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시방 우리는 공세가 아니라 수세야
박도를 든 남자가 웃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활을 든 남자도 따라 웃었다.
“킥킥킥!”
‘여자들을 차지할 생각에 그냥 막 웃음이 터져 나오니? 아주 김칫국을 처마시고 있군.’
남구의 비틀린 입술에서도 웃음이 샜다.
“으흐흐!”
서로 죽일 듯이 대치하다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동창이라도 만난 듯 한꺼번에 웃고 있었다.
여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갑자기 웃기 시작한 남구와 석실 내부에 있는 남자들을 번갈아 돌아다봤다.
세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음흉하기 짝이 없는 흉악한 미소를 보니 절로 몸이 떨렸다.
빼어난 미모를 겸비한 그녀들로서는 자주 접해 익숙하면서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미소였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저리 태평하게 웃을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핏 보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번들거리는 눈빛은 너나없이 살기를 풀풀 날렸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았다.
서로가 서로의 속셈을 뻔히 안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으나 섣불리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일단 출몰할 몬스터가 우선이었다.
서로 싸우다가 몬스터에 공멸할 수는 없는 일.
지금까지 각자의 구역에서 최강자로 군림해 왔던 이들이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인지했다.
남구가 비틀린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석실로 진입했다.
남구의 발걸음을 쫓아 여자들도 어미를 쫓는 새끼오리같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쿠구구구궁-
석벽이 닫히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한쪽 구석으로 일제히 쏠렸다.
이전 석실에서 몬스터가 소환됐었던 위치였다.
두 남자는 투지에 불타는 눈빛이었지만 여자들의 각양각색의 눈동자는 걱정과 초조와 불안이 가득 들어차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남구의 까만 눈동자만이 이곳저곳을 훑고 돌아다녔다.
‘예솔이 어디 있는 거지? 하! 정말 대단하구나!’
예솔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광수의 투명화 스킬은 예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스킬 하나에 몰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아까 보니까 통성명할 시간쯤은 있더군.”
활을 든 남자의 목소리에 곳곳을 훑던 남구의 시선이 멈추었다.
남구가 시선도 맞추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곧 죽을 것 같은데 굳이 통성명까지.”
“킥킥! 이거 왜 이래? 우리가 꼭 죽인다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야.”
“풋! 나 말고 너희 죽는다고.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만.”
“와우! 배짱 보소? 아이 돈 케어. 상관없어. 나중에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일단 힘을 합쳐야 할 거 아니야? 소환되는 몬스터부터 같이 잡고 봐야지?”
다시 예솔의 위치를 찾아 눈동자를 굴리던 남구가 은근슬쩍 조력을 요구하는 얘기에 지나가듯 대답했다.
“뭐, 그러든지.”
‘다리 한두 개 날아가면 그때부터 시작이려나?’
박도를 든 남자는 대화 내용이 궁금하다는 듯 활을 든 남자와 남구를 휘적휘적 돌아볼 뿐이었다.
활을 든 남자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여자들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참 예쁘긴 무지하게 예쁘구만. 저 여자들, 갈색 머리 남자 소유 아니었던가? 총까지 들고 있었는데 용케도 죽였네? 배짱부릴만하군.”
남구의 비릿한 미소가 조금 더 진해짐과 동시에 여러 눈동자가 주목했던 바로 그곳에서 어김없이 마법진이 눈부신 광휘를 뿌리며 떠올랐다.
곧 눈이 멀 듯 휘몰아치는 밝은 광채에 모두 눈을 감았다.
남구만이 선글라스 안쪽에서 눈빛을 반짝였다.
광채에 휩싸여 등장하는 개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마리가 동시에 소환됐다.
‘저건!’
세리야 대륙의 명실상부한 전투 종족.
대단히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바탕으로 근접전에서는 상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위명이 파다했다.
‘라이칸 다섯 마리라······.’
남구의 눈동자가 힐끗 여자들에게 향했다.
이미 한번 경험을 해봤던 그들은 본능적으로 소환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지금은 공세가 아니야! 수세야!’
남구는 참룡도를 움켜쥐고 여자들에게 향하는 진로를 막아섰다.
포탈에서 발한 광휘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에 따라 라이칸들이 고개를 휘저으며 한순간에 바뀐 환경을 두리번거렸다.
저들끼리 저들의 언어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갑작스럽게 소환됐는지 무척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오크와 고블린 같은 종족은 마계 출신이다.
