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최종 점검 (2)
크아아아앙-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수많은 생명체를 짓밟아 죽인 두꺼운 다리로 땅을 힘껏 박찼다.
쿠웅-
그 어마어마한 덩치가 엄청난 높이로 솟구쳐 올랐다.
꽈아아아아앙-
하늘을 다 가렸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울리며 내려앉았다.
지면은 운석이 떨어진 듯 쩍쩍 갈라져 나갔고 대기에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엄청난 무게 탓에 떨어져 내린 발바닥이 땅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스킬 ‘순간이동’으로 훌쩍 물러난 남구가 참룡도의 거대한 도신을 느긋하게 어깨 위에 척 걸쳐 올렸다.
천지가 진동하는데도 남구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일절 없었다.
남구의 치렁거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거센 후폭풍에 한 올 한 올 산산이 부서져 화진과 함께 펄럭펄럭 나부꼈다.
남구는 정처 없이 흩날리는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까만 눈동자를 반득이며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을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도 움푹 파인 땅속에 다리를 박아 넣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남구와 마찬가지로 그저 제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서로 기싸움과 눈싸움을 벌이는 듯 보였지만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처지는 남구와 아주 달랐다.
아무리 움직이고 싶어도 거대한 압력에 짓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스킬 숙련도가 90%에 육박하는 중력제어는 마계에서도 월등한 체구를 자랑하는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잠시 잠깐의 정적이 깨졌다.
순간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부르르 떨렸다.
부들부들 떨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몸뚱이를 틀어 등을 보였다.
공포에 질린 수직 동공이 활짝 열린 채 남구를 힐끔힐끔 돌아다봤다.
생전 처음 죽음의 공포라는 감정을 느껴보는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도주라는 경험까지 한꺼번에 하고 싶었다.
길게 베어진 안면에서 견딜 수 없이 끔찍한 통증이 일어났다.
등을 보인 이유는 지독한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구의 까만 눈동자에서는 스킬 한기폭사가 소름 끼치치도록 줄기줄기 뻗고 있었다.
남구의 귀신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보자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저히 등을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중력제어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가차 없이 옭아맸다.
꿈지럭거리며 간신히 돌아서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마계를 통틀어도 최고의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종이었다.
근력과 방어력이 장점인 지룡 중에서도 그 체구만큼이나 육체적 능력이 유달리 높았다.
남구가 최종 마무리 점검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90%까지 치달은 중력제어의 위력을 가늠해본 남구가 왼손을 뻗어냈다.
패시브로 장착한 스킬 덕분에 세 가지 권능이 동시에 발현했다.
반득이는 광채를 띤 남구의 까만 눈동자를 통해 중력제어와 한기폭사가 끊임없이 펼쳐졌고 뻗어낸 손바닥을 통해서는 싸늘한 한기를 뿌려대는 백색 빛살이 곧게 쏘아졌다.
피융- 슝- 슝- 슈우웅-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돌아선 넓은 등판에 계속 백색 광선이 사정없이 꽂혀 들었다.
퍽- 퍽- 퍼억-
눈동자와 손바닥에서 뿜어지는 한기가 남구의 온몸을 마치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 감싸고 돌았다.
지금 손바닥에서 뻗어나가는 핵산의 기운은 마치 과거 공동의 벽면에 선상을 따라 맥동하듯 흐르던 핵의 기운과 똑같아 보였다.
공동에서 마주했던 생명의 핵은 남구를 갈기갈기 찢고 짓이길 것처럼 압박했었다.
남구는 자신이 발휘하는 압도적인 핵산의 권능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그렇게 죽을 것같이 견디기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기운이 지금은 지쳐가는 내게 쉴 새 없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구나!’
남구는 연달아 스킬을 펼치고 있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샌드백인 양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레이저 빔처럼 곧게 뻗어나간 핵산의 빛줄기는 피부 속을 파고들어 자그마한 원형의 구체를 형성했다.
형성된 구체는 살을 에는 가공할 한기를 파고든 살 속에서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마구마구 발산했다.
