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노다지
모든 여자의 시선이 온몸이 뒤엉켜 모랫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진 거구의 은성과 탈진한 여자들을 내려다보는 사이 예솔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했다.
은성이 결계에 도착하자마자 남구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8자를 그리듯 두 마리의 가랑이 사이를 바짝 붙어 번갈아 스쳐 지나던 남구가 지체 없이 결계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주위를 왔다 갔다 오가며 회피 기동을 펼친 탓에 자기들끼리 뿜은 불줄기에 서로 화상을 입어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들의 상태도 멀쩡하지 못했다.
바닥을 향해 뿜어댄 불줄기 때문에 주로 다리가 녹아내렸다.
돌덩이같이 단단했던 거죽이 흐물흐물 흘러내려 빨갛게 익어버린 살덩이와 마구 엉겨 붙었다.
그런 상처 부위에는 어김없이 살대가 무수히 꽂혀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살가죽 위로 다량의 핏물이 뭉클뭉클 배어 나왔다.
남구를 쫓아 밟아대는 발 구름에 상처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남구의 머리 위로 거대한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질 때마다 수면에 바윗덩이가 떨어지듯 모래사장에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남구의 전후좌우로 떨어진 핏물과 엉겨 붙은 모래가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떨어지는 핏방울을 한 방울이라도 맞는다면 장난삼아 뱉은 타액에 갇힌 개미 꼴이 날 것이다.
‘화염이 다시 충전되기 전에 결계에 들어가야 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발바닥과 핏방울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게이지의 바닥까지 치달은 중력을 박박 긁어모아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몸뚱이에 적용했다.
‘중력 제어!’
끼에에에에엑-
목덜미의 거죽을 우산처럼 활짝 펼친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삽시간에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튀어 나간 자리에 곧바로 두꺼운 발바닥이 광범위하게 들이쳤다.
쿠아앙-
지진이 인 듯 흔들리는 지축에 휘청거리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날랜 두 개의 뒷다리를 발발거리며 기울어진 중심을 바로 잡고 멈춤 없이 달려 나갔다.
속도의 변화와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지축을 뒤흔들며 쿵쿵 밟아대는 발 구름을 간발의 차로 벗어났다.
게이지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중력을 쥐어짜느라 오래간만에 남구의 눈코입에서 하염없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마다 지축은 흔들려 댔고 무리한 스킬 사용으로 속이 매슥매슥 뒤틀렸다.
현기증이 걷잡을 수 없이 들이닥쳤다.
형광등의 불빛처럼 의식이 깜빡깜빡 나갔다 들어왔다.
어른거리는 시야에 투명한 결계의 장막이 아지랑이처럼 흔들흔들 비쳐 보였다.
‘정신방벽!’
이대로라면 짓밟혀 쥐포가 될지 모른다는 부정적 기운을 불굴의 의지가 한순간에 날려 버리고 내재한 잠재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깜박거리는 의식이 또렷해지며 흐릿했던 시야에 초점이 잡혀 나갔다.
중력의 기운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퍼 올렸다.
‘중력제어!’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잔상을 남기며 빛살처럼 쏘아졌다.
바람에 실린 핏방울을 얼굴 양옆으로 기다랗게 흩날리며 뚜렷하게 보이는 결계의 투명한 장막에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동시에 꾸역꾸역 모아오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불줄기가 한껏 열어젖힌 아가리에서 뻗어 나왔다.
화르르르르르르-
“꺅!”
“으아악!”
“히익!”
“엄마!”
뿜어진 불줄기가 둥그런 돔의 벽면 가득 휘몰아쳤다.
뒤로 발라당 나뒹굴어진 여자들이 화등잔만 하게 부릅뜬 눈으로 결계의 한쪽 면을 온통 뒤덮은 불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모랫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은성만이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남구를 올려다보았다.
남구의 내부에서 핵산의 기운이 맹렬하게 휘돌았다.
500%나 증폭된 신체 재생능력에 파괴되었던 세포 하나하나가 새싹이 돋아나듯 급격하게 새로 깨어났다.
상승한 내구력과 회복력과 지구력이 다 무너져가던 신체 균형을 서서히 잡아 나갔다.
바람에 날린 핏방울 자국이 줄기줄기 그어진 창백한 얼굴에서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착-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등 위에서 남구가 훌쩍 뛰어내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으아! 죽다 살았네!”
남구의 진심이 담긴 한껏 과장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으아! 내가 목숨 걸고 돕지 않았으면 정말 다 죽을 뻔했어.”
은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은성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남구의 공치사가 계속되었다.
“으아! 저 불줄기 좀 봐! 진짜 뜨겁겠다. 불에 타 죽는 게 제일 아프대!”
모두의 고개가 여전히 화염을 꿋꿋이 받아 내는 결계의 장막으로 향했다.
남구에게 속한 여자들이 이내 고개를 돌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달려와 목청을 높였다.
“왜 그렇게 무모하게 굴어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잖아요?”
“우리까지 다 죽일 셈이에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어휴! 진짜 자칫 잘못했으면 여기서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할 뻔했어.”
남구는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틀어 올리며 웃고 있었다.
‘그래, 더 윽박질러라! 좀 더 잔소리해! 지금은 은성이에게 마음의 짐을 팍팍 지워야 할 때야. 누가 눈물 좀 흘리지 않으련?’
예솔이 생수통을 들이밀었다.
십년감수한 여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모여든 틈 사이로 불쑥 페트병이 튀어나왔다.
받아 든 남구가 고개를 한껏 젖히며 CF 광고라도 찍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으아! 열기에 목구멍이 다 타들어 가는 줄 알았어!”
