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힘이 다가 아니야
“내가 낳을 아이도 저렇게 강해질까?”
“벌써 출산할 작정이니? 일단 살 생각부터 해!”
충고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뾰쪽했다.
“저 남자 머리도 좋은 거 같아. 상황 판단을 잘하더라.”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단숨에 몽땅 쓸어버리는 거 보고 정말 놀랐어.”
어깨에 화살이 박혔던 러시아 여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저 남자를 골랐다면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어느새 앙금이 풀렸는지 중동 여자가 위로를 전했다.
“좀 괜찮아?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데?”
“물 좀 마시고 싶어.”
중동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는 남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남구가 무심하게 툭 말을 뱉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어머! 네······.”
중동 여자가 러시아 여자에게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우리 얘기 다 듣고 있었나 봐!”
지나온 뒤쪽에서 벽과 천장에 붙어 있던 돌판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구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지네가 아니군.’
바퀴벌레와 흡사하게 생긴 곤충형 몬스터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바퀴벌레보다 수십 배는 더 커 보였다.
여자들이 너나없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으나 끅끅거리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어쩌지 못했다.
‘후유! 서두른 덕분에 저 징글징글 한 것들과 마주치지는 않았네.’
널따란 터널을 몽땅 뒤덮은 바퀴벌레 떼거리가 더듬이를 꼼지락거리며 피 냄새를 맡았다.
이내 활짝 열린 석실을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검은 물결을 출렁이며 대이동을 시작했다.
나뒹군 사체 위를 저 징그러운 것들이 빼꼭하게 뒤덮는 상상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드디어 새로운 석실에 도착했군.’
남구의 일행은 또다시 길게 이어지던 터널의 막장에 이르렀다.
전과 마찬가지로 육중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출입구 두 곳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출입구를 잘 못 고르면 여자에게 환장한 썩을 놈들과 또 마주칠 수밖에 없을 거야. 몬스터도 소환될 테고. 더 곤란한 건······.’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픈지 남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정비할 시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아. 먹는 건 그렇다 치고 잠은 잘 수 있을까?’
지하 터널 끝에 이르러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남구를 예솔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구의 고개는 우글우글 쏟아져 나오는 곤충형 몬스터를 향해 돌았다.
이곳에 서식하는 청소부들은 석벽이 열리자마자 피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몰려들었다.
일단 닫혀 있던 석벽이 열리면 떼로 몰려드는 청소부 탓에 눈곱만큼도 여유가 없었다.
‘소환된 몬스터를 처리하고 나면 저 벌레들 때문에 무조건 다음 석실로 이동해야만 해!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남구의 시선이 벌레 무리를 떠나 닫혀 있는 좌우 두 곳의 출입구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둘 중 뭘 선택해야 할지 알 수가 있나? 이대로 계속된다면 잘 시간도 먹을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고 고사할 거야! 몬스터가 소환되지 않는 안전지대를 꼭 확보해야 하는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남구가 지쳐 헐떡거리는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와 예솔이는 어떻게 참고 견딘다 치더라도 쟤들은 버티지 못할 거야.’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잘 쉬고 온 경쟁자들을 만난다면 점점 감당하기도 힘들어지겠지.’
남구가 예솔과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강하기만 하다고 생존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어. 선택을 잘해야 해! 안 그러면 말라 죽어.”
남구와 눈을 맞춘 예솔의 눈빛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남구야, 잠잘 시간은 있을까? 계속 이렇게 강행군을 할 수는 없어.”
예솔도 남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솔이 이어 말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아. 복불복이잖아. 운이 없으면 네 말대로 계속 싸우다가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남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와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걸릴 때까지 버티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소환되는 몬스터보다 또 경쟁자보다 강해야 하지만 힘만 세다고 다가 아니야. 운칠기삼인가? 벌써 하루는 족히 지났을 거야. 3연속 꽝이 나오려나?”
예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 곳의 출입구를 번갈아 돌아보며 불안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전지대가 있기는 한 걸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으니까 한쪽 문은 분명 안전지대로 이어질 거야. 이 빌어먹을 족속들도 무조건 사지로만 내몰진 않아. 시청률로 얻는 생명 에너지에 비하면 우리 목숨에 담긴 생명 에너지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
남구와 예솔이 의견을 교환할 때 여자들은 지친 몸을 벽면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석실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쉬었다 갔으면 좋겠어.”
