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노다지 시즌2
묵묵부답인 채 목덜미만 더욱 조여가는 남구에게 마티나는 차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후의 제안까지 꺼내 들었다.
“나랑 결혼할래?”
열등한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구는 어딘가 달랐다.
출처는 알 수 없었으나 남구의 육체는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월등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한 남구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기고 기회를 봐서 죽어버려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사랑엔 국경이 없다지만 염소랑 결혼하는 건 좀 그렇지 않겠니?’
마티나를 쏘아보던 남구의 눈동자가 반뜩였다.
그대로 뒤로 날아간 마티나가 진열장에 처박혔다.
콰앙-
산산조각이 난 진열장 안으로 파묻힌 마티나의 입에서 핏덩이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커억!”
고트족 씩이나 되는 가문의 가보라는 말에 남구의 호기심이 동했다.
고트족의 수장 다리우스가 착용한 황금색 흉갑처럼 앞으로의 전투에 유용한 물건이 될 수도 있었다.
남구의 비틀린 입술이 열렸다.
“가보?”
뒤에서 목덜미를 틀어 잡힌 다리우스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뒤집힌 눈도 감겨 있었다.
꿇어 앉았던 몸뚱이가 번쩍 들려 남구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제는 부들거리던 발작마저 멈추었다.
마티나가 처박힌 벽면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가, 가보 내줄게. 살, 살려줘!”
마티나의 몸을 옥죄던 중력제어가 말끔히 사라짐과 동시에 남구의 입이 열렸다.
“내놔!”
“아빠도 놔 줘!”
집무실 밖에서는 밀려드는 마족의 군사들과 남구의 일행이 격전을 벌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한가하게 협상이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닌 남구가 곧바로 팔을 풀었다.
교차한 두 팔을 놓자 다리우스의 몸뚱이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털썩 떨어져 내렸다.
온몸의 뼈란 뼈는 죄다 으스러져 촉수 다발까지 축 늘어뜨린 사신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남구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워 꼼짝도 못 하는 사신을 비틀비틀 지나친 마티나가 집무실의 한쪽 벽면 앞에 섰다.
‘저곳은 메인 제어구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인데?’
마티나가 손바닥을 대자 인식 과정을 마친 두껍고 육중한 벽체가 열렸다.
쿠구구구궁-
메인 제어구는 대량 생산용 일반 제어구보다는 조금 더 컸다.
수박만 한 크기의 메인 제어구가 열린 공간 중앙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옆으로 여러 종류의 무기류와 장구류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받침대에 받쳐져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벽체를 열어젖힌 마티나가 남구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마티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꿈틀거렸다.
가보만큼이나 아끼고 항상 몸에 착용하고 다니던 제 아비의 흉갑을 어느새 남구가 입고 있었다.
남구의 만족스러운 얼굴이 더 꼴 보기 싫었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낙인이 지워진 남구를 통제할 수단이 현재로서는 전혀 없었다.
집무실에 딸린 석실 내부로 발을 들인 마티나가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1m 10cm 길이의 한 손용 곡도를 가지고 나왔다.
곧바로 남구에게 던지며 입을 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우리 가문의 가보야.”
받아든 남구가 칼자루를 잡았다.
칼자루의 끝 부분 힐트에는 손에서 빠지지 않도록 산양의 머리 모양을 한 쇠붙이가 달려 있었다.
가보라고 하기에는 평범한 검은색 가죽 도집에서 완만한 곡선으로 유려하게 휘어진 곡도를 뽑아냈다.
스르르르릉-
한쪽 면만 날이 있는 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날붙이 끝 부분에는 칼등까지 날을 세워 놓았다.
‘베기 위주에 찌르기도 가능한 전천후 도검이군.’
얄팍한 도신에는 마법을 새겨넣은 복잡한 선들이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스킬을 발동하자 날붙이에 인챈트된 선상을 따라 푸른 전류가 흘렀다.
[라이트닝 세이버 ★★★★★ : 완전무결하여 칼날이 상하지 않음. 뇌전 스킬 발동 시 접하는 모든 것을 감전시켜 일정 시간 동안 움직임을 제한함]
‘내구력 100%란 얘기구만. 모든 것에 통하는 뇌전 스킬이라! 막는다고 하더라도 감전된 몸에 후속타가 여지없이 들어가겠군.’
뒷발을 밀어제치는 간단한 동작에 남구의 몸이 순간적으로 튀어 나갔다.
마티나를 지나쳐 석실 안으로 들어와 메인 제어구의 앞까지 삽시에 당도했다.
세이버의 휘어진 날붙이에 휘도는 푸른 뇌전으로 인해 묻은 핏물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마티나의 몸에는 푸른 뇌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았던 전류가 사라진 직후.