남구의 과장되고 어설픈 연기에 안위를 걱정한 여자들만 더욱 난리를 피웠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진짜 죽어 버리는지 알았다고요.”
정작 은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네 욕심 때문에 몬스터한테 물려간 여자라도 생각하는 거니?’
은성의 성품을 미루어 보았을 때 꽤 오랜 시간 자책할 만한 사건이었다.
침통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던 은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곧 아직까지 헐떡거리며 쓰러져 있던 여자들을 수습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인원들이 축 늘어진 동료를 부축해 들었다.
은성이 남구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마워!”
남구가 지나치려는 은성의 굵은 팔뚝을 붙잡았다.
돌아보는 은성의 귓가에 피 칠갑을 한 얼굴을 들이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속삭이며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였다.
은성의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일렁였다.
이내 몸을 돌린 남구가 덤덤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가자!”
부릅뜬 수직 동공으로 결계 안을 들여다보는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에게 남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등을 보이며 넓은 보폭으로 모래사장을 사박사박 밟아 나갔다.
“우리 먼저 갈게.”
남구가 등 뒤에 있는 은성에게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빠르게 발걸음을 놀리며 해당 포탈 근처로 다가서는 남구를 쫓아 여자들이 헐레벌떡 뛰었다.
남구가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차례차례 들어오면 돼.”
말을 하면서도 남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은은하게 떠오른 빛무리 안으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들어섰다.
휘몰아친 광휘와 함께 남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파악-
“헉, 같이 가!”
같이 가자고 부르짖는 터키 여자의 음성이 남구가 아크리 섬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눈이 멀듯 한 광휘가 휘몰아쳤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남구가 공간 이동의 여파로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생각했다.
‘모두를 소환하기에는 1호실은 너무 비좁았을 테지.’
대규모 인원이 공격대를 형성해서 떠날 때는 각자의 수용실에서 출발하지만,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할 때는 어김없이 이곳으로 전송되었다.
이곳은 야광석의 수량이 턱없이 모자라 항상 어두컴컴했다.
처음 마계로 끌려 왔을 때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곳은 소환실이었다.
코가 꿰어 남구의 손아귀에 고삐를 틀어 잡힌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기절해 있었다.
휘몰아치는 광휘와 함께 예솔이 등장했다.
예솔과 그녀가 타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도 마찬가지로 의식 없이 누워있었다.
이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들도 모두 같은 상태였다.
‘곧 낙인찍히겠군.’
소속 낙인이 없는 자는 의식을 잃는 시스템이었다.
공간과 차원을 넘어온 적의 습격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의식을 잃은 여자들의 얼굴이 그간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내려다보던 남구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무 달성을 축하합니다]
[총 10마리의 암컷을 획득하였습니다]
‘말본새하고는.’
[5,000 LP와 황금 룰렛 이용권 100매가 지급되었습니다]
‘하! 노났군. 여자를 10명이나 데리고 올지 누가 알았겠어.’
[5,000 LP 획득]
[생명 포인트 : 25,146 LP]
‘5,000 LP도 짭짤하지만, 이용권이 100매라! 그것도 황금 룰렛 이용권! 더는 가죽을 기운다든지 뼈다귀를 갈아 댈 필요가 없겠군.’
반평생을 하루가 멀다고 데스 게임에 투입되었었지만 이렇게 많은, 게다가 이렇게 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르르르르르-
굉음과 함께 남구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파도가 인 듯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진폭으로 진동이 이어졌다.
건물이 붕괴할 만한 강진이었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진동은 멈추지 않고 한동안 계속되었다.
수용소 내부에서 이런 강력한 진동이 장시간 지속되는 경우를 딱 한 번 보았었다.
은성이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기 직전 이런 현상이 똑같이 벌어졌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진동이 멈추자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호화 교배실이 제공되었습니다]
‘하! 그래, 여기 있는 동안 잘 쓰도록 하마!’
시스템 메시지가 끝도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선착순 1등에게 히든 보상이 주어집니다]
‘으흐흐, 내 그럴 줄 알았지!’
남구는 뜻한 계획을 전할 의도로 은성이 포탈로 향하는 걸음을 제지했었다.
하지만 먼저 포탈에 발을 담가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족속과 공동 미션에 투입될 때는 경쟁심을 부추기려는 조치로 언제나 히든 보상이 주어졌다.
미션 완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족속, 또는 제일 빨리 지정된 장소에 도착한 족속 등으로 선별하여 보상을 지급했다.
공격대를 형성할 때는 같은 족속의 소속 내에서도 최대 대미지를 쌓은 딜러라거나 최대 피해를 입은 탱커라거나 최대 피해를 치료한 힐러라거나 각종 이유로 히든 보상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런 사실은 한 번만 참여하면 모두가 알게 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렇게 주어지는 히든 보상은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 때문에 남구처럼 병약하여 애초에 포기한 인원을 제외한다면 공격대가 형성될 때만큼은 많은 사람이 히든 보상만을 바라보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최선을 다해 임무에 임했었다.
무모하게 움직여 사상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은성이 1등이었다.
그 히든 보상마저 모두 싹쓸이해 갔었다.
알고 보면 이 모든 보상이 생명의 핵에 더욱 많은 생명 에너지를 보급하기 위한 얄팍한 조치들이었지만 사람들은 유혹을 절대로 떨치지 못했다.
특별히 히든 보상은 경쟁심을 고취하기 위해 소속 인원들이 모두 모여 똑똑히 다 볼 수 있는 소환실에서 해산하기 전에 진행됐었다.
또한 룰렛 따위도 필요 없었다.
[히든 보상은 이 자리에서 바로 지급됩니다]
‘그래, 좋아!’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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