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D-1
칠흑같이 어두운 밤, 두 명의 발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저벅저벅-
별도 모두 숨어 버린 하늘을 이고 험준한 산등성이를 뻘뻘 땀을 흘리며 정찰하던 두 명의 마족 순찰병이 걷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섰다.
둘은 저 멀리 떨어진 산기슭 밑에서 생명 에너지의 광채로 화려하게 빛나는 으리으리한 마왕성을 아련하게 내려다보았다.
멧돼지 형상을 한 순찰병이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우리는 언제쯤 마왕성에 입성할 수 있을까?”
박쥐 형상을 한 순찰병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후유! 반란을 일으킨 남구 목이라도 쳐야 가능할걸?”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에 어이없다는 듯 멧돼지가 박쥐를 돌아보았다.
눈을 맞춘 멧돼지와 박쥐의 대화가 이어졌다.
“참 나! 남구 그놈 내가 제일 좋아하던 놈이었는데. 없는 살림에 선물까지 보냈었다고.”
“큭큭, 내 원픽은 예솔이야.”
“으흐흐, 고것이 예쁘긴 참 예쁘지?”
“큭큭, 목도 얼마나 잘 따는데.”
“어휴! 다 도망가버려서 이젠 볼 수도 없네!”
“아휴! 낙이 없어!”
대화를 멈춘 두 순찰병은 다시 멀찍이 마왕성을 내려다봤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멧돼지가 말했다.
“어차피 우린 이번 생애 마왕성에 입성하기는 글렀어. 봐서 뭐 할 거야? 속만 쓰리지! 어서 가자고.”
박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땀 식으니까 쌀쌀하구만.”
“맨날 이런 깊은 산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도 고역이야 고역! 아으, 다리 아파!”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뭐!”
“하다못해 제어구라도 좀 지급해 주지!”
“데스 게임에 다 투입되고 있잖아. 우리 같은 말단한테 주겠어?”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눅눅한 안개가 깔린 어둠 속에서 투명화 스킬이 해제된 남구의 모습이 스르륵 드러났다.
‘아우! 이걸 언제 다 그려?’
남구가 다시 손바닥을 베어냈다.
‘젠장! 글탄 마법진은 왜 피를 봐야만 하는 거야?’
험준한 산지에서 겨우 찾아낸 평평한 지대에 엄청나게 광대한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섞을! 또 피가 멈췄어!’
1,000%에 달하는 너무나 훌륭한 재생 능력 때문에 자꾸만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이번에는 깊고 기다랗게 팔뚝을 베어냈다.
“으으, 아파 죽겠네!”
*
목축지의 선제타격을 담당했던 팽석수의 기습공격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적중했다.
남구의 예상대로 그곳에 병력은 많지 않았다.
한적한 외곽에 뚝 떨어져 있었고 세리야인으로 이루어진 노예들만 즐비했다.
철저한 사전 계획하에 전광석화같이 움직이는 남구의 최정예 공격대를 주군을 잃고 명령체계 없이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이 막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큰 손실 없이 비교적 쉽게 고트족의 가고일 목축지에 모인 남구의 일행은 방목되다시피 길러지던 가고일 수백 마리를 타고 사전에 약속한 집결지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집결지는 빽빽한 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어구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야지였다.
그곳에서 몸을 숨기고 은성과 박 부장이 도착할 때까지 풍찬노숙하며 기다렸다.
갖은 고생 끝에 간신이 탈출에 성공한 은성과 박 부장의 그룹도 지상을 통해 집결지로 합류해 왔다.
두 그룹은 남구의 일행과는 형편이 매우 달랐다.
은성은 대단한 강자였지만 은성이 이끄는 그룹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오히려 박 부장이 이끄는 그룹이 더 피해가 적었다.
은성은 집결지의 지세가 방어와 도주에 안성맞춤이라며 베이스 캠프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의견을 타진했다.
집결지는 은성이 과거 반란을 시작했을 때 그렇게 사용했던 곳이었다.
반란 초창기에는 집결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나가며 근근이 버텼었다.
덕분에 각 족속에 묶여 있는 인류를 해방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었다.
그때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남구는 글탄 가문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상속받은 몸.
굳이 이곳저곳 피해다기고 숨어다닐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 지난한 저항은 모두 스킵하고 은성과 박 부장이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데려와 글탄 가문의 영지에 터를 잡았다.
남구의 일행이 가장 숫자도 많았고 물자도 많았으며 여기까지 모인 것도 다 남구의 계획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꼼짝없이 성에 갇혀 고사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가 많았지만, 반란의 시발점이자 주역인 남구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모두 글탄족의 성채로 입성했다.
