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우리 안에 대식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구만이 광휘에 휩싸여 등장하는 거대한 몬스터의 실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썩을! 저놈을 이곳에서 보는구만.’
남구의 눈동자가 두 눈을 꼭 감은 갈색 머리 남자에게 향했다.
‘여자가 여섯이나 되는데 다 지킬 수 있겠니?’
사방이 꽉 막힌 이곳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등장한 몬스터의 크기도 상당했다.
‘우리에 가둬 놓고 몬스터 소환이라······.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여자들이 버틸 수 있을까?’
눈부시게 휘몰아친 광휘가 잦아들고 있었다.
남구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모두 이런 상황이려나? 그렇다면 인원이 반으로 팍 줄 수도 있겠는데? 두 팀이 협력한다면 모를까 위험한 순간에도 분명히 욕심을 부리는 놈이 있겠지.’
남구의 시선이 눈을 감고 아우성치는 여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다 지켜내기 쉽지 않을 거야! 여자가 줄면 경쟁은 더 치열해지겠군.’
등딱지에 이끼가 가득한 거대 게가 양쪽 집게발을 높이 치켜세웠다.
‘특히 저런 몬스터한테서 보호하기는 더욱 까다롭지!’
한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수량을 한꺼번에 저 거대한 집게발로 콕콕 집어 먹는 대식가였다.
남구의 침착한 목소리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은둔!”
예솔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순간에 모습을 지워버리는 오광수의 필살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하! 투명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군.’
손이 닿을 정도로 바로 옆에 있었으나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질도 좋은데? 명품은 명품이구만.’
남구가 집채만 한 거대 게를 응시한 채 입을 놀렸다.
“저놈은 빨라! 또 어지간해서는 게딱지를 깰 수 없어.”
방금까지 예솔이 있던 자리는 텅 빈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구의 말은 계속됐다.
“연결 부위가 약점이야. 그래도 그냥 공격하지 마! 회피에 집중해!”
옷자락을 찢다 만 갈색 머리 남자가 광휘가 거친 거대 게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물러나!”
저런 거대 몬스터를 생전 처음 본 여자들이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허둥지둥 허우적거리며 벽면으로 내달렸다.
갈색 머리 남자가 남구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먼저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건 남구도 마찬가지였다.
‘어그로는 네가 맡아라! 싫어도 곧 그렇게 될 거야.’
피 냄새를 맡은 거대 게가 8개의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자들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갈색 머리 남자가 바닥에 흥건하게 떨어져 있는 혈액을 내려다봤다.
“뻑!”
욕과 함께 총구에서 화염이 터져 나왔다.
타당-
단단한 외피에 튕겨 나간 두 발의 탄환이 천장으로 튀어 올랐다.
곧바로 소총을 돌려 메고 도신이 두꺼운 벌목용 정글도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남구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구경만 하고 있진 않겠지? 곧바로 따라 들어와야 해?”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남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시선을 떼지 않고 거대 게의 움직임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깟 조잡한 활로 맞힐 수 있겠어?”
남구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우, 새끼 되게 쫑알거리네! 나 영어 못해! I cant speak English.”
갈색 머리 남자는 잠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 표정을 길게 이어 나갈 수는 없었다.
두 개의 집게발을 높이 쳐들고 여덟 개의 발을 번개같이 놀리며 총을 쏜 갈색 머리 남자를 덮쳐왔다.
타다다다다닥-
거대한 한쪽 집게발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꽈앙-
네모반듯하게 깔아 놓은 돌판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 가득 파편을 흩날렸다.
순식간에 옆으로 돌아나간 갈색 머리 남자가 내리꽂힌 집게발 외피 틈바구리를 마체테로 내리쳤다.
깡-
외피에 막힌 마체테가 검신을 부르르 떨며 튕겨 올랐다.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듯 휙휙 움직여 대는 거대 게의 빠른 몸놀림에 외피 사이를 끊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남구는 이례적으로 단 한 발의 화살만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거대 게를 상대로 속사는 화살만 낭비지.’
어차피 외피에 막혀 박히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과 공을 들여 정성을 다해 신중하게 조준했다.
촉에서부터 살대를 타고 깃까지 온통 붉은 광채에 휩싸인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쒜에에에에에에엑-
곡선을 그리며 휘어들어 간 화살이 거대한 앞발 집게의 틈바구니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퍽-
‘점화!’
꽈아앙-
귀청을 찢는 폭발음이 꽉 막힌 공간에 짱짱하게 울려 퍼졌다.
불꽃이 치솟고 있었으나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집게발 자체가 원체 두껍고 컸다.
