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천사 강림
‘진정 사람인가?’
남구의 눈앞에 천사가 강림했다.
‘햐아! 이 많은 예쁜 언니들 중에서도 가히 군계일학이구만.’
각진 곳 하나 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새하얀 동안의 얼굴에서 동양적 아름다움이 뿜뿜 뿜어져 나왔다.
‘상당히 어려 보이네? 아직 미성년자 같은데?’
반짝반짝 영롱한 눈망울이 후드를 눌러쓴 남구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짙은 속눈썹이 길게 자라난 쌍꺼풀이 좀 더 자세히 보겠다는 듯 그 귀여운 아이라인을 깜빡거렸다.
‘야, 얼굴 뚫어지겠다. 한국인?’
일본인일 수도 중국인일 수도 몽골인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한국 사람인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대충 묶인 흑단 같은 머릿결이 적당히 헝클어져 다가오는 걸음마다 찰랑찰랑 출렁였다.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몸매에서 생동감이 물씬 풍겼다.
아기같이 뽀얀 얼굴은 앳되기 그지없었으나 육체는 이미 다 자란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오!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강해 보이는 남자들을 정신없이 물색하는 다른 여자들하고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저 자신감은 여기 있는 남자들 못지 않군.’
차분한 태도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거침없이 남구에게 다가왔다.
‘운동 좀 했나 보지? 탄력이 넘치는구나! LP 꽤나 투자한 몸인데?’
깊은 굴곡을 그리는 육체는 탄탄해 보였으나 부드러운 유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전 세계에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여 있는 듯한 이곳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여자가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이르렀다.
평소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거리.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일정한 높낮이의 따뜻한 숨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똥거리는 맑은 눈동자가 그늘진 후드 속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니?’
코앞에 다가와 한참을 올려다보던 고개가 무슨 연유인지 끄덕거렸다.
작고 앙증맞은 입꼬리를 스르륵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미소가 너무 치명적인데?’
까치발을 하고는 곧바로 그 앙증맞은 빨간 입술을 포개왔다.
쪽-
숱한 미인계를 겪어봤던 돌덩이 같은 심장이 널뛰듯 쿵덕거렸다.
남구는 첫 키스를 데스 게임의 일환으로 하고 말았다.
‘참나! 이렇게 첫 키스를 하나?’
[암컷 소유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암컷 보유 현황 : 1 / 50]
“나, 첫키스야!”
‘이 목소리는? 설마, 찐빵?’
남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을 부릅뜨고 찐빵과 동명이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쿡쿡, 그래, 나야!”
‘이, 이건! 예솔이 목소리가 확실해!’
남구는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니? 그 많던 살이? 살 빠졌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작달막했던 키가 1년 사이에 대체 몇 센티나 큰 거야?’
촉촉한 입술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너 땅 밑에서 나오는 거 보고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어. 아마 나도 지금 너랑 똑같은 표정이었을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풍랑이 인 듯 흔들리던 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본연의 빛을 띠었다.
흘러나오는 남구의 목소리는 언제 놀랐냐는 듯 담담했다.
“은성이랑 헤어졌어? 여태까지 지구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거야?”
남구만큼이나 칠흑 같은 까만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머리카락만큼이나 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빛을 띠고 힐끗 은성을 돌아봤다.
“저기 은성이도 예쁜 언니들하고 같이 있네? 쟤도 날 못 알아보나 보다. 그렇게 몰라보겠어? 나 좀 예뻐졌나?”
‘그걸 말이라고 하니? 환골탈태라도 한 것 같다.’
남구가 재촉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얘기해봐!”
예솔의 말간 눈동자가 눈웃음을 흘리며 반달처럼 휘어졌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네! 그때 학교 매점에서 너랑 헤어지고 나서 은성이 하고도 며칠 같이하지 못했어. 거의 바로 헤어졌다고 봐야지?”
남구의 놀란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아니, 왜?”
“너 떠난 뒤에 매점에 있던 너희 반 애들 거의 다 떠났었어. 은성이가 남은 친구들 몇 명 데리고 학교에 숨어 있던 애들 무사히 구했었지.”
‘음, 그랬겠지!’
“3일 정도 매점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왔었거든. 다해서 한 40명 정도 됐을 거야.”
‘과거보다 빨리 나왔네? 인원도 많이 줄었고.’
