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크리 아일랜드
[지하 미로에서 탈출한 것을 환영합니다]
모두의 망막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남구의 망막에서는 떠오른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텍스트가 지워졌다.
도록도록 구르는 까만 눈동자가 수풀 사이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몬스터의 모습을 분주히 쫓았다.
‘환영 인사 한번 거창하게 하는구만!’
[포탈은 해안가 모래사장에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세요. 참가자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마찬가지로 떠오른 텍스트를 순식간에 날려 버린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주변의 지형지물을 면밀하게 살폈다.
‘이벤트를 아크리 섬에서 진행하고 있었군.’
마계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마왕의 휴가처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떠드는 관리자의 입을 통해 간혹 들었었다.
다채로운 식생과 몬스터가 분포하여 데스 게임의 스테이지로 곧잘 활용되던 곳이었다.
직관을 선호하는 마왕 때문이라는 말도 왕왕 들려 왔었다.
‘여기는······. 섬 꼭대기쯤 되겠는데? 한참을 가야겠구나!’
이 섬은 해안선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깎아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남구는 모래사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른 애들 고생 좀 하겠군. 모래사장을 찾아 헤매다가 골로 갈 수도 있겠는데?’
주변의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여기 사는 애들, 좀 사나운 편인데 말이지!’
아크리 섬은 대형 육식 몬스터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4에어리어에 속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탓에 독자적으로 진화한 동식물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들의 독특한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5에어리어에서 활개 치던 강자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스테이지였다.
거대 지하 미로를 탈출했다고 다가 아니었다.
이곳은 섬이지만 거대한 규모의 땅덩어리에 방대하게 정글 지대가 펼쳐져 있는 지역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모래사장으로 뚝딱 갈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못 되었다.
터널에서 나와서도 먹을거리와 잘 곳을 마련해야 했다.
이곳저곳에 도사리는 독초와 독충, 다양한 몬스터에 시도 때도 없이 노려질 것이다.
남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풀숲 사이에서 먹잇감을 살피는 몬스터에 잔뜩 긴장한 여자들이 남구의 뒤통수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중독에서 회복하지 못해 아직 들것에 실려 있던 태국 여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 우리 잡아먹으려나 봐!”
혼잣말인 듯 자국어로 말했지만 남구는 다 알아들었다.
녹색 안개에서 살아남은 두 여자는 공교롭게도 모두 동양인이었다.
똑같이 들것에 실려 있던 일본 여자도 몸을 떨며 일본말을 내뱉었다.
“으으, 살고 싶어!”
‘먹잇감이 된 기분은 정말 더럽지!’
남구가 다시 흔들리는 수풀로 고개를 돌리며 관광 가이드처럼 브리핑했다.
“지금 침 흘리는 쟤네들은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라고 해! 사람보다 조금 더 큰 덩치니까 드래곤 치고는 아주 작은 축에 속하지.”
화들짝 놀란 러시아 여자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구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드, 드래곤?”
“이름은 드래곤인데 내 생각에는 그냥 지능 높은 파충류 같아.”
남구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쳐다보며 주의하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단체로 행동하는 아주 영리하고 노련한 사냥꾼들이지.”
빈자리에서 예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조심할게.”
“일단 나서지 말고 가만있어 봐!”
“응!”
남구가 말을 마치자 울상인 터키 여자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도 터널 안에서는 안전지대라도 있었는데 여긴 도처에 몬스터가 깔렸어요. 우, 우리 살 수 있을까요?”
“풋, 모르지! 내가 신도 아닌데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겠어.”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남구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우거진 수풀에서 남구의 일행을 탐색하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목둘레의 거죽을 우산처럼 활짝 펼치고 뾰쪽뾰쪽한 날카로운 이빨을 한껏 드러낸 채 강인한 두 다리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운명은 모르지만 그래도 맛있는 게 어디 있는지는 알지! 있다가 먹게 해줄게. 여기 그런 거 많거든. 솔직히 이제 감자 지겹잖아?”
쐐쐐쐐쐐애애액-
삽시간에 허공을 뒤덮은 무수한 화살이 정확하게 머리와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버버버버버벅-
목도리 스몰 드래곤들은 달려들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채 흙먼지와 뜯긴 잎새를 흩날리며 바닥을 쓸었다.
선두로 사냥에 나섰던 개체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나뒹굴었다.
살대에는 붉은 광채도 푸른 뇌전도 일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강철 화살촉이 뇌와 심장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한 개체에 화살 한 발, 그거면 족했다.
뒤를 이어 달려 나오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멈추어 섰다.
곧바로 몸을 돌려 튀어나왔던 수풀 사이로 다시 뛰어들었다.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내빼다가 굵직한 나무 기둥에 대가리를 처박는 개체도 보였다.
이내 풀잎 스치는 소리마저 잦아든 이곳은 요란하게 지저귀던 새들조차 주둥이를 닫아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한순간에 끝나버린 전장을 한 바퀴 쓱 훑어보던 남구가 손을 뻗었다.
굵은 나무에 대가리를 처박고 나뒹굴었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이제 막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바닥에 질질 끌려 남구에게 당겨졌다.
끼에에엑-
동료에게 도움이라도 구하려는 듯 목청껏 울부짖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모두 달아나버린 수풀 너머에서는 잎새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빡-
남구의 발등이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대가리를 걷어찼다.