지구에 구울이 보내졌듯이 세리야 대륙에 보내진 몬스터였다.
세월이 오래 지나 보금자리까지 만들고 번식도 하면서 현지화한 경우였다.
하지만 늑대에서 진화한 듯한 유사 인종인 라이칸은 세리야 토종이었다.
‘너희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나 보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던 라이칸들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인류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듯 라이칸들에게도 나름의 방식으로 지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내용은 보나 마나 뻔했다.
‘우리를 죽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있나 보군.’
활을 든 남자도 박도를 든 남자도 남구를 의식하며 잔뜩 경계만 할 뿐 막 등장한 라이칸을 선제공격하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표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팀워크에서는 상대가 안 되겠네! 그래, 뭐 이 상황에 팀워크를 기대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지령을 받은 라이칸 무리에 변화가 일었다.
인간과 흡사하던 그들의 몸에서 삽시간에 거친 털이 수북이 자라나고 길쭉하게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이 뾰쪽하게 뽑혀 나오며 으르렁댔다.
“그르르르릉!”
안 그래도 커다랗던 덩치가 부풀어 오른 근육에 의해 더욱 거대해졌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그들의 눈빛이 남구와 두 남자와 여자들 사이를 희번덕희번덕 옮겨 다녔다.
‘육체 변이라······. 꽤 진화를 거듭한 놈들이군. 역시 엄선됐어.’
라이칸 중에서도 생명 에너지를 일정량 이상 흡수해야만 가능한 능력이었다.
그야말로 사나운 괴수처럼 변해버린 모습에 활을 든 남자와 박도를 든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또 무슨 몬스터야?”
“사, 사람의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완전히 괴물로 변해 버렸어.”
‘어느 나라 말이지? 둘이 동향이었나?’
어느 나라인지조차 모를 말이 계속됐다.
“긴장해! 저놈들 지능이 있어. 그 덩치만 커다란 꽃게랑은 달라.”
활을 든 남자의 말에 박도를 든 남자가 방패를 몸에 바짝 붙이며 대답했다.
“만만해 보이지 않는군.”
라이칸들의 흉흉한 눈빛이 모두 남구에게 쏠렸다.
‘둘 보다는 혼자인 나를 노리시겠다? 하긴, 내 뒤에 있는 여자들이 잘 차려진 밥상처럼 보이겠지.’
그르르르르-
소름 끼치는 하울링을 발하며 다섯 마리 전부가 남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포위하듯 간격을 벌리며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활과 박도를 든 두 남자는 자세를 낮추고 격전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듯 눈빛을 반짝이며 구경만 했다.
남구는 그들이 구경을 하든 말든, 조력을 하든 말든 일절 관심 밖이었다.
애초부터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 스스로를 믿으며 제 할 일만 해나갔다.
감각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우고 다가오는 라이칸 무리에 집중했다.
널따란 석실 내부 전부가 의식의 확장이 일어난 남구의 레이더망에 들기 시작했다.
‘예솔이 저기 있었군.’
남구의 까만 눈동자가 깊이깊이 침잠해 들었다.
라이칸 무리의 숨결부터 대기의 흐름까지 점차 눈에 들었다.
남구가 온몸에 근육을 이완시켰다.
힘이 쭉 빠지자 가볍게 쥔 거대한 참룡도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칼끝이 돌바닥에 맞닿았다.
카앙-
출발 신호라도 되는 듯 갈고리처럼 굽어진 단단한 손톱을 바짝 세우고 양쪽에서 라이칸 두 마리가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남구의 반득이는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꽈아앙-
거대한 덩치가 순식간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친 한 마리가 남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부웅-
고개를 살짝 젖혀 피하자마자 늘어뜨린 참룡도로 옆구리를 베어내며 스쳐 지났다.
촤아아악-
남구가 지나친 곳에 분수처럼 핏줄기가 뿜어졌다.
곧바로 회전하며 뒤에서 목덜미를 쳐냈다.
쐐액- 촤아아아-
단칼에 분리된 대가리가 핏줄기와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쿠웅-
머리 없는 거대한 몸체가 넘어가고 이어 대가리가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나갔다.
순간 석실에 있는 모두의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했다.
얽히자마자 전광석화같이 목을 쳐내는 남구의 위용에 하나 같이 눈을 부릅떴다.
일련의 과정을 눈에 채 담지 못한 자도 있었다.
박도를 든 남자가 쩍 벌어진 입을 놀렸다.
