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패턴 빙벽
이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지네 떼가 꽤 넓은 폭의 터널 바닥에 물결치듯 넘실거리며 바글바글 들어찼다.
‘이런! 지나간 다음에 나오지 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셈이군.’
이제 곧 피 냄새를 쫓아 지네 떼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진행 방향에 있는 남구와 일행을 파도처럼 휩쓸어버릴 것이 자명했다.
남구가 황급히 뒤를 돌아다 봤다.
예솔의 활약에 힘입어 여자들이 바짝 접근해 있었다.
“뒤로 물러서!”
남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솔뿐이었다.
“알았어!”
쏟아져 나오는 지네 떼를 발견한 예솔이 그 소름 끼치는 광경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며 마체테를 치켜들었다.
다시 뒤쪽으로 후퇴하며 화살에 박혀 꿈틀거리는 지네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팍-
새롭게 등장한 지네 떼와의 정면충돌을 염두에 둔 예솔이 꿈틀거리는 것은 전부 쓸어버리겠다는 듯 가차 없이 마체테를 휘둘렀다.
팍- 팍- 파악-
꿈틀거리던 검은 몸체에서 반듯하게 뚝뚝 잘려 나간 빨간 대가리들이 흘러나온 진액과 함께 바닥에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신경이 살아 있어서인지 생명력이 끈질긴 것인지 시간이 지나도 꼼지락거리는 더듬이와 뻐끔거리는 주둥이는 멈출 줄 몰랐다.
대가리가 뎅겅뎅겅 떨어져 나가 무더기로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위질하듯 갈퀴 같은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에 여자들은 발목이라도 집힐까 봐 까치발을 들고 몸서리칠 뿐이었다.
예솔이 꿈틀거리는 지네들의 목을 차례차례 쳐나가며 치를 떠는 여자들을 데리고 서서히 뒤로 빠졌다.
여자들은 예솔의 뒤에서 발끝을 세우고 종종걸음을 치며 수두룩하게 잘려 나간 대가리를 비켜서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어수선한 주변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정신을 집중한 남구는 한쪽 팔을 쭉 뻗어내 들고 있었다.
손바닥이 가리킨 장소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광역 중력장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것들, 뚫린 벽면에서 기어 내려온 것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것들이 중력 제어가 작용하는 바닥에 납작하게 짜부라져 몸 전체가 뻥뻥 터져 나갔다.
꾸드득- 퍽- 퍽퍽- 퍼버벅- 퍼억-
[2 LP 획득]
[5 LP 획득]
[1 LP 획득]
[8 LP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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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한결같은 폭음을 발하며 껍데기만 남아 납작하게 압사했다.
‘언제까지 밀려들 거야?’
얼굴 왼편을 횡단하는 세 줄기의 발톱 자국 옆으로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망막에 떠오른 중력 게이지가 위험을 알려 오며 깜빡깜빡 점멸했다.
남구가 힐끔 뒤편을 돌아보았다.
예솔은 끈적한 진액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마체테를 늘어뜨리고 여자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저 정도 거리라면 쓸 만하겠어.’
중력제어를 해제하자마자 곧바로 땅을 박찼다.
훌쩍 물러난 남구가 참용도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한기파동에 시동을 걸었다.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 한기 서린 초승달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 품으며 둥둥 떠올랐다.
‘다시 충전할 짬이 없을 거야. 한방에 최대한 많이 없애야겠지!’
내용물이 모두 터져 나가 껍데기만 수북하게 깔린 바닥에 또 그만큼의 지네들이 기어들었다.
남구는 피 냄새를 쫓아 몰려드는 지네 떼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잠시 지켜보았다.
지네 한 마리가 무수한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선두로 튀어나왔다.
탁탁탁탁탁탁탁탁-
곧 남구의 발끝에 닿을 정도로 접근했다.
남구는 발끝까지 다가온 지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서 이동을 시작한 떼거리에 집중했다.
바닥 전체를 뒤덮은 떼거리를 향해 한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초승달 같은 참룡도를 하늘 높이 세워 들었다.
