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힐링라이프 (1)
‘네 특기는 예솔이와 마찬가지로 투명화!’
숙련도를 꽤 올렸는지 발소리까지 줄어 있었다.
남구는 태연한 척 넓적다리뼈에 말라붙은 너덜너덜한 근육과 거죽을 떼어내며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상대의 희미한 발소리를 쫓았다.
‘뒤로 돌아드는군.’
남구가 왼발을 떼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대로 멈춘 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 미약한 소리 하나하나에도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을 집중시켰다.
어느 순간 등 뒤쪽으로 살금살금 접근하던 발소리에 파문이 일었다.
팍-
상대는 지그시 누른 발바닥으로 바닥을 힘껏 밀어내고 있었다.
남구가 미리 디뎌 놓은 왼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돌아섰다.
중력제어의 숙련도가 10%에 다다랐을 때 새롭게 깨우친 기술.
육체의 원래 주인은 중력의 숙련도가 고작 2%였다.
이제는 성장을 거듭하여 육체에 체화된 것을 아무런 노력 없이 날름 받아먹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앞으로의 모든 것은 남구가 직접 깨우치고 연마해야 했다.
이 방법을 터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과 땀이 필요했었다.
지표면을 디딘 발바닥에서 광범위한 중력장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날카롭게 갈비뼈를 갈아 만든 뼈 낫이 목덜미로 들이치기 직전.
투명한 몸뚱이를 쏜살같이 날린 상대가 제자리에 말뚝이라도 박힌 듯 우뚝 멈췄다.
투명화가 벗겨진 상대는 지름 8m 반경으로 둥그렇게 펼쳐진 중력장 안에서 발이 꽁꽁 묶인 채 눈을 부릅뜨고 남구를 바라봤다.
“너, 너는?”
‘그래 나야! 이 까무잡잡한 사이코패스야!’
소환되기 직전 지구에서 피켈로 남구의 정수리를 찍어버리려 했던 오광수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쁘장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 예쁘장한 얼굴은 뒤바뀐 오광수의 영혼 탓에 악랄하고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눈꼬리를 한껏 추켜세우고 있었다.
오광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남구를 표독스럽게 쏘아봤다.
조금만 삐끗해도 엄청난 힘으로 내리누르는 중력의 압력에 쥐포처럼 딱 달라붙어 압사당할 것 같았다.
지구에서 죽여버리려 했던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버젓이 나타나 자기만큼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우두커니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상대의 주력 스킬 중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선수를 잡아 왔던 오광수가 난생처음 수세에 몰려 버렸다.
‘납작하게 땅에 붙을 줄 알았는데 서 있네? 신체 능력이 대단한가 보지?’
남구는 지속해서 중력제어를 펼치며 힘 싸움을 걸었다.
오광수가 곧 주저앉아 버릴 듯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버텨냈다.
또한 쭉 뻗어낸 뼈 낫으로 목을 마저 훑으려 안간힘을 다했다.
‘이 녀석은 감으로만 상대하기에는 위험해!’
남구가 시스템에 중력 게이지를 띄워 올렸다.
6개월간 수련을 통해 새롭게 알아낸 기능이 곧바로 남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현재의 상태를 알려 왔다.
광범위하게 중력장을 펼치느라 이미 게이지의 막대는 반 이상이 날아가 있었다.
지속적인 중력제어의 사용에 게이지의 막대가 점점 더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앞이 좀 어지러워서 그렇지 느낌만으로 사용할 때보다는 확실히 마음이 편하군.’
이제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눈코입에서 피를 쏟을 일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가용중력 20%]
20% 밑으로 떨어지자 망막에 떠오른 텍스트가 경고하듯 점멸하며 사용 가능한 남은 수치를 알려왔다.
[가용중력 19%]
[가용중력 18%]
[가용중력 17%]
.
.
.
오광수는 딛고 선 다리와 뻗어낸 팔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게이지가 다 떨어질 때까지 버틸 공산이 컸다.
[가용중력 10%]
중력제어의 게이지 바가 바닥까지 떨어진다면 목이 잘릴 소지가 있었다.
망막에 10% 경고 텍스트가 뜨자마자 팔을 쭉 뻗으며 중력장의 발산 통로를 발바닥에서 손바닥으로 옮겼다.
순식간에 뼈 낫이 목으로 들이쳤다.
꽈드드드드드득-
풀잎과 흙더미를 사방에 흩날리며 주르륵 발바닥이 밀려난 자리에 깊은 두 줄기의 고랑이 파였다.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상대를 딱 4m까지만 밀어냈다.
