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터치다운 (2)
긴장이 풀린 여자들이 새로 합류한 미국 여자에게 모여들어 질문을 던져 댔다.
새로 합류한 인원의 정보가 궁금할 법도 하건만 남구는 결계 밖만을 뚫어져라 내다 보았다.
누구인지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렇게 거지 꼴이 되었는지 질문이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도 밖의 상황만 눈여겨보고 있던 남구가 신속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장비를 확인했다.
남구가 타는 우두머리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이곳저곳에는 장비를 장착할 수납공간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질긴 나무껍질과 몬스터의 거죽으로 만든 캐리어에는 뼈로 만든 화살촉이 달린 화살이 그 수량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수북이 들어 있었다.
목책에 쌓아 놓았던 비교적 짤막한 던지기용 나무창과 같은 종류의 투창이 캐리어에 네 개나 꽂혀 있었다.
남구가 평소 사냥을 나가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활을 챙겨 들고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등짝에 훌쩍 올라탔다.
왠지 불안해진 터키 여자가 남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우리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저기 비석 앞에 빛이 보이는데요.”
사망한 볼 빨간 남자의 소속 포탈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산양 머리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비석 앞에서 은은하게 빛무리를 발하는 포탈을 힐끗 곁눈질한 남구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기다려 봐! 금방 와!”
남구의 목소리에 모든 일행이 긴장했다.
사냥을 나가거나 몬스터의 침입이 있을 때 나오는 말투였다.
저런 짧고 간결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언제 어떠할 때 튀어나오는지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빚을 지워 두는 것도 괜찮을 거야.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남구는 은성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모습 뒤에 숨겨져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허술한 일면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어떠한 외부 간섭에도 한 번 마음 먹으면 절대로 자기 뜻을 꺾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은성이었지만 감정적 채무 관계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지 못하는 일반적인 감성을 역행하는 인사가 바로 은성이었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누군가는 사내대장부다운 면모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남구의 시각에서는 약점이었다.
냉철한 상황판단 하에 최선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감정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경우가 왕왕 있어 왔다.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남구는 지금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진 자리에 올라 있었다.
남이야 죽든 살든 알 바 없이 제 안위만을 도모하던 시절의 남구가 아니었다.
과거와 같이 단지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을 때는 이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길들지 않는 야생마 같은 은성을 부릴 수만 있다면 남구가 꾸는 꿈에 고성능 엔진을 다는 셈.
과거 최강자이자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은 은성의 핸들을 거머쥘 절호의 기회였다.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어.’
목도리 스몰 드래곤에 올라탄 남구가 예솔의 옆을 서서히 지나치며 파르티잔과 에뻬를 맡겼다.
받아 드는 예솔이 반듯한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에뻬는 여전히 잘린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칼자루를 꽉 붙들고 놓지 않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치며 예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저 다녀오라는 말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예솔에게 씩 비틀린 미소를 보인 남구가 우렁차게 외쳤다.
“하! 이랴!”
끼에에에엑-
펄쩍 두 다리로 일어선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결계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목숨을 보장 받고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던 여자들이 온통 울상이었다.
두 마리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난입한 모래사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걸음마다 폭탄이 떨어진 듯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비산한 모래 알갱이가 바람을 타고 온 사방에 잔뜩 끼어있었다.
‘에이씨! 선글라스에 흠가겠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넋을 놓은 채 주저앉아 있던 검은 머리 남자가 부러질 듯 고개를 들어 거대 괴수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 남자와 그 주변으로 광범위한 그림자가 널따랗게 드리웠다.
올려다보던 핏발선 흰자위가 부릅떠졌다.
검은 머리 남자의 머리 꼭대기로 거대한 발바닥이 내리꽂혔다.
쿠와아아아앙-
산천초목이 뒤흔들렸다.
높은 파도처럼 튀어 오른 모래더미가 사방 천지 비산했다.
그 옆으로 은성의 꽁무니를 바짝 뒤쫓은 또 한 마리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넓은 가슴을 한껏 열어젖혔다.
굵직한 목덜미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돌아본 은성의 부릅뜬 눈동자에 깊은 절망감이 차올랐다.
자신은 어찌어찌 피한다고 하더라도 화염 방사기처럼 뿜어지는 불줄기가 한순간에 여자들을 휩쓸어 버릴 것이 자명했다.