하얗게 서리가 끼었던 피부조직이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칼에 베인 듯 짝짝 찢어지고 갈라졌다.
난장판이 된 등짝 전체가 순식간에 거뭇거뭇하게 변해갔다.
빛줄기에 틀어박힌 구멍은 깊을지언정 그리 넓다고 할 수 없었지만, 주변의 세포조직이 가열하는 핵산의 기운에 모조리 괴사해 나갔다.
가공할 핵의 기운에 찢어지다 못해 까맣게 죽어 동상에 걸린 듯 흐물거리던 살덩이들이 뭉텅이로 덩이덩이 떨어져 내렸다.
깊게 베어진 아가리와 한쪽 안구도 멀쩡하지 못했다.
베인 상처 깊숙이 스며들었던 핵산의 기운이 흩어진 물방울에 응집 현상이 일어나듯 모여들어 구체를 형성했다.
괴사한 조직 밖으로 베인 눈알과 이빨들이 쑥쑥 빠져나갔다.
한참을 고통받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쪼개진 아가리를 힘겹게 벌렸다.
크아아아앙-
그토록 강건했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만신창이가 되어 마지막 단말마만을 길게 남긴 채 무너져 내렸다.
쿠우우웅-
지축이 흔들리며 자욱하게 먼지와 잿가루가 피어올랐다.
‘심장이 뛰지 않는군.’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생명력이 다하자 작은 구슬처럼 상처마다 촘촘히 박혀 있던 응집된 빛의 구체들이 그 하얗게 빛나는 기운을 서서히 사그라뜨리며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남구가 힐끗 어깨 위에 걸쳐 놓은 참룡도를 보았다.
‘드디어 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 참룡도란 도명에 걸맞은 놈을 잡았구나! 5년 걸렸다.’
[1022 LP 획득]
[생명 포인트 : 1022 LP]
남구가 기다란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곧바로 돌아섰다.
남구의 심장에 자리 잡았던 핵산의 기운이 텅 비었다.
하지만 곧장 예비 발전기가 돌아가듯 단전에 있던 핵산이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어제부로 오러와 마력의 구분에 의미가 없어졌다.
남구가 곧바로 핵산에 모든 생명 포인트를 쏟아 부었다.
[생명 포인트 : 0 LP]
[핵산 숙련도 : 94%]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어오르는 짙은 잿가루와 잿빛 흙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남구를 향해 1,000명의 우렁찬 환호성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와아아아아- 남구! 남구! 남구! 남구!
활력이 넘치는 이유는 과거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열렬한 응원과 환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핵산! 막강하군.’
하나로 융합한 핵산의 점검을 완벽하게 마쳤다.
위력도 두 배, 양도 두 배로 늘었다.
그렇게 쏘아 댔는데도 피로감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팀원들을 향하는 걸음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테미너가 쭉쭉 차올랐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네!’
재생력과 회복력은 남구의 신체 세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어버린 핵산이 급속도로 그 부피를 불리며 회복해 나갔다.
‘이건 뭐, 화수분이군. 끊임없이 샘솟는구나! 타이밍만 잘 조절하면 무한정 쓸 수 있겠는데? 장기전에서 나를 상대할만한 자가 과연 존재할까?’
예솔이 선두로 달려 나와 남구를 맞이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역류하는 거 아니야?”
어느 누구도 이처럼 숨 쉴 틈 없이 마력을 난사할 수는 없었다.
남구의 마력 고갈을 염려하는 예솔에게 남구가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예솔이 남구를 따라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핵산! 완성했구나?”
남구가 발걸음을 멈춤 없이 이어 나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솔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예솔의 뒤를 이어 뛰쳐나온 삼식이 둘의 대화를 듣고는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우헤헤헤헤!”
오크 특유의 긁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에 뒤따라 달려 나오던 팀원들의 미간이 꼬깃꼬깃 해졌다.
이제는 변성기가 지나 더욱 굵직해진 목소리를 발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결코 작지 않은 신장의 남구가 하늘 높이 올려다보며 끄덕였다.