순간 남구의 체중이 앞으로 쏠렸다.
쿠웅- 퍼억-
강하게 내리밟은 발 구름에 발끝까지 기어 온 지네의 대가리가 짓눌려 터져 나갔다.
짜자자작-
뭉개진 돌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져나갔다.
파편과 함께 높이 뛰어오른 남구가 거대한 도신을 온몸의 탄력을 이용해 휘돌려 횡으로 뿌렸다.
한기파동이 대기를 가르며 수평으로 날아들었다.
쌔애애애애액-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광채가 일대를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꽈아아앙-
풀차징을 이룬 한기파동에 직격당한 지네 떼거리가 두 동강 난 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주위에 있던 개체들도 파동에 휩쓸려 무더기로 떠오르긴 마찬가지.
쩌저저저적-
일대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네가 출몰했던 구멍들마저 얼음이 꽉 들어차 막혀 버렸다.
‘호오! 구멍까지 죄다 틀어막았군.’
터널을 꽉 막아버린 투명한 빙벽 안에는 터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지네, 두 쪽으로 잘린 지네, 온전한 지네, 산산이 조각난 돌무더기가 한데 어우러져 시간이 멈춘 듯 예술 작품인 양 그 자태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한기파동의 위력에 절로 튀어나왔던 감탄성이 금방 탄식으로 바뀌었다.
‘아이씨! 빙벽이 너무 두꺼운데? 지나갈 수는 있으려나?’
터널이라는 특수한 공간 탓에 빠져나갈 곳 없던 한기가 두꺼운 빙벽을 형성해 버렸다.
깡- 깡깡깡- 까아앙-
남구는 참룡도로 곡괭이 질을 하듯 단단하게 얼어붙은 빙벽을 깨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우! 이런 젠장! 이 멋들어진 참룡도를 이런 용도로 쓰다니!’
까앙- 쩌저적-
가공할 힘으로 찍어 내리는 한방 한방에 산득한 냉기를 풀풀 날리며 꽝꽝 언 빙벽이 조각조각 쪼개져 나갔다.
커다란 바윗덩어리같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이 사방에 나뒹굴었다.
남구가 두꺼운 빙벽을 깨고 들어가면 예솔이 깨져나온 얼음덩어리들을 밖으로 치워냈다.
어느덧 터널 안을 쨍쨍하게 울리던 쇳소리가 멈추었다.
‘후유! 거의 다 뚫었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시간 개념이 날아가 버렸다.
배꼽시계만이 요란하게 알림을 울려댔다.
‘밥 먹을 짬은 있을까?’
빙벽에 갇혀 얼어붙은 지네 떼를 돌아봤다.
‘너흰 완전 청소부구만.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맞으니 뭘 먹기도 참 애매하군.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남구가 깊숙이 파고든 얼음 동굴의 끝에 다다라 빙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뚫을 만하겠어.’
몇 발짝 물러난 남구가 빙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어깨를 앞세워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콰앙-
몸통 박치기 한 번에 무수한 얼음덩어리들이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산산이 깨어져 반대편으로 터져 나갔다.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파편 조각과 함께 남구가 웅크린 어깨를 앞세우고 튀어나왔다.
터널 안에 또 다른 얼음 터널이 만들어졌다.
남구가 뻐근한 어깨를 휘돌리며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빙벽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말했다.
“건너와!”
여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얼음 동굴을 통과해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통과한 예솔이 어두침침한 터널 끝을 좁힌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희미하게 끝이 보여. 또 입구가 두 개려나?”
“일단 쟤들 화살 안 맞게 하는 게 우선이야. 네 뒤에 세워.”
“응, 알았어!”
‘지네가 또 출몰하면 피곤해!’
남구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인원이 많아 날아오는 화살도 많았다.
