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유일한 살길
줄기줄기 찢어진 방패가 팔에서 벗어나 뱅글뱅글 돌아가며 허공을 날았다.
수철의 몸뚱이도 고스란히 떠안은 엄청난 위력에 핏방울을 흩날리며 곧장 날아갔다.
쿠웅-
벽에 처박혀 헛숨을 들이켰다.
“커억!”
피를 울컥 토하며 벽면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두 눈에 초점이 풀려 버렸다.
나뒹군 수철은 가쁜 숨만 몰아쉴 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남구가 의식 잃은 수철을 힐끔 돌아본 뒤 우두머리 크리처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고정했다.
크리처도 희번덕거리는 안구를 데구루루 굴려 남구의 싸늘한 시선을 맞받아쳤다.
당장 튀어 나갈 듯 길쭉한 몸뚱이를 잔뜩 웅크리고 남은 세 개의 다리를 바닥에 쑤셔 박았다.
‘쿨타임이······. 죽으란 법은 없군.’
기력을 쥐어짜네 간발의 차이로 활성화된 스킬을 펼쳤다.
뚫린 배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악다물었다.
‘점화!’
꽈앙-
한껏 웅크린 크리처의 거대한 몸뚱이가 폭발의 여파로 들썩였다.
곧바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캬아아아앙!”
바닥에 뒤집혀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막 건져진 활어처럼 온몸을 뒤틀면서 펄떡댔다.
덕분에 바닥과 벽, 천장 할 것 없이 사납게 할퀴어진 돌무더기가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남구는 활대 하나만 달랑 남은 빈손이었다.
화살집도 텅 비었다.
‘정말 마지막 수단이구나!’
활대를 무릎 오금에 끼어 구부리고 시위를 풀었다.
그대로 손잡이가 되는 활대의 한쪽 끝을 잡고 속에 숨어 있던 연검을 부드럽게 뽑아냈다.
딸깍- 차라라랑-
80cm의 번쩍이는 반사광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활대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차랑-
손목을 튕기자 흐느적거리던 검신이 빳빳하게 곧추섰다.
한 손으로 틀어막은 복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입과 코를 비롯해 전신의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왔지만 예리한 연검을 부여잡고 발광하는 괴수를 노려보는 남구의 싸늘한 눈빛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듯 보이는 이유는 검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투명한 아지랑이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힘을 모조리 쥐어 짜내 검에 내력을 주입하고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허벅지의 근육을 조였다.
당겨진 용수철처럼 바짝 긴장을 유지한 채 크리처의 미친 듯한 몸부림이 그치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우두머리 크리처의 끈질긴 생명력은 실로 대단했다.
치명상을 여러 군데 입었음에도 가슴팍에 불길이 잦아들자 천천히 일어섰다.
‘내버려 두어도 곧 죽겠군. 하지만 지체하다가는 나와 수철이도 뒈질 판이야. 미안하지만 네 놈이 후딱 죽어 줘야겠구나.’
남구의 높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점화!”
꽈앙-
뒤통수에 박아 넣은 화살의 붉은 기운이 여지없이 폭발했다.
속사로 인해 위력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크리처의 대가리가 깊숙하게 인사하듯 고개를 쭉 빼고 앞으로 쏠렸다.
불길이 치솟자 터져 나오려는 비명에 아가리가 짖어져라 벌어졌다.
잇몸과 이빨이 숨김없이 그 흉측한 자태를 드러냈다.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별안간 벽을 타고 뛰쳐 든 남구가 크리처의 시야를 벗어난 사각의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강직하게 뻗은 연검이 아지랑이를 뿌리며 수직으로 공기를 갈랐다.
쌔애애애액-
대가리를 길게 빼고 있는 목덜미를 벼락처럼 내리쳤다.
촤아아아아-
우두머리 크리처는 아가리를 한껏 벌렸으나 울부짖지 못했다.
폭포와 같이 뿜어지는 핏줄기 소리가 괴성을 대신했다.
잘려 나간 커다란 머리통이 바닥과 벽과 천장으로 정신없이 빙글빙글 핏줄기를 뿌려대며 잇따라 튕겨 나갔다.
아무도 해내지 못한 우두머리의 단단한 뼈를 끊어 냈지만, 검이 버티기는 무리였다.
내력을 한계까지 주입한 검신에 거미줄처럼 실금이 퍼져나갔다.
쩌저저적- 깡-
산산이 깨져 나가는 파편과 함께 머리 잃은 거대한 몸뚱이가 핏줄기를 쏟아내는 방향으로 서서히 거꾸러졌다.
쿠우웅-
“후우우우!”
남구가 길게 입김을 뿜으며 수철을 돌아봤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수철도 멀뚱하게 눈을 뜨고 남구를 바라봤다.