“우, 움직임 보였어? 젠장! 무지하게 빠르네!”
활을 든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햐아! 이거 진짜 쉽지 않겠는데?”
남구가 널찍한 도면에 흐르는 핏물을 허공에 뿌렸다.
후웅- 촤아아아-
바닥에 붉은 호선이 펼쳐짐과 동시에 칼끝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카앙-
남구가 찍어 내린 칼자루에 삐딱하게 기대 서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남구의 허세 가득한 여유 있는 몸짓에 라이칸들이 동요했다.
구경만 하던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여자들만이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환희에 젖은 눈빛으로 추앙하듯 남구를 바라봤다.
불안과 초조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제는 들뜬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허옇게 질려 있던 얼굴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의 기색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두려움에 꼭 다물고 있던 입이 떨어졌다.
“대, 대단해!”
물꼬가 터진 듯 연이어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압도적이야!”
“정말 다행이야!”
“엄청 세잖아?”
벽면에 처박혔던 라이칸이 머리를 흔들어 젖히며 일어섰다.
온몸을 이리저리 꿀렁거리며 통증을 풀어냈다.
중력 제어를 비록 눈동자로 펼쳤다지만 게이지가 한 번에 뚝 떨어질 만큼 최대 출력이었다.
육체 변이를 이룬 라이칸의 신체 내구력은 예상대로 굉장했다.
‘역시, 멀쩡하군. 한두 군데 부러져도 괜찮은데 말이야!’
남구에게 향했던 라이칸의 진영이 슬금슬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두 남자에게 접근해 들었다.
약해 보이는 먹잇감부터 우선해 노리는 본능이 철저히 작용하고 있었다.
‘내가 부담스러웠니? 타깃을 바꿨군.’
바짝 긴장한 두 남자가 잔뜩 몸을 움츠렸다.
‘어디, 나도 구경 좀 해 볼까?’
두 사람과 네 마리의 대치 상태를 분주하게 살피던 남구의 눈동자에 이채가 띠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에서 바작바작 뇌전이 일었다.
‘바로 주특기를 시전하는군.’
투스타 전격 보우는 화살에 뇌전의 기운을 실어 보낼 수 있는 명품 아이템이다.
뇌전이 실린 화살에 스치기만 해도 감전된 몸이 뻣뻣해졌다.
요란한 소음과 번쩍거리는 광채에 시전자의 위치가 공공연하게 노출됐지만, 기능만큼은 대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뇌전의 기세가 더욱 거세어졌다.
빠자자자작-
활을 든 남자가 끊어질 듯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뇌전을 모아나갔다.
풀차징을 이루자 곧바로 손을 놓았다.
피잉-
번쩍거리는 푸른 뇌전이 허공에 잔상을 그리며 번개같이 날았다.
쒜에에에엑-
무척 가까운 거리였지만 라이칸은 재빠른 동작으로 상체를 젖혀 피해 내며 곧바로 몸을 날렸다.
발사된 화살과 동시에 모두 한꺼번에 덮쳐들었다.
활을 든 남자가 신속하게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으나 옆에서 들이친 라이칸 탓에 쏘지 못했다.
재빠르게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둘씩!’
한 사람당 각각 둘씩 나뉘어 달라붙었다.
또 다른 라이칸이 물러난 활 든 남자에게 득달같이 덮쳐들었다.
활을 든 남자의 몸놀림은 라이칸보다 더 빠른 듯했다.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손톱을 뒤로 구르며 간발의 차로 피하고 또다시 빠져나갔다.
‘과연, 한가락 하는 놈이군.’
전격 화살을 피한 라이칸이 방패와 박도를 든 남자에게 곧장 들이쳤다.
우악스럽게 휘두르는 손톱이 남자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까가각-
나무 재질의 방패가 쪼개질 듯 깊은 홈이 파였지만 거친 공격을 흘려냈다.
기우둥 라이칸의 중심이 무너진 틈을 타 박도를 든 남자가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쿠쿵-
‘역시! 저놈도 움직임이 상당하네!’
어깨에 받친 라이칸이 비틀비틀 몇 발짝 물러나는 그 짧은 사이에 또 다른 라이칸이 높이 솟구쳐 박도를 든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날아들어 온 라이칸을 갑자기 끼어든 목이 잘린 라이칸이 덥석 받아 안았다.
“이제야 일어났구나! 죽여버려!”
머리 없는 라이칸은 박도를 든 남자의 반가운 외침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받아 안은 상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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