쒜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발하면 어김없이 남구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까만 눈동자가 광채를 반득이며 뙤록뙤록 구를 뿐이었지만 무수하게 날아오는 화살들은 곧바로 추진력을 잃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도착했어.”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앞에 두 개의 출입구가 문고리도 없는 육중한 석벽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전과 똑같군. 이 중 하나를 고르라는 얘긴데······. 잘 고르면 무사통과를 할 수 있기는 한 건가?’
한시름 돌린 여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지만,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환해진 표정은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예쁜 얼굴 하나하나에 불안감이 곧바로 엄습했다.
밝은 음성이었던 여자가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이, 이번에는 또 뭐가 나올까?”
냉동 게살과 얼음이 가득 들어찬 무거운 배낭을 둘러멘 중동 여자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집채만 한 게보다 더 큰 괴물이 나오지는 않겠지?”
중동 여자와 언쟁을 벌였던 푸른 눈의 러시아 여자가 피가 배어 나오는 어깨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흐윽! 좀 쉬었으면 좋겠어.”
현기증이 이는지 비틀거렸다.
휘청거리며 저도 모르게 석벽에 손을 짚었다.
쿠구구구궁-
손이 닿자마자 거친 소음을 발하며 육중한 석벽이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풀풀 날리는 먼지와 함께 예솔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여자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남구가 차분하게 망토 안쪽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서서히 열리는 석벽 틈 사이로 똑같은 규모의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자리해 있었다.
참룡도를 움켜쥐고 활짝 열린 석벽의 문틈으로 바짝 긴장한 두 사람을 살폈다.
‘남자 둘이라······. 저쪽은 서로 힘을 합친 모양이군.’
한 명은 우아한 형태로 구부러진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스틸 재질의 활을 팽팽하게 겨누었다.
남구가 익히 알고 있는 활이었다.
‘별 두 개짜리 전격 보우!’
나머지 한 명은 나무와 철재가 섞인 둥그런 원형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짧은 길이의 박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박도의 두툼한 도면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인첸트가 되어 있군.’
투박해 보이나 별이 붙은 명품일 수 있었다.
남구는 강한 적보다도 알지 못하는 적을 더 경계했다.
단순히 강도만 강화한 것일 수도 있었고 굉장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어떤 기능이 있으려나?’
힘을 합쳐 여기까지 생존해 온 두 솔로는 남구의 뒤편으로 한 무더기의 여자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한껏 경계심을 돋우고 긴장했던 두 남자의 표정에서 서서히 탐욕의 기색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채 남구의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예솔부터 찾았다.
“그 힘 센 언니 어디갔······.”
“조용히 해!”
희번덕한 눈빛과 함께 뱉어지는 위압적인 목소리에 꾹 입을 다물었다.
대신 석실 내부에 있던 자들이 입을 열었다.
“킥킥, 뭐해? 안 들어올 거야?”
“큭큭큭, 우리 한참 기다렸다고. 어서 들어와!”
‘뭐라 그러는 거야?’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활이나 좀 치우고 말해! 어디 무서워서 들어 가겠어?”
방패와 박도를 든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활을 든 남자는 깜짝 놀랐다.
“한국인이네? 나 한국말 할 줄 알아. k-드라마, k-pop 열혈 팬이었거든. 한국이 너무 좋아서 원어민 교사도 했었어. 이거 참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으니 반갑네, 반가워.”
‘발음 괜찮은데?’
“원어민 교사씩이나 했다면서 못 알아듣는 거야? 활 치우라고. 빗나가서 여자애들 맞으면 어쩔 거야?”
“아! 미안미안! 자, 어서 들어와.”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시위를 풀고 어서 오라는 듯 손바닥으로 안내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눈빛은 그 속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마치 손님을 접객하는 듯한 과장된 모습에 박도를 든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웃음은 전염되는 것일까?
박도를 든 남자가 웃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활을 든 남자도 따라 웃었다.
“킥킥킥!”
‘여자들을 차지할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니?’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부족한 글을 100화에 이르기까지 같이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일 없이 매일 쓰다 보니 이곳저곳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네요.
일주일만 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엄살 양해 부탁드리며 22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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