더욱 정밀해진 중력제어의 운용 능력에 오광수는 뼈 낫을 허공에 허무하게 휘저으며 남구가 지정한 위치까지 그대로 밀려났다.
‘일소!’
나부끼는 풀잎과 흙먼지 사이로 오광수의 몸에서 뽑혀 나온 빛의 실 가닥이 줄기줄기 떠올랐다.
다시 달려들기 위해 걸음을 내딛던 오광수가 비틀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꺅!”
오광수의 몸에서 하늘하늘 실처럼 뽑혀 나오던 하얀 광채가 동아줄만큼이나 굵다랗게 서로 배배 꼬여 남구의 펼친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성스럽게까지 보이는 환한 빛줄기가 남구와 오광수 사이를 꿈틀거리며 이었다.
동아줄같이 기다랗게 이어진 빛줄기는 곧 특유의 진동을 발하며 생명 에너지의 착취 속도를 더해 갔다.
웅웅웅웅웅웅우우웅-
여태 선수 필승이었던 오광수가 핏발이 곤두선 당혹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자신의 주인이 가장 조심하라던 스킬에 당해버렸다.
오광수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4m였다.
그 정도는 한달음이면 되었다.
그러나 서로를 연결한 빛줄기의 탄력 넘치는 장력 앞에 쉽게 다가설 수가 없었다.
거북이처럼 한 걸음씩 느릿느릿 발을 떼는 오광수의 피부가 급격하게 메말라갔다.
‘옛날 얼굴을 되찾았군. 자글자글한 것이 이제야 좀 너 답네?’
“꺄아아아아아아아!”
정글이 떠나가라 질러대는 절규에 새 떼가 하늘 위로 퍼드덕퍼드덕 날아올랐다.
필사적인 오광수의 집념이 4m의 벽을 극복했다.
비록 생명력이 상당 부분 빠져나가 쩍쩍 갈라진 피부에서 핏줄기가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지만, 손만 뻗고 멀뚱히 서 있는 남구의 바로 앞으로 끝내 다다랐다.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새하얀 빛가닥으로 화하여 여전히 남구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억울함과 극심한 고통에 온통 얼굴을 일그러뜨린 오광수가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으아아악! 죽어라!”
사정거리에 다다른 뼈 낫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쌔애애애액-
순간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반득였다.
중력제어를 두른 남구의 몸이 들이치는 뼈 낫보다 간발의 차로 먼저 빠졌다.
오광수 필사의 일격이 허공을 갈랐다.
훌쩍 물러난 남구의 손에서 넓적다리뼈가 뿌려졌다.
붕붕붕붕부우웅- 빠각-
갈비뼈에 막힌 넓적다리뼈가 하늘 높이 튕겨 나갔다.
오광수의 반격은 신속했다.
곧장 뼈 낫이 날아왔다.
휭휭휭휭휭휭휭-
날아오던 금이 간 갈비뼈가 공중에서 조각조각 분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오광수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멍하니 본 것은 순간에 불과했다.
곧바로 허리춤에서 가는 대나무 대롱을 뽑았다.
‘망할 마티나는 개막전 시간을 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남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으면 저 자식, 벌 걸 다 만들어 놨네?’
재빨리 대롱을 입에 물었다.
‘독개구리 잡을 시간도 있었나 보지?’
오광수의 빵빵하게 부푼 볼이 홀쭉해졌다.
슉-
쏘아진 독침은 젖힌 고개 옆 올올이 흩어져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저 멀리 날아갔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눈앞에서 버젓이 대놓고 맞출 수는 없었다.
이미 오광수도 알고 있었다.
단지 물러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작전상 후퇴를 선택한 오광수가 급히 몸을 돌려 땅을 박찼다.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몸에 중력의 힘이 더해져 그대로 허공을 날아 두꺼운 나무에 처박혔다.
꽈앙- 허억!
아름드리나무가 뿌리를 절반이나 들어내고 기울어졌다.
온몸이 깨어질 듯한 충격에도 오광수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남구를 찾았다.
남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손을 뻗고 있었다.
휙-
남구의 뻗어낸 손아귀에 주먹만 한 돌멩이가 빨려들었다.
낚아채자마자 바로 집어 던졌다.
쐐야-
오광수는 자라인 양 목이 없다시피 잔뜩 움츠렸다.
빠각-
머리 위로 날아든 돌멩이가 나무 기둥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일소와 중력제어에 연달아 당한 몸은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아끼고 아꼈던 필살기를 써야만 하는 타이밍이었다.
파악-
부릅뜬 눈으로 남구를 노려보던 오광수의 신체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다시 드러난 제모습에 경악했다.