“배낭이 너무 무거워! 다음에는 네가 좀 들어.”
“알았어! 바꿔가면서 들자.”
갈증과 허기를 견디지 못한 여자들이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수통을 꺼내 들고 돌려가며 마셨다.
“카아! 남자들은 어떻게 알고 물까지 챙겨 왔을까?”
“오기 전에 다 알았던 거 아니야?”
“배낭 없이 온 사람도 봤어.”
“그 남자는 탈수로 죽었을까?”
“에이,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걸?”
“다른 사람 죽이고 차지했을 수도 있지.”
“이 틈에 좀 먹자! 너무 배고파!”
“그래, 잠시만!”
중동 여자가 배낭 속에서 단단히 묶여 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개봉했다.
‘시체들이 풍기는 피 냄새가 훨씬 강하긴 할 테지만 저 냄새를 맡고 쫓아 올지도 모르겠군.’
남구는 생각과는 다르게 중동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하나씩 건네받은 해동된 게살 덩어리를 마치 주먹밥처럼 각자 손에 쥐고 허겁지겁 베어 물었다.
“하아! 맛있어!”
“녹으니까 더 맛있는 거 같아.”
“진짜 너무 배고팠어.”
“이제야 좀 살겠어.”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던 중동 여자가 비닐봉지 하나를 심각한 표정의 남구에게 건네며 말했다.
“좀 드세요. 먹어야 힘이 나죠.”
막 손을 내밀던 남구와 예솔의 눈빛이 번뜩이며 지나왔던 터널을 돌아다봤다.
피 냄새를 맡고 터널로 쏟아져 내린 거대 바퀴벌레 몬스터 무리 중 일부가 열려 있는 석실이 아닌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잠시 더듬이를 꼼지락거리더니 남구와 일행이 위치한 터널 끄트머리로 기어들기 시작했다.
시체가 가득한 석실로 향하는 무리와 남구의 일행 쪽으로 방향을 잡은 무리가 각각 나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널 바닥 전체를 빽빽하게 뒤덮어 나갔다.
‘지네 떼보다 더 많아.’
남구와 예솔의 시선이 부상당한 여자와 비닐봉지에서 꺼낸 게살로 동시에 향했다.
“남구야! 피 냄새 맡았나 봐! 몰려오고 있어.”
예솔의 다급한 목소리에 게살을 베어 물던 여자들이 급히 예솔을 쳐다봤다가 본능적으로 지나왔던 터널로 고개를 돌렸다.
“꺅!”
“버, 벌레다.”
“어쩌면 좋아. 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빠, 빨리! 빨리 석실로 들어가야 해!”
남구는 저 거대 바퀴벌레 몬스터의 특성에 대해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듯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
망토 안에서 푸르스름한 색상의 일렉트릭 리커브 보우를 뽑아 들며 구시렁댔다.
“좀처럼 쉴 틈을 안 주는군.”
물밀듯 밀려오는 떼거리 앞에서 달랑 화살 두 대만을 꺼내 들고 한 발을 시위에 걸었다.
거대 바퀴벌레 떼거리가 여섯 개의 다리를 미친 듯이 발발거리며 기어 오는 방향으로 활촉을 겨누었다.
남구가 쳐다보지도 않고 예솔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예솔이 석벽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이곳저곳에 주저앉아 게살을 이제 막 한 입 베어 물던 여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난리를 피워 댔다.
게살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수통을 엎지르며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여자들의 고막에 예솔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어서 배낭 챙겨서 이리 와!”
쿠구구구궁-
육중한 석벽이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열리는 석벽이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겨우 몸이 빠져나갈 만한 틈새가 벌어지자 먼저 몸을 집어넣고 그 좁은 틈바구니를 비비적거리는 여자도 있었다.
예솔의 청아한 목소리가 침착하게 터널에 울려 퍼졌다.
“아직 시간 있어. 천천히 차례대로 들어가.”
그러나 밀려나는 석벽에 다닥다닥 붙어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들의 다급한 몸짓은 변함없었다.
남구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행태에 입꼬리를 삐뚜름 비틀어 올렸다.
‘예솔이는 볼수록 매력이 터지는구만. 볼매야 볼매!’
손가락에 걸린 시위가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졌다.