오크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삼식의 육체는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오크에 불과했었다.
이제는 더욱 커져 부러질 듯 고개를 젖혀야 그 못생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양손 해머를 목과 어깨에 이고 길쭉한 봉에 양쪽 손목을 걸쳐 놓아서 뒤따라오는 팀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박영호가 삼식의 광야와 같은 등판에서 겨드랑이 쪽으로 얼굴을 쏙 내밀며 축하를 전했다.
“그토록 원하던 경지를 이루셨네요. 완성을 축하합니다. 대장!”
삼식의 등판에 가려져 최남단의 목소리만 들려 왔다.
“아따! 시상에, 쥑이네!”
삼식을 앞 찔러 나온 최남단이 만신창이가 되어 나뒹군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사채를 넘겨다보며 한껏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고야, 완저이 걸래 됐뿌다. 생긴기 문디 같아도 점마 마계 최고 몸빵 아이가? 인자 남구 니는 학실히 무적인 기라. 어데 상대가 있겠나?”
팽석수가 삼식의 옆으로 몸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럼 이제 계획대로······?”
수용소의 모든 인원이 참여하는 레이드 날에 맞추어 핵산의 완성에만 전념해온 남구가 굳세어진 눈빛을 반짝거리며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기가 느껴지는 남구의 얼굴을 보던 조무모가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이군요.”
남구가 딱딱하게 굳은 조무모에게 여태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쓱 웃어 보였다.
‘그래, 오늘이 디데이다.’
마중 나간 팀원들과 함께 다가오는 남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부장은 남구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박 부장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비장감이 서서히 드러났다.
박 부장의 앞으로 다가온 남구가 또렷한 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맞추었다.
남구는 가타부타 별말 없이 의지를 다지듯 굳건한 목소리로 단 한마디만 뱉었을 뿐이었다.
“건투를!”
박 부장의 사나운 눈동자도 이채를 반짝였다.
남구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곧 보세!”
굳건하게 마주 잡은 손을 풀자 박영호가 박 부장에게 다가섰다.
“아··· 버지! 몸조심하세요.”
박 부장이 박영호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넌 남구만 잘 따라다녀. 알았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남구는 오래간만에 이루어진 부자간의 상봉을, 그것도 순간의 짧은 만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발걸음을 돌려 도열한 공격대 인원들을 향해 걸었다.
그간 레이드를 거치며 여러 족속과 접하게 된 사람들은 극도로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지옥 한가운데 떨어졌다고 느꼈던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곳과 비교한다면 고트족의 형편은 그나마 양반 중의 양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또 보충되고 있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추앙해 마지않는 400개의 눈동자가 선두에 우뚝 선 남구에게 꽂혀 들었다.
오늘따라 그들의 눈빛이 결연했다.
앞에선 남구는 언제나 그렇듯이 굳게 입을 닫고 그저 침잠한 눈으로 결연한 눈빛의 사람들을 돌아볼 뿐이었다.
제라드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남구의 곁으로 다가왔다.
곧 양손을 마주 잡고 굽신거리며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남구 님의 실력을 이렇게 바로 옆에서 견지하게 되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하하!”
남구가 힐끗 돌아보고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또 보도록 하죠.”
제라드는 눈치가 빠른 인사는 아니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장차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으로 면밀하게 그려보던 남구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아, 정말 아쉽네요. 기회가 된다면 식사라도 나누면서······.”
“운이 좀 따르면 곧 보게 될지도.”
남구가 말을 잘랐다.
또 보고 싶다는 말로 해석한 제라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하하!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를 마친 박영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일행에 합류했다.
곧바로 남구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복귀한다.”
스르르릉- 창- 차앙-
복귀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부릅뜬 400명의 인원이 동시에 서슬 퍼런 무기를 꺼내 들었다.
화들짝 놀란 제라드는 얼이 빠져 멍한 얼굴이 됐다.
“아, 아니? 가는 마당에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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