텅-
뿔 달린 무거운 머리가 곧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곧 머리 없는 몸뚱이도 내려앉았다.
털썩-
[103,489,906 LP 획득]
[생명 포인트 103,489,906 LP]
시스템 메시지를 쳐다보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헉! 1억!”
화들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이 곧바로 싸늘해졌다.
이제 막 호흡이 터지기 시작한 고트족의 수장 다리우스에게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번개같이 향했다.
노려본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넌 얼마나 갖고 있으려나?’
번들거리던 눈동자에 중력제어의 광채가 반뜩였다.
다리우스의 흐느적거리는 몸뚱이가 목이 잘려 쓰러져 있는 마티나를 지나쳐 남구의 코앞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촤아아악-
황금색 흉갑이 벗겨진 다리우스는 속절없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메인 제어구의 좌우로 브이 자의 핏자국을 남기며 계속 굴러 나갔다.
다리우스의 상·하체가 각각 벽면에 부딪혀 멈추었을 때 세이버의 날붙이를 휘감았던 뇌전의 기운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손목을 따라 한 바퀴를 휘돈 세이버가 핏자국 하나 없이 곧장 왼손에 들려 있는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스르르르릉- 탁-
남구는 브이 자를 그리는 핏줄기의 꼭짓점에서 벼락을 맞은 듯 우뚝 멈추어 꼼작도 하지 못했다.
[1,054,249,013 LP 획득]
[생명 포인트 1,157,738,919 LP]
‘10억!’
남구가 침을 꼴깍 삼켰다.
평생 이렇게 많은 생명 에너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가장 많이 모아봤을 때가 2만 LP였다.
4년 전 아크리 아일랜드에서 10명의 여자와 함께 복귀하며 로또를 터뜨렸을 때, 딱 그때 한 번이었다.
‘반란 자금으로 고맙게 쓰마!’
남구가 양옆으로 뻗어나간 붉은 브이 자의 꼭짓점에서 그대로 뒤돌아섰다.
세이버의 칼집을 전투 벨트에 달아매며 코앞에 위치한 메인 제어구를 올려다보았다.
‘마계에 가문 하나 만들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구체에서 곧바로 반응이 일었다.
[신규 계정 등록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마계의 족속들에게 아무렇게나 소환당하지 않으려면 마계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시스템에 제어 당하는 처지에서 시스템을 제어하는 위치로 올라서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메인 제어구가 반드시 필요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메인 제어구는 의외의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이미 존재하는 계정이 있습니다. 휴면 계정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지? 설마!’
잠시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남구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후후, 아니! 휴면 계정 복구해줘!’
[휴면 계정을 복구합니다. 제한된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정말 몸뚱이 하나는 잘 골랐어.’
[아도니수스 드 르 글탄 님의 휴면 계정이 복구되었습니다]
‘이 육체의 이름인 모양이군.’
[선대 가주가 사망하였습니다. 후계자 상속 절차를 진행하겠습니까?]
휴면 계정이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보았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어서 진행하자고.’
[글탄 가문의 모든 권한을 이양받았습니다]
[20,241,346,957 LP 획득]
[생명 포인트 : 21,399,085,876 LP]
[절차에 따라 선대 가주가 메인 제어구에 이체한 영지 운영 포인트가 상속되었습니다]
‘응? 이게 얼마야? 200억? 생명 포인트가 200억이라고?’
“후우우우우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어냈다.
‘글탄족의 선대 가주가 제 죽음과 가문의 몰락을 예감하고 미리 손을 쓴 모양이지?’
남구가 몸을 돌려세웠다.
뼈마디가 몽땅 으스러져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는 촉수가 달린 남자의 귓가에 뚜벅거리는 남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곧 비밀의 석실에서 집무실로 나온 발걸음이 멈추었다.
촉수가 달린 남자의 머리맡까지 다가온 남구가 새로 얻은 고트족의 가보 라이트닝 세이버의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 무시무시한 세이버가 뽑히자마자 촉수가 달린 남자의 목이 달아나리란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괜히 멀고 먼 이국만리 고트족의 영토까지 와서 참혹한 봉변을 당하고 있는 촉수의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정보, 귀한 정보를 알려 줄게. 살려줘!”
칼자루를 잡은 남구가 뽑지 않고 대신 입을 열었다.
“어떤 정보?”
어찌 된 영문인지 남구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것을 넘어 마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촉수의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비췄다.
“사, 살려 준다고 약속해!”
“정보의 질을 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촉수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으으, 마티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야. 고트족은 후계자까지 잃었어.”
말을 멈춘 촉수의 남자가 정말 살려 줄 것인지 울상으로 남구의 눈치를 살폈다.