몰락한 글탄 가문의 성은 폐허 그 자체였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군데군데 정비를 하고는 있었으나 광범위한 영역을 재건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전쟁의 화마가 정통으로 훑고 지난 자리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방치된 결과 파고든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부서진 잔해와 먼지를 치워내는 것 정도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야지에서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찬 이슬을 먹고 숨어지내는 것보다는 이런 부서진 벽과 천장이라도 있는 것이 나았다.
남구는 성채 깊숙한 곳에 고트족에서 가져온 메인 제어구를 들여놓았다.
메인 제어구에 생명 포인트를 투자해 오직 적습에 대비한 성벽만 기존보다 더욱 보강해 나갔다.
생명 에너지를 흡수한 제어구는 벽체에 갈라진 틈들을 메워나가며 성벽을 기존보다 더욱더 견고하고 높게 세웠다.
제어구를 통해 영지 전체를 말끔하게 정비할 수도 있었지만 남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벽의 보강처럼 당장 필요한 곳에만 포인트를 투자했다.
생명 포인트만 투자한다면 시스템이 관장하는 세상에서 불가능이란 없었다.
이런 전능한 힘이 작용하는 곳이 바로 시스템의 본산 마계였다.
사람들은 생명 에너지가 부족해 영지를 깔끔하게 정비하지 않는다고 짐작했지만 남구는 마계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생명 포인트가 넘쳐났다.
단지 사람들의 복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남구는 성벽처럼 필수불가결한 방어 수단과 피복류나 침구류, 식기류 등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최소 단위의 생필품만을 소환해 왔다.
오로지 이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지을 방법만을 고민했다.
남은 인생 중 보다 많은 시간을 꿈꾸던 대로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남은 인생이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모적인 전쟁으로 점점 깎여나가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너무나 많은 피를 보며 숨 쉴 틈 없이 투쟁하며 살아왔다.
육체는 혈기 왕성한 20대 후반이었으나 정신은 피곤에 지친 뇌회한 노인과도 다를 바 없었다.
글탄족의 성채에는 무수히 많은 마계의 족속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고 모여들었다.
남구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마계의 족속들을 습격해 나아가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족속 전체와 전면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수용소만 기습 타격하여 사람들을 빼내 왔다.
가슴에 낙인찍힌 각 족속의 문양이 사라진 자리에는 날카롭게 쪼개진 바위가 둥둥 떠 있는 글탄족의 문양이 새롭게 새겨졌다.
이로써 글탄족의 소속으로 다른 족속의 영향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족속이 더는 멋대로 소환할 수 없었다.
마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주민등록증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된 모든 사람은 남구로부터 제어구를 운용할 권리까지 부여받았다.
제어구에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던 사람들은 이제 제어구를 띄워 올려 주변에 적들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어구의 운영 권한을 획득한 사람들은 글탄족의 영지 내에서 마법진을 비롯해 각종 기능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게 가능해졌다.
인간으로 구성된 하나의 족속이 마계에 새로이 탄생한 것이다.
비록 1,000명밖에 안 되는 미약한 시작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벽히 다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 무너져가는 성채에 딸린 대회의실에 비장하면서도 굳은 표정의 여러 사람이 큰 테이블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아 있었다.
각기 소속된 족속에서 우두머리로 군림했던 자들이었다.
남구는 그들의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여 공격대 대장이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그들로 하여금 같은 소속이었던 사람들을 관리하게 했다.
극비사항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전회의도 공격대 대장들과 함께 구상했다.
회의실 여기저기 금이 간 벽체에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왔다.
털북숭이 남자가 한기가 드는지 털이 곤두선 팔뚝을 쓸어가며 목청을 높였다.
“결전의 날이 바로 내일인데 총사령관은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예솔이 힐끔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극비 임무 수행 중이에요.”
과거에도 이 시기까지 생존했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몇몇 합류해 있었다.
남구와 은성과 예솔의 고등학교 동창 수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철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루 전인데 인제 와서 무슨 임무를······.”
예솔이 반듯한 미간에 날을 세웠다.
“그걸 여기서 말하면 그게 극비니?”
예솔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수철은 찍소리도 못하고 괜한 헛기침만 발했다.
“크흠!”
털북숭이 남자가 또다시 구시렁거렸다.
“사전 협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우리가 허깨빕니까?”
“총사령관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배신자잖아요.”