“거기까진 좋았어. 왜, 너도 알지? 우리 동네 장사 잘되던 할인마트.”
‘헉! 설마?’
“그 마트 근처를 지나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바글바글하더라고. 굶주린 사람들이 못 참고 마트에 몰려들었던 거 같아. 마트 입구에서 밀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었지!”
‘하!’
“사람들이 그 난리를 치는데 좀비가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좀비 떼가 엄청나게 몰려드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근처에 있던 크리처까지 달려들어서 은성이 혼자 그 많은 애들을 도저히 보호할 수가 없었어.”
‘이런 게 나비 효과인가? 나 때문에 미래가 완전히 뒤틀려 버렸군.’
“좀비랑 크리처한테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애들은 도망치느라 다 뿔뿔이 흩어졌었지. 그때 나도 은성이랑 헤어져서 지금 처음 보는 거야.”
‘하! 일이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대견하다는 듯 남구의 목소리에 감탄이 섞여 나왔다.
“그런데도 용케 살아남았구나!”
“나한테는 은둔이 있잖아. 네 덕분에 살아남은 거야.”
“고생 꽤나 한 것 같네?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어.”
“강제 다이어트 좀 했지! 굽는 게 일상다반사니까.”
예솔은 외모만큼이나 태도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의 그 예솔이 아니었다.
차분한 태도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같아 보였다.
예솔이 결계 너머를 넘겨다보며 물었다.
“근데 여긴 어디야? 혹시 알아? 여자애들 울고 물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도 넌 한번 경험해 봤다고 태연하네?”
“태연은 무슨! 나도 까무러치게 놀랐었지. 메시지가 뜨기 전까지는 또 육체 쟁탈전에 들어온 줄 알았어. 하루 정도 지나서 적응한 거야.”
“하루? 하루나 지났어?”
“응!”
남구가 곧바로 배낭에서 페트병을 꺼내며 말했다.
“육체 쟁탈전하고 그다지 다를 것도 없어. 서로 죽고 죽이고 난리가 벌어질 거야. 자! 일단 물부터 마셔!”
“정말?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겠네?”
물통을 건네받은 예솔이 조금씩 물을 넘겼다.
“캬! 휴우! 살겠다.”
물을 다 마신 예솔이 말을 이었다.
“나도 너 보고 배워서 이것저것 잘 챙겨 다녔었거든. 근데 이곳에 몸뚱이만 달랑 소환됐어. 힘겹게 모은 것들인데 아깝네! 여기 어디냐니까?”
“마계!”
예솔이 물통에 마개를 닫고 남구에게 내밀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받아 들고는 다시 배낭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니, 그 마개 말고······.”
쿠구구구궁-
남자들이 잠시 머물렀던 지하 벙커와 똑같은 방식으로 근처 땅 밑에서 출입구들이 열렸다.
50개나 되는 석벽이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열리고 있었다.
네모반듯한 석벽들이 땅 위로 삐쭉삐쭉 솟았다.
열린 틈으로 길게 이어지는 지하 터널의 모습이 약간이나마 들여다보였다.
‘땅 밑에 미로라도 있는 건가? 입구가 왜 이렇게 많아?’
[10분 뒤 보호 결계가 사라집니다. 9분 59초··· 9분 58초······.]
시스템 메시지를 힐끔거리던 예솔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구가 50개니까 50팀이 각자 따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네?”
“역시 시스템은 불친절해!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별말이 없군. 따로 가든 뭉쳐 가든 알아서 하라는 의미겠지!”
예솔을 데리고 열린 입구 중 한 곳으로 다가섰다.
입구를 기웃거리던 남구가 각각의 족속을 상징하는 문양을 발견했다.
짧게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지나 열린 석벽 너머로 손을 집어넣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혀 손이 튕겨 나왔다.
“어? 편 먹고 뭉쳐서 갈 수는 없게 해놨군. 각자 따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야. 문양이 다르면 입구를 통과하지 못해!”
문양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예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멀거니 남구를 바라봤다.
“저 문양이 가문을 상징해! 각자 소속 가문 문양이 새겨진 곳으로만 출입이 허락되나 봐! 우린 양 대가리 문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양 대가리?”
“응, 여기 있는 남자들은 왼쪽 가슴에 낙인이 찍혀 있거든. 소속 가문의 문양 모양으로.”