수철은 날카로운 갈고리발톱에 목이 움푹 패어 피를 분수처럼 뿜고 있었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틀어막아도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앞발을 정면으로 막아내기에는 방패가 너무나 가볍고 작았다.
선발대가 착용한 모든 장비는 기동성을 우선시한 대인용이었다.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남구는 빠르게 응급조치를 취해 나갔다.
신속하게 정비를 마치고 둘은 공동을 향해 서둘러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직 살길은 표식을 남기며 공동에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수철이 힘겨워했지만 부축은 사치였다.
수철보다 남구가 먼저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수철이 서서히 뒤처지기 시작했다.
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수철은 목살이 뭉텅이로 날아가 말을 못한다지만 남구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묵묵하게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멈춤 없이 걷기만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도 수철의 숨결이 막바지에 다다른 것도.
예상했던 일이 그저 예상대로 일어난 것뿐이었다.
“더, 더는······.”
목덜미에 치명상을 입은 친구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꺼낸 마지막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병장기를 놓치고 복도 바닥으로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챙그랑- 쿠웅-
종착지를 코앞에 두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남구를 제외한 선발대의 마지막 대원이 결국 죽었다.
혼자 남은 남구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었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이제껏 숱하게 일어난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아, 하아, 흐읍!”
거칠게 차오르는 호흡을 깊숙이 머금고 폐부가 쪼그라들 때까지 기다랗게 뿜어냈다.
“후우우우우우우우······.”
뿜어진 더운 숨결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둑한 복도 통로를 따라 담배 연기처럼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꼭 향을 피운 것 같구나!’
이내 아스라이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며 차디찬 복도 벽면에 곤한 몸을 기댔다.
그렇게 잠깐이라도 기대어 숨을 골랐다.
벽면은 비록 검은 빛깔이었지만 연마된 대리석같이 반질거려 흐릿하게나마 얼굴이 비치었다.
저도 모르게 벽면에 비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퀭하게 꺼진 두 눈으로 삭막한 인상의 사내가 자신을 똑같이 돌아보았다.
곧 내쉰 입김 뒤로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코가 닿을 듯 마주 본 매끈한 벽면에 뽀얀 입김이 어렸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기댄 벽면은 삽시간에 전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잔뜩 김이 서렸다.
산득한 벽면을 손바닥으로 슬며시 쓸어 보았다.
촉촉이 서린 김을 헤치고 붉은 핏자국이 붓질한 듯 길게 이어졌다.
‘비춰 보기는 영 글러 먹었군.’
피칠을 한 이 벽체만 넘으면 그토록 염원하던 공동이었다.
벽면과 마주한 어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벽체는 기댄 몸뚱이에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를 아낌없이 전해 주었다.
심장부인 공동으로 다가갈수록 에는 듯한 싸늘함은 더해만 갔다.
‘기온 때문인지, 기운 때문인지······.’
가열하는 싸늘함은 쌀쌀한 날씨 탓인지 공동에서부터 발생하는 가공할 기운 탓인지 분명치 않았다.
‘···아니면 원혼들의 한 때문일까?’
멸망 끝에 공동의 출입구를 비로소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내 입김이 마치 인류의 운명 같구나!’
충혈된 시선은 흐려진 입김에서 붉어진 벽면을 타고 미끄러져 문도 없이 뻥 뚫려 있는 공동의 출입구로 향했다.
공동으로 통하는 입구의 모서리까지 발소리를 죽여가며 다가가 몸을 바짝 붙였다.
올 테면 오라는 듯 그저 휑하게 뚫려있는 공동 내부를 빼꼼히 들여다봤다.
생명의 핵을 품은 공동의 규모는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광대하기 그지없었다.
지평선이 보일 듯 광활했다.
‘마침내 심장부다.’
뒤에서 들려오는 본진의 바쁜 발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를 상쇄시키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은성이가 살아 있나 보군!’
본진이 공동으로 오고 있다는 의미는 은성이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은성이 전사했다면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다들 그냥 그곳에서 편하게 죽으면 됐다.
‘다행히 표식을 잘 따라왔구나! 시간은 얼추 맞춘 셈인가? 이쯤 해서 들어가면 되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남구가 실핏줄이 불거진 눈으로 다시금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번득 발산하기 시작했다.
살촉에 혈흔과 살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살대를 시위에 걸었다.
공동 내부를 쏘아보며 시위를 힘껏 당겼다.
끼리릭-
속 빈 활대의 비명이 유난히 커다랗게 들려왔다.
문지기는 고사하고 문도 없이 그저 휑하게 뚫려있는 입구를 순식간에 돌아들며 지체 없이 진입했다.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이 공동의 가운데로 점점이 이어졌다.
남구는 비교적 상위의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첨병 역할을 주로 맡았다.