“바쁜 사람 불러 세워 놓고 뭐 하는 거야? 빨리 말 안 해?”
스르르르릉-
으스스한 검음을 울리며 세이버가 뽑혔다.
“헉! 자, 잠깐만!”
촉수의 남자가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으으, 가문 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감정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런 건 곁가지에 불과해! 결국 영지 포인트 때문에 일어나지!”
촉수의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헉헉! 이런 전쟁이 참혹한 이유가 있어. 상속자들을 몽땅 죽여야 전쟁이 끝나. 가문의 씨를 말리는 거야!”
‘음, 그래서 글탄족이 작살난 건가?’
남구가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정말 잔혹하군.”
촉수의 남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구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으으, 빌어먹을 놈! 그게 네 입에서 나올 소리냐? 너야말로 잔인무도한 놈이야!’
생각을 깨부수는 스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너! 자꾸 엉뚱한 얘기 할래? 그래서 그 정보라는 게 뭐야?”
휙- 크아악!
남구의 손짓에 촉수 하나가 날아갔다.
촉수가 잘려 나가자 말이 더욱 빨라졌다.
“크윽! 생명 에너지는 제로섬 구조라 사라지지 않아. 자기를 몽땅 흡수할 대상을 반드시 찾지! 상속받을 후계자가 없으면 수장을 죽인 자가 영지 운영 포인트를 전부 차지할 수 있어. 고트족의 후계자는 무남독녀 마티나 하나뿐이야.”
“오호라! 그럼 내가 고트족의 생명 포인트를 몰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 맞아! 고트족은 근래 들어 생명 에너지를 쓸어 담고 있었어. 그 양이 상당할 거야! 어때 이 정도면 내 목숨값으로 차고 넘치지 않아?”
남구가 메인 제어구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브이자 라인의 꼭짓점에 선 남구가 제어구를 노려보았다.
‘고트족 생명 에너지 내놔!’
[정당한 정복자에게 고트족의 영지 운영 포인트를 이체합니다]
[1,250,648,779,216 LP 획득]
[생명 포인트 : 1,272,047,865,092 LP]
남구가 눈을 깜빡거렸다.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하고 있었다.
‘1조 2천억? 반올림하면 1조 3천억?’
[고트족으로부터 고트족의 정복자이자 글탄족의 수장 아도니수스 드 르 글탄 님에게 이체를 완료하였습니다]
쩍 벌어진 입에서 감탄성도 나오지 않았다.
힘겹게 맞서 싸우고 있을 일행의 걱정도 잠시 날아갔다.
마족이야말로 대가리만 쳐내면 그 가문에 속한 족속은 생명 에너지가 날아가 버려 고사해 버리는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잠시 멍해졌던 고개를 털었다.
‘이 정도면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을 모두 소환하고도 남지 않을까? 행성에 모든 인구가 이사해도 될만한 양이 아닐까?’
[지구의 인간을 모두 소환하시겠습니까?]
‘하! 가능하긴 한가 보구만.’
[소환 지점을 지정하십시오]
‘됐어! 뭔 헛소리를.’
남구가 왼손을 쭉 뻗었다.
‘넌 나랑 갈 데가 있다. 잔말 말고 내 손아귀에나 들어와라.’
둥둥 떠 있던 수박만 한 메인 제어구가 남구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농구공을 한 손에 붙잡듯이 메인 제어구를 한 손만으로 움켜쥐었다.
저벅저벅-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비밀의 석실을 벗어나는 남구의 발걸음을 따라 메인 제어구가 무릎 언저리에서 흔들흔들 흔들렸다.
촉수가 달린 남자의 머리맡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촉수의 남자가 밀려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어때? 꽤 많지 않았어? 고트족이 네 덕분에 많이 벌었을 거야. 안 봐도 뻔해!”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꽤 많은 게 아니라 엄청 많았어. 내 노동의 대가를 이렇게 쳐주니 보람차군.”
“크흐흐! 그럼 나 약속대로 살려 주는 거지?”
“근데 언제 봤다고 아까부터 반말지거리야?”
“응?”
촉수의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남구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기분 나빠!”
“헉! 무, 무례를 용······.”
남구의 싸늘한 눈빛에서 촉수의 남자는 죽음을 직감했다.
세이버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
“힉!”
휘잉- 촤아아아악-
세이버를 퍼 올린 남구가 핏줄기를 뿌리며 창밖으로 날아가는 대가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이 말이야, 죽을 상황에서도 반말을 찍찍 날리네? 인간을 자기 밑으로 보는 게 습관이야 아주! 싹 다 정리해 주지!”
피바다가 된 집무실을 나서는 남구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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