투명화가 벗겨진 적은 처음이었다.
도망가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이 한파에 얼어버린 듯 제멋대로 삐거덕거렸다.
필살기를 펼치기 바로 직전 ‘한기폭사’에 당한 오광수는 된서리를 맞은 듯 딱딱하게 몸이 굳어 버렸다.
곧 목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죽음의 공포가 밀어닥쳤다.
남구가 까만 눈동자에 싸늘한 한기를 풀풀 날리며 휘청거리는 오광수의 상태를 살폈다.
‘어딜 튀려고? 네 스킬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단다. 1 LP도 투자하지 않은 한기폭사가 엄청나게 잘 먹히네? 잔인한 성격만큼 배포는 안 되는 모양이지?’
한기폭사는 남구보다 압도적으로 약한 자에게나 통하는 그저 그런 스킬일 뿐이었지만 의외로 누구 못지않게 대단한 위용을 떨쳤던 오광수에게 직방이었다.
남구는 단지 투명화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뿐이었다.
한기폭사는 육체에 타격을 주는 스킬이 결코 아니었다.
오직 정신에 작용할 뿐이었다.
정신력이 강하면 맥도 못 추는 스킬이었다.
남구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잔혹하고 힘만 센 어린애 같은 놈이었군!”
자존심을 긁는 비아냥에 평소라면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오광수였지만 싸늘한 눈동자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가오는 남구가 지옥에서 막 올라온 악마같이 느껴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리를 땅에 박고 용서라도 빌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흐흐, 남에게 잔인한 놈일수록 하찮을 놈일 경우가 많지. 바로 너 같이!”
벌벌 떨고 있는 오광수의 앞으로 남구가 빛살처럼 들이닥쳤다.
퍼억-
한 손에 목덜미를 움켜주고 들어 올렸다.
오광수는 극한의 공포에 제대로 바둥거리지도 못하고 소변을 지렸다.
소변이 펑퍼짐한 바지를 적시며 통 큰 바짓단 밑으로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밧줄로 목을 감았을 때 신나고 재미있었니?”
“컥컥! 케엑!”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한기폭사를 줄기줄기 끝도 없이 뿜어냈다.
질겁한 오광수는 그냥 두어도 쇼크사할 것만 같아 보였다.
“천천히 죽여 주마! 아주 고통스럽게! 흐흐흐.”
아름드리나무 기둥에 박힌 돌멩이에다 뒤통수를 처박았다.
빡-
“꺄악!”
“너랑 그런 예쁜 목소리는 너무 안 어울려.”
빡- 빡빡빡-
숨 막히게 죄어오는 목덜미와 연달아 이어지는 뒤통수의 충격에 어느샌가 오광수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으흠, 목 조르는 건 별로 재미없군. 사실 나는 이런 게 더 재미있어.”
남구가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오광수의 어깨를 잡아 비틀었다.
우두둑-
어깨뼈가 순식간에 탈골됐다.
의식을 잃어가던 오광수가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우득- 캭! 우두둑- 꺄악!
체조로 취급받던 주짓수 기술로 전신의 관절을 하나하나 분리해 냈다.
“으음, 역시 난 이런 게 취향에 맞아!”
손을 탁탁 털고 허리를 세운 남구의 발밑에 온몸의 관절이 제멋대로 돌아간 오광수가 연체동물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제한 시간이 1주일이라고 했나? 어이, 오광수! 오지 생활 즐길 준비 됐어? 오랜만에 힐링 좀 하고 가자고. 정글 출신이라 고향에 온 것 같을 거야. 부럽군.”
말을 마친 남구가 먹거리를 사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광수는 극심한 고통에 귀까지 먹먹하여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남구의 콧노래처럼 들렸다.
오광수의 몸뚱이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부분은 목이었다.
어딘가로 멀어져가는 남구의 등 뒤를 꼼작도 못 한 채 고개만 젖혀 바라보는 눈망울에서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두려움에 이가 딱딱 부딪혔다.
온몸이 떨리는 기분이었으나 신경까지 끊어 놓았는지 부위마다 분리된 몸은 떨 수조차 없었다.
“저, 저런 놈이 존재할 줄이야! 저놈은 인, 인간이 아니야!”
저 멀리 멀어지던 남구가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정말 양심도 없는 거다?”
“흐윽!”
오광수는 귀신이라 생각하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힐링하며 겸사겸사 LP도 좀 채워가야겠어. 넓은 전장을 제공해줘서 고맙군.”
남구는 한참을 멀어졌지만, 오광수의 월등한 감각에 포착되는 남구의 목소리에는 즐기고 있는 기분이 생생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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