최전방에서 가장 먼저 적과 조우하는 것은 언제나 남구의 몫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크고 작은 상처를 무수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차돌처럼 단단한 신체 곳곳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막 진입한 이곳에 오감을 활짝 열어젖히고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숨어있을 위험을 찾아 좁힌 눈꺼풀 속에 서늘한 눈동자가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공동을 원형으로 둘러싼 검은색 벽체를 비롯해 검은색 바닥과 검은색 천장까지.
이곳 공동을 구성하는 매끈한 구조물은 온통 검었다.
그러나 조명 하나 없는 내부는 어둡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과시하듯 정중앙에 떠올라 오연히 굽어보는 구체는 푸른 광채를 줄기줄기 뿌려댔다.
‘저것뿐인가?’
핏빛 족적을 드넓은 바닥에 어지러이 찍어가며 아무리 둘러보아도 단 하나의 존재만이 감지됐다.
광활한 공동은 구체만을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구체를 생명의 핵이라 불렀다.
생명의 핵으로부터 발광한 빛무리는 광활한 내부 공간 전체를 가득 수놓은 각종 기하학적 형태의 기괴한 문양을 타고 맥동하듯 끊임없이 흘러 다녔다.
‘마치 심장에 이어진 핏줄 같구나!’
시간과 공간마저 넘나들 수 있는 전능한 능력.
각지에서 흡수한 생명 에너지를 궁극적으로 담아내고 또한 뿌려주는 심장.
이 세계를 관장하는 힘의 원천.
‘이 힘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갈망해 왔다.
가시밭길이었다.
만신창이가 됐을지언정 그래도 끝내 살아남아 기어이 핵 앞에 서 있었다.
핵은 살을 에고 몸을 짓누르는 기운을 끝없이 방출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적의 존재는 일절 감지되지 않았다.
‘크리처 무리가 마지막이었나? 하긴 이런 곳에 매복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지.’
확신한 남구는 팽팽한 활시위에 힘을 풀었다.
분주하게 번득거리던 눈동자에 어린 살기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시작이자 끝인 곳인가?’
척척척척-
머지않아 표식을 따라 진입하는 본진의 발소리가 텅 빈 공동 가득 울려 퍼졌다.
반갑다는 가당찮은 인사 따위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패잔병의 얼굴은 굳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 살아왔어도 이랬을까?’
모두가 생명의 핵 앞으로 모여 들었다.
쫓기듯 들어왔던 모습과는 다르게 다들 넋을 잃었다.
한결같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빛무리를 발하는 생명의 핵을 올려다보았다.
다급했던 발소리만이 여전히 귓전에 맴돌았다.
다들 압도적인 핵의 기운에 상처가 터지고 벌어져 후드득 핏물을 떨구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흠뻑 젖어 있었고 서 있는 바닥 또한 흥건했다.
“으윽!”
곳곳에서 고통에 겨운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남구는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누구 못지않게 온몸을 난자당한 남구에게 관심을 두는 자 또한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생명의 핵만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서로를 친구라 칭했으나 사전적 의미가 전부는 아니었다.
남구도 최근에는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지만 한번 굳어진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너무나 약골로 시작했기에 평생 업신여김을 당했다.
핵의 권능을 많이 받은 이는 강해졌고 그렇지 못한 이는 절대로 강해질 수 없었다.
힘이 약해 엄마 젖을 못 먹고, 못 먹어 또 약해지는 굴레를 깨기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었다.
부익부 빈익빈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시스템을 이식받은 이들에게 생명의 핵은 엄마 젖이었고 신과 다름없었다.
이곳 공동 한가운데 미동도 없이 떠올라 있는 전능한 존재를 모두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영접했다.
핵은 그 크기가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지름이 2m 남짓하군. 너도 나처럼 힘을 다 소모해서 이렇게 작아졌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담았다기에는 보잘것없이 작은 크기로 쪼그라들어버렸지만 그런데도 온몸의 피가 몽땅 쥐어짜여질 것만 같았다.
지금 시기가 아니었다면 공동의 근처에도 다가설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은 친구들의 영혼도 이 작은 핵 속에 뒤엉켜 응집해 있겠지? 아니면 벌써 어딘가로 뿌려졌을까?’
핵의 시스템은 제로섬 구조였다.
따라서 죽은 자의 생명 에너지는 소멸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거둔 대상과 생명의 핵으로 일정 비율 나뉘어 흘러가 버렸다.
시스템을 부여받은 모든 생명체는 목숨을 매개로 한 제로섬 게임에 내몰렸다.
출혈이 심한 탓일 것이다.
남구의 눈앞에 허상이 그려졌다.
생명 에너지로 화한 수철이 핵 안에서 꾸물거렸다.
“흐음!”
리더 은성의 깊은 탄식에 남구의 상념이 깨졌다.
은성은 침착하게 핵과의 교감을 진행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구의 표정이 밀려드는 통증에도 아이처럼 환해졌다.
‘드디어, 이제야, 결국에는 돌아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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