끼이익-
시위에 걸린 화살에서 붉은 광채가 촉부터 활대 끝까지 길쭉하게 이어지며 어두침침한 터널에 그 막대 모양의 빛을 환히 밝혔다.
퉁- 쐐애애애액-
화살이 허공에 붉은빛의 띠를 곧게 그리며 날아가 선두의 대가리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퍽-
남구가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겼다.
당겨진 화살에서 뇌전이 번쩍거렸다.
파지지직-
사이키 조명이라도 돌아가는 듯 어둠과 빛이 순간순간마다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시위를 당기고 버틸수록 늘어나는 전격의 밝기와 부피에 터널 안은 더욱 빛과 어둠이 뒤섞여 광란을 일으켰다.
여자들의 다급한 움직임과 사이키 조명 같은 뇌전의 번쩍거림이 어우러지자 마치 클럽 안에서 정신 놓고 춤을 추는 듯한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뇌전이 풀차징을 이루자마자 시위를 떠났다.
쐐애애애애액-
붉은 광채를 발하는 화살 바로 옆에 꽂혀 들었다.
퍽- 파지지직-
이미 대가리를 정통으로 꿰뚫려 즉사한 거대 바퀴벌레의 몸뚱이에서 스파크가 휘몰아쳤다.
남구가 때를 같이하여 스킬 붉은 화살을 발동시켰다.
‘점화!’
꽈아앙-
거대 바퀴벌레가 화염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붉은 화살은 폭발의 범위가 그다지 넓은 스킬은 아니었지만 번쩍거리는 뇌전을 휘감은 파편 조각이 주위로 튀어 나가며 광범위한 공간에 불꽃을 퍼뜨렸다.
스파크와 함께 사방천지에 불꽃이 옮겨붙었다.
남구의 다음 스킬이 지체없이 이어졌다.
‘중력제어!’
거대 바퀴벌레 떼거리가 중력 제어의 영향력이 발휘된 지대로 속속 밀려들며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층층이 쌓여 나갔다.
거대 바퀴벌레 몬스터의 몸뚱이는 상당히 기름진 것이 특징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그것들의 몸뚱이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터널 바닥은 식용유를 골고루 두른 프라이팬처럼 흥건해졌다.
꼼지락거리며 바글바글 모여든 지대에 불길이 활활 번지기 시작했다.
거대 바퀴벌레들은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화염이 넘실거리기 시작한 중력 제어의 영역 안으로 밀려 들어와 옴짝달싹 못 하고 제 살을 불태웠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 텍스트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타닥타닥-
[2 LP 획득]
[4 LP 획득]
[1 LP 획득]
[3 LP 획득]
.
.
.
생명 포인트의 획득 메시지가 줄줄이 줄을 이음에 따라 고소한 냄새가 지하터널 전체로 점차 퍼져나갔다.
그 냄새에 석실로 부리나케 들어가던 여자들마저 코를 벌름거리며 돌아보았다.
돌아본 여자의 등판을 밀어버린 예솔이 맨 마지막으로 들어서며 남구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다 들어갔어. 이제 들어와!”
남구가 쭉 뻗어낸 팔을 내렸다.
과거, 먹을 것이 없어 저 흉물스러운 벌레를 구워 먹던 추억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징그러운 것들이 냄새 하나는 여전히 끝내주는구만.’
중력 제어가 해제되자 불덩이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발발거리며 기어들다가 바싹 불타 숯덩이가 되어 엎어지면 뒤에서 몰려들던 개체들이 바통을 이어받듯 불꽃을 이어받고 추월했다.
화염에 휩싸인 사체 위를 엎치락뒤치락 지나치며 골고루 불길을 나누어 갖고 집요하게 전진했다.
‘확실히 이상해! 누군가 갈라치기 한 듯 지네면 지네 바퀴벌레면 바퀴벌레 종류별로 딱딱 나뉘어서 출몰할 수는 없는 일이지.’
남구가 서둘러 석실 내부로 발을 들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인위적인 냄새가 나! 쉬지 못하게 복도마다 저런 것들을 종류별로 무더기로 배치해 둔 게 틀림없군.’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구의 등 뒤에서 육중한 석벽이 맷돌 가는 소음을 우렁차게 울리며 석실 입구를 봉쇄했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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