸뚱이였다.
머릿속에 있는 감각을 몸에 새길 겸 가윗날을 잡은 양손의 손목을 차례로 휘돌렸다.
휭휭휭- 휘이잉-
위협적인 바람 소리에 빨간 머리 아줌마는 경계심을 고조시키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스프링처럼 빠르게 튈 준비를 했다.
‘당신도 아수라장을 헤치며 살아남은 경험과 기술을 머리에 새기고 있겠지?’
마주치는 눈빛에서 빨간 머리 아줌마의 불안감이 읽혔다.
‘저쪽도 기술은 꿰고 있지만 자기 몸에 확신이 없는 모양이군. 아니면 전에 보인 내 위용에 주눅이 들었던지. 둘 다 일지도 모르지.’
조폭을 잡았을 때는 순간의 힘을 폭발시킨 기습이었다.
기습과 대전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빨간 머리 아줌마는 벌써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극도로 긴장된 상태로 보였다.
‘초반부터 부담스러운 상대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운도 지지리 없는 인간들이라 생각합시다.’
빨간 머리 아줌마는 먼저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들어와 주면 참 고마울 텐데, 할 수 없지! 안 오면 먼저 가는 수밖에.’
“저기······.”
말을 붙이는 척하며 부지불식 왼팔을 쭉 뻗어 코앞에 가윗날을 찔러 넣었다.
쐐애액-
“윽!”
아줌마가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해냈다.
그리고는 물러서느라 여념이 없다.
‘역시 긴 게 좋긴 좋군. 근데 저 아줌마, 피둥피둥한 몸에 비해 반사신경이 꽤 좋은데?’
빨간 머리 아줌마는 남구의 거리를 재기 위한 견제 동작 한 번에 뒤로 빠질 뿐 파고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구가 가윗날 끝을 축 처지게 내리고 마치 펜싱 하듯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사정거리를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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