“너도?”
“응! 나도.”
남구가 산양의 머리 문양이 새겨진 출입구를 찾아 이동하며 주변을 훑었다.
쫓아 걷는 예솔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짝은 다 지어졌네! 여자애들이 몇몇 남자한테만 몰려서 짝없는 남자가 꽤 많네? 18명이나 솔로야!”
‘인원수를 순식간에 파악하는군.’
남구가 열린 입구를 하나씩 확인하며 예솔에게 정보를 풀었다.
“혼자인 놈들이 공격해 올 거야. 짝없이 이곳에 남겨지면 결국 죽게 되거든.”
“아, 그래?”
“짝이 있어도 더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덤빌 수도 있어.”
“음, 그렇구나! 여기 그냥 남아 있다가는 짝없는 남자들한테 당할 수도 있겠는데?”
“아마도 그렇겠지? 결계가 걷히기 전에 터널 입구로 진입해야 저기 늑대 무리처럼 뭉쳐 있는 솔로들을 피할 수 있겠지.”
“네 말 대로 진짜 육체 쟁탈전하고 다를 것도 없구나!”
“이놈의 족속들은 언제나 죽음을 독려하지. 생명체의 죽음이 곧 동력원이니까.”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는 50개나 되었고 상당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소속 가문의 문양을 찾아 한참을 헤매야 했다.
남구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여자들은 어떤 미션을 받은 거야?”
“남자 잘 골라 포탈에 무사히 도착하래!”
“그게 다야?”
“선택한 수컷이 죽으면 보상이 깎인다든지, 강한 수컷의 씨를 받아 종족을 보존하라든지, 새끼를 하나 낳을 때마다 보상해 준다든지,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 몇 개 더 있어. 뭐, 핵심은 강한 수컷을 골라 생존하라는 거야.”
‘맞아! 예전 은성이가 데려온 여자들도 데스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특실에서 맨날 빈둥거렸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 이 여자들은 완전히 다른 용도의 노예로구만.’
예솔이 남자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다들 강해 보인다.”
“저 중에 누가 제일 세 보여?”
“너!”
예솔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지!”
“뭐, 그럴 수도? 하지만 너처럼 강한 사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어.”
“예솔아! 너도 이제 신체 스텟 잘 안 오르지?”
“응! 처음에는 쭉쭉 올랐었는데 이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상향 평준화가 될 거야.”
‘쓰레기 같던 내 원래 몸으로도 결국 끝에 가서는 어떻게든 강자들을 상대하고는 했으니까.’
예솔이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겠네! 스킬이나 신체 능력치나 모두 한계에 다다를 테니까.”
남구가 예솔을 힐끔 돌아보았다.
“지금 신체 능력 한 40 스텟 정도 됐으려나?”
“어! 맞아! 잘도 알아맞히네?”
“어마어마하게 사냥하고 다녔구만?”
“쿡쿡, 기습에 달인이 됐지!”
예솔의 미소에 따라 남구도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60 스텟까지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40 스텟에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평균적으로 인류는 맥시멈 50 스텟이야.”
“그래? LP를 들이부어도 더는 안 올라?”
“백만 LP 씩 쏟아부어서 1 스텟 오르면 차라리 다른데 투자하는 게 낫겠지?”
“그야 그렇지! 나 스킬이나 신체 능력이나 더 이상 잘 오르지 않아. 완전히 정체 중이야.”
“원래 40 스텟쯤 되면 다 그래. 너 스킬, 은둔 하나뿐이지?”
“응!”
“걱정하지 마! 앞으로 LP 쓸 일 많아질 테니까.”
“그래?”
“물론이지! 그동안 은둔 하나로 잘도 버텨 왔네!”
“나한테는 정말 목숨줄 같은 스킬이야. 은둔 없었으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걸? 예쁜 좀비가 됐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예쁜 백골이 됐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재잘거리던 예솔의 목소리가 딱 멈추었다.
지하로 통하는 터널 입구에 새겨진 뿔이 뒤로 돌돌 말린 산양의 머리 문양을 발견하고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거 양 대가리다. 맞지?”
남구가 어두침침한 입구 안을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아우, 드디어 찾았네!”
남구가 예솔을 돌아다봤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으로 묻는 듯했다.
‘저 음침한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각오가 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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