찢어져라 꽥꽥 울부짖던 소리가 뚝 끊겼다.
잠시 기절했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구에게 고대를 돌려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후우웅- 빠악-
등에 차고 있던 참룡도의 널찍한 도면으로 머리 꼭대기를 찍어버렸다.
또다시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이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여자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왜 저러고 있지?”
“그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봐!”
“이건 학대 수준이야!”
예솔에게 전해 들어 이제는 모두가 남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터키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렇게 사나워 보여도 역시 남구한테는 그냥 도마뱀일 뿐이었어.”
얼마간 기계적으로 계속 반복되던 일이 끝을 맺었다.
표정이 가관이었던 여자들의 얼굴에 다른 차원의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흠씬 두들겨 맞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어느 순간부터 고분고분해졌다.
“고장 난 TV랑 목도리 스몰 드래곤은 맞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지!”
예솔이 모습을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한국말이라 예솔만 알아들었다.
코를 뚫고 로프를 목과 코에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던 예솔이 물어왔다.
“길들인 거야?”
남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도리 스몰 드래곤들이 사라진 수풀과 들것을 내려놓고 줄지어 선 여자들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흐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죽을 수도······.’
들것을 짊어지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긴 여정을 도보로 할 것인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비바크 없이 목적지로 직행할 것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고민하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남구의 입술이 곧장 열렸다.
“여기 길이 험해서 환자들 들것에 싣고 다니기 힘들 거야. 갈 길도 먼데 싣고 다니면 시간이 너무 지체될 테고 그럼 위험에 노출될 일도 더 많아지겠지?”
“그렇구나! 아픈 애들도 탈 수 있을까? 배가 땅에 거의 붙어 있어서 탈만 할 것 같기도 하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은 먹이를 사냥하거나 위험에 노출됐을 때만 두 다리로 일어섰고 평소에는 네 다리로 걸어 다녔다.
“얘들이 이래 보여도 말보다 승차감 좋아! 덩치가 작아서 초보자도 쉽게 탈 수 있지. 그다지 떨어질 일도 없겠지만 낙마하더라도 덜 다칠 거야.”
예솔이 당장에라도 타보고 싶다는 얼굴로 들떠 말했다.
“이거 타고 다니면 얘들보다 작은 몬스터는 아예 덤빌 생각을 안 할 것 같은데?”
“후후, 그렇지! 그만큼 목적지에 일찍 도착할 수 있어. 역시 배운 애들은 달라. 공부 잘한 티가 나는구나?”
“나, 고졸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중퇴지. 너랑 똑같이.”
“크흠! 깐깐하기는, 있다가 태워 줄게.”
“쿡쿡, 너무 잘 됐다.”
“애들 잘 지키고 있어 봐! 금방 다녀올 테니까.”
막상 남구가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하니 밝았던 예솔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위험이 따르더라도 지를 때는 질러야지!’
남구가 돌돌 말린 로프 꾸러미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목도리 스몰 드레곤의 등짝에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우차! 마중까지 나와 줬는데 답례는 해 줘야지. 안 그래도 얘들 찾아 다니려고 했거든, 아주 잘됐어.”
‘숨은그림찾기!’
남구의 망막에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발자국이 이동 경로를 따라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서둘러야겠군.’
퍽-
뒤꿈치가 옆구리를 강렬하게 찍었다.
네 발로 얌전하게 서 있던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갑자기 두 발로 벌떡 일어섰다.
끼에에에엑-
귀청이 찢어져라 울부짖으며 굵다란 뒷발로 땅을 박찼다.
일어선 두 다리를 쏜살같이 놀리며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굵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스쳐 지나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넋을 잃은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들의 고개가 모두 예솔에게 향했다.
남구가 사라진 이 시점에 자신들을 지켜줄 유일한 사람은 예솔이란 것을 구태여 떠올리지 않았어도 몸은 본능에 따라 그렇게 움직였다.
“남구가 빨리 와야 할 텐데,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어.”
예솔의 이야기에 여자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언제나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여태 남구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주인 잃은 강아지같이 여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예솔만이 가는 선들이 복잡하게 새겨진 투박한 박도를 꺼내 들고 한껏 힘을 준 눈으로 주의를 경계했다.
두려움과 긴장에 잠긴 여자들의 눈동자도 쉴 새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동안 고요한 가운데 꼴깍꼴깍 침 넘어가는 소만 들렸다.
예솔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흙바닥에 수두룩하게 널려있는 사체를 탐하는 포식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소형 몬스터들은 여자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사체를 조심조심 뜯어 먹었다.
곧 고개를 바짝 세우고 한곳을 바라보고는 부리나케 도주했다.
조금 더 덩치 큰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표범과도 흡사한 모습의 몬스터가 잠시 사체에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안광이 번뜩이는 고개를 들어 여자들을 주시했다.
송곳니가 길쭉하게 자라난 아가리를 끌어올리며 목젖을 긁어 댔다.
그르르르르-
예솔은 몸을 숨기지도 못한 채 침만 꿀꺽 삼켰다.
예솔의 특기는 선제공격에 있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여태 혼자 살아왔기에 누군가를 지켜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었지만, 여자들이 줄지어 선 저 넓은 범위를 과연 모두 아울러 커버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온통 검은색 털에 뒤덮인 몬스터가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껏 자세를 낮추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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