쐐쐐쐐쐐쐐애애액-
바작바작 튀기는 푸른 섬광과 타오르는 듯한 붉은 광채가 숨을 깊이 들이마신 거대 괴수의 전신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퍼버버버버벅-
‘점화!’
꽈앙-
스킬 붉은 화살이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발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아주 작은 범위에서 일어났지만, 위력은 적지 않았다.
마치 돌덩이인 양 단단하고 두꺼운 거죽이 뭉텅이로 터져 나갔다.
하지만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폭발은 너무나 거대한 몸집에 너무나 작은 부위에서 일어났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불기둥이 돌아간 고개를 따라 남구에게 퍼부어졌다.
화르르르르르르르-
위기를 느낀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목덜미의 거죽을 우산처럼 활짝 펼쳤다.
거죽이 펼쳐지자 기아 변속이라도 한 듯 순간적인 가속이 붙었다.
거기에 중력 제어가 가미됐다.
화염이 퍼부어진 모래더미에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잔상이 불타올랐다.
탈진한 여자들을 이고 지고 부리나케 도주하던 은성이 절망에 물들었던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고 쏜살같이 내달리는 남구를 돌아보았다.
휘돌리는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뿜어지는 굵직한 불길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남구의 꽁무니를 바짝 쫓았다.
쏟아져 나오는 불길을 따라 모래사장에 새까맣게 그을린 타원형의 널따란 획이 둥글둥글 그려졌다.
모래까지 죄다 태워버리는 그 새까만 타원형의 끝에서 목덜미의 거죽을 활짝 펼친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다리에 바짝 붙어 꽁무니에 따라붙은 불기둥을 피하며 투창을 발등에 날렸다.
그대로 스쳐 지나며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거대한 다리 주변을 스쳐 지나며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내달리는 남구를 향해 뿜어지던 불줄기가 모래사장을 벗어나 우거진 밀림 숲을 뒤덮어 버렸다.
고열로 인해 삽시간에 대형 산불로 번져 갔다.
정글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각종 몬스터가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온 불줄기의 일격에 순식간에 떼거리로 산화했다.
불길의 직격을 피한 몬스터가 꼬리에 불이 붙은 채 목도리 스몰 드래곤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마냥 뛰어다녔다.
두 마리의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닥치는 대로 토해내는 화염 줄기에 일대가 온통 불바다였다.
남구는 익어버릴 듯한 화끈화끈한 열기에 악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아우, 젠장! 뜨거워 죽겠네!”
아크리 섬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강력한 화염을 내 뿜는 드래곤과 가장 덩치가 작고 빠른 발을 가진 드래곤이 한 치도 양보 없는 술래잡기 대결을 이어 나갔다.
화염과 빠른 발의 대결에서는 빠른 발이 승리했다.
어그로를 끓기 위해 연신 투창과 화살을 쏘아붙였음에도 목도리 스몰 드래곤과 남구는 숯덩이가 되지 않고 살아 있었다.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에 찰싹 달라붙어 끊임없이 이어간 회피기동이 빛을 발했다.
아무리 빠른 발을 가진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남구의 중력 제어와 글탄 기마술이 없었다면 영락없이 한 줌의 재로 흩날렸을 것이다.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이 더는 나오지 않는 화염을 조금이라도 더 토해내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트림하듯 꺽꺽거렸다.
그러나 짙은 그을음 섞인 회색의 연기만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송곳같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해안가 주변의 빽빽하게 자라란 수풀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황금빛 모래사장도 온통 까맣게 그을렸다.
일대에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자욱한 스모그가 착 내려앉았다.
잿가루와 그을림과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온통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다.
잿빛 연기로 가득 찬 대기 덕분에 오히려 자이언트 파이어 드래곤은 남구를 찾지 못해 고개를 휘저어댔다.
더는 불줄기도 뿜어내지 못했다.
남구가 두 마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결계에서 예솔이 뛰쳐나왔다.
그 뒤를 이어 터키 여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솔의 판단은 시기적절했다.
‘으음, 네 작전, 화염이 뿜어지지 않는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어.’
투명한 결계 너머로 여자들이 두 손을 모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투과해 보였다.