수철과 비슷한 시기에 합류한 승아의 한마디에 연신 투덜거리던 털북숭이 남자도 입을 닫고 말았다.
얼마 전 마족에게 포섭된 자로 인해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모두가 남구에게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데스 게임에서 꽤나 여유롭게 생존해 가며 특별 대우받던 강자 중에서는 괜한 전쟁을 일으켜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기는 예도 없지 않았다.
수철이 승아를 보고 물었다.
“승아야! 남구가 뭐 하는지 너는 알고 있지?”
승아와 수철은 역사가 오래된 친우라 할 수 있었지만, 승아는 입을 닫고 먼 곳을 보며 모르는 척했다.
수철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동창 승아는 과거 은성의 오른팔이자 반란을 가능케 한 핵심 요소인 핵산1의 주인이었다.
남구에게 선수를 뺏겨 핵산1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 대단한 검사로 성장해 있었으며 더군다나 여자의 몸으로 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소속 족속에게서 탈출해 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여자 중에서는 유일한 공격 대장인 승아는 남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머리가 비상해 남구가 작전을 계획할 때 항상 곁에 두는 인원이었다.
보급부대를 총괄하는 세리야인의 대표 베르게르는 회의 내내 근심과 걱정이 가득 들어찬 얼굴이었다.
목축지에서 군용 가고일을 관리하던 나이 많은 노인이었지만 젊었을 적 대귀족의 집사로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글탄족의 보급을 담당했다.
세리야인들은 주로 소속된 족속에서 식자재 관리와 시설 관리, 부상자 관리 등 데스 게임에 투입되는 인원들의 뒤를 봐주며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베르게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끄응! 전 병력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이번 작전에 총사령관님께서 개인 전투식량만 휴대하기 편하게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보급선이 확보된 것도 아니고 정말 걱정입니다.”
불만이 많은 털북숭이 남자가 이때다 싶어 또 목청을 높였다.
“이번 작전은 무리야! 준비가 너무 부족해! 남구 이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털북숭이 남자보다 훨씬 높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무엄하오!”
베드로가 벌떡 일어서며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목을 칠 것처럼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테이블에서 몸을 젖혔다.
“하이고! 와 그라노? 그라지 말고 앉으이소. 대장군!”
기겁한 최남단이 칼자루를 말아쥔 베드로의 손목을 허겁지겁 붙잡았다.
베드로는 정말 목을 쳐버리고도 남을 인사였다.
베드로가 화를 삭이듯 볼을 푸들거리며 말을 짓씹어 뱉었다.
“으으음! 한 번만 더 주군께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인다면 내 그 입을 찢어버릴 것이오.”
“헉!”
털북숭이 남자는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그간 수많은 전투를 같이 겪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수염이 허옇게 난 늙은이였지만 남구의 옆에 꼭 붙어 엄청난 무위를 발휘하며 닥치는 대로 가차 없이 적의 목을 숭덩숭덩 잘라내던 피도 눈물도 없는 오리지널 마족이었다.
베드로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자이자 선대 주군의 유언을 받들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세리야 대륙으로 남은 군사를 이끌고 몸을 피했던 글탄족의 대장군이었다.
베드로는 같은 마족이지만 마티나처럼 경박하지 않았다.
온몸에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철철 넘쳤고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군인답지 않게 세련되고 고상한 품위가 있었다.
아무리 고상한 면모가 있는 베드로였지만 주군을 모욕하는 언사는 참을 수 없었다.
남구는 평생을 기다려온 주인이었다.
멀고 먼 타지의 행성에서 선대 주군을 지키지 못한 오욕을 날마다 뼈에 새기며 복수의 칼만을 갈아오던 베드로 앞에 홀연히 남구가 나타났었다.
선대 주군이 재림한 듯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남구는 글탄족의 패잔병을 찾아내 모두 소환하여 휘하에 두었다.
기어이 지구의 인간과 세리야인들과 마계의 족속이 모두 한데 어우러진 다행성 다문화 족속을 만들어 냈다.
지금에 이르러 남구가 세운 글탄족은 침입하는 여러 족속의 군사들을 족족 박살 내는 그야말로 대 군세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참! 베드로 할아버지. 성질 좀 죽이세요. 저 밖에까지 다 들려요.”
느닷없이 들려온 남구의 목소리에 베드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군!”
쿠웅-
소리 소문도 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갑자기 등장한 남구의 모습에 베드로와 몇몇 글탄족 출신 장교들이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말아쥔 주먹을 얹었다.
남구가 비틀린 입술을 빙긋거리며 피딱지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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