데스 게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시스템하에서 상대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얼토당토않은 일이 연출 되었다.
잿빛 연기 속에서 하얀 손이 불쑥 나왔다.
“내 손 잡아!”
허우적거리는 팔을 낚아챈 예솔이 여자를 번쩍 들어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등 위에 던져 올렸다.
“악! 고, 고마워요.”
예솔은 달리는 속도도 늦추지 않고 뒤를 이어 달려오는 여자마저 태우는 기예를 발휘했다.
터키 여자는 목도리 스몰 드래곤을 멈춰 세우고 기진맥진한 여자를 낑낑거리며 올려 태웠다.
예솔이 잿가루에 까끌까끌한 눈을 좁혀 뜨고 희끄무레하게 드러나는 사람의 실루엣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곧 한꺼번에 세 명이나 들쳐 안고 연기를 해치며 뒤뚱뒤뚱 달리는 거구의 은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터키 여자의 귓가에 자욱한 연기를 뚫고 예솔의 외침이 들려왔다.
“한 명 더 태우고 가자!”
“알았어!”
예솔이 도착한 은성과 터키 여자에게 말했다.
“한 명 넘겨! 앞에 태워야겠다. 정신을 못 차리네!”
예솔의 말에 터키 여자가 은성이 건네주는 탈진해 축 늘어진 여자를 앞쪽으로 받아 안았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은 두 명 이상 태우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체구였다.
“더는 못 태워!”
예솔의 얘기에 은성이 야만 전사인 양 숯검정을 잔뜩 찍어 바른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은성은 이런 도움을 받으리라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했었다.
자신의 눈앞에 연기를 해치고 마치 천사처럼 갑자기 등장한 예솔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보니 엄청 예쁘구나! 그때 화가 난다고 이 여자를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면 이런 도움을 받지 못했겠지!’
은성은 선을 행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신념에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예솔은 이 난리 통에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성이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살이 빠지고 연기가 자욱하다지만 바로 면전에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은성 때문에 덩달아 잠시 멍해졌던 예솔이 곧장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고삐를 틀었다.
지금은 무언가를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각자 두 명씩 태운 예솔과 터키 여자가 동시에 옆구리를 박찼다.
예솔이 달리며 목청을 높였다.
“또 오든가 해야지 더 태우면 내려앉을 거야!”
예솔과 나란히 달리던 터키 여자도 목소리를 높였다.
“저 남자, 사람 맞아? 무슨 덩치가 저렇게 커!”
둘이 큰 소리로 외쳐댔지만,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이곳은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각종 몬스터의 울부짖음에 더해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거대 괴수 두 마리가 한꺼번에 포효했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이 쿵쿵 땅을 박차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발소리는 마치 배기량 높은 오토바이의 엔진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우거진 정글이 광범위하게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야단법석인 가운데 갑자기 은성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예솔과 터키 여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뒤돌아봤다.
이동 스킬을 사용한 은성이 두 여자의 꽁무니까지 바짝 쫓아왔다가 또다시 급속도로 멀어져 갔다.
터키 여자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이, 깜짝이야! 몬스터 튀어나온 줄 알았잖아!”
예솔이 코앞으로 다가온 결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구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왜 그러는데? 너무 싸우다 보니 미친 걸까?”
“그런 게 있어!”
예솔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채 터키 여자보다 먼저 결계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터키 여자도 결계에 진입했다.
결계 안에 있던 여자들이 예솔과 터키 여자에게 몰려들어 환호했다.
“다행이야!”
“살아왔어!”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몰려든 여자들이 당장에라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이 휘청거리는 다른 팀 여자들을 받아 안았다.
탈진해 다 죽어가는 여자들을 내려놓은 예솔이 결계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안 나가도 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여자를 양쪽 어깨에 둘러멘 은성이 결계에 뛰어들어 슬라이딩했다.
“커억! 커억!”
모래사장에 뻗어 헐떡거리는 은성에게 예솔이 물었다.
“일곱 명 아니었나? 한 명 비는데?”
“허억, 허억, 기력이 다했는지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연체동물같이 흐느적거리는 두 여자와 뒤엉켜 나뒹군 은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여자의 시선이 온몸이 뒤엉켜 모랫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진 거구의 은성과 탈진한 여자들을 내려다보는 사이 예솔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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