거대 게는 반쯤 떨어져 나간 한쪽 집게발을 덜렁거리며 고막이 울려 잔뜩 찌푸린 남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으, 귀 아파!’
머리가 띵할 정도의 폭음에 마체테를 높이 쳐든 갈색 머리 남자의 인상도 일그러져 있었다.
옆으로 돌아든 남자가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다리를 마체테로 온 힘을 다해 내려쳤다.
퍼억-
외피가 없는 틈 사이에 마체테가 틀어박히자마자 남구에게 향했던 몸통이 여자들 쪽으로 돌았다.
‘피 냄새에 끌리는 본능을 어쩌지 못하는군.’
타다다다다닥-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바람에 갈색 머리 남자는 작은 다리에 박힌 마체테를 놓쳐 버렸다.
본능에 따라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 거대 게가 멀쩡한 집게발을 높이 쳐들었다.
“꺅!”
“엄마!”
“아아악!”
혼비백산한 여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집게발에 잡혀 입속으로 들어갈 운명이었던 여자도 바닥에 피를 뚝뚝 흘리며 도망칠 수 있었다.
남구가 손을 뻗고 있었다.
거대 게는 집게발을 치켜세운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중력 제어에 묶인 몸을 부르르 떨며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곧바로 뛰어들며 외쳤다.
“고마워!”
남구도 그 정도는 알아들었다.
타다다당-
체중을 지탱하는 작은 다리에 무수한 탄환이 틀어박혔다.
움직이지 못하는 거대 게에게 바짝 붙어 연사했다.
관절의 연결 부위에 총알 세례를 받은 다리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거대 게는 그 집채만 한 덩치만큼이나 힘이 엄청났다.
중력 게이지가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갈색 머리 남자가 신속하게 탄창을 갈아가며 끝도 없이 연사를 퍼부었다.
오른편에 달린 4개의 작은 다리 중 3개의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거대 게가 한쪽으로 씰그러지며 기웃 둥 내려앉았다.
그런데도 펄떡펄떡 뛰며 중력 제어에 저항해 움직이려고 발악했다.
남구는 4개의 다리가 모두 끊어지자 게이지 바닥까지 떨어진 중력 제어를 거두고 바로 일소를 시전했다.
남구와 거대 게의 거리는 10m.
그 사이를 출렁거리는 백색 빛줄기가 기다랗게 연결했다.
웅웅웅웅웅우우웅-
일소 특유의 진동을 공간 전체에 울리며 거대 게의 생명 에너지를 갈취해 갔다.
오른편 다리가 모두 날아간 거대 게는 발악하듯 기울어진 자세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다 잡았군.’
순간 총구가 손을 뻗고 우두커니 서서 생명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남구에게 향했다.
곧바로 화염이 터져 나왔다.
타다당-
일소의 스킬이 끊기며 요동치던 빛줄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직 갈취할 생명 에너지가 많이 남아 있었으나 허공에 하얀 광채의 실타래를 나풀나풀 날리며 사그라들었다.
갈색 머리 남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예솔을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 아니? 고작 계집 따위가 어떻게 총알을?”
예솔이 갑자기 날아든 탄환 세 발을 모두 튕겨내고 남구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쩌저저적-
뼈 칼에 무수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가 그 파편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칼자루만 남은 뼈 칼을 쥐고 맨몸으로 남구의 앞을 가로막은 예솔에게 갈색 머리 남자는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
총을 쏜 이유는 예솔을 소유하기 위함.
자기 손으로 막대한 보상이 걸려 있는 여자를 죽일 순 없는 일이었다.
예솔의 어깨 너머로 손바닥이 쓱 뻗어 나왔다.
“허억!”
순간 솟구쳐 오른 갈색 머리 남자가 천장에 충돌했다.
꽝- 크아악!
‘역시 만만치 않군.’
그 짧은 순간 몸을 틀어 머리 대신 어깨로 충격을 흡수했다.
남구가 앞을 가로막은 예솔을 밀어내며 말했다.
“저기 여자애들 있는 데 가 있어.”
남구의 단호한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예솔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빠르게 물러났다.
화살을 한 움큼 뽑아낸 남구가 바닥에 떨어져 내린 갈색 머리 남자에게 속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쒜쒜쒜쒜에에엑-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사라졌다.
연이어 날아가는 화살 밑으로 화살보다도 빠르게 돌진해왔다.
순식간에 대쉬한 남자가 남구의 양쪽 무릎을 얼싸안았다.
남구도 사라지고 없었다.
헛손질한 남자가 추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천장에 발을 붙이고 거꾸로 매달린 남구가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쒜쒜에엑-
남자는 추진력을 이용해 계속 바닥을 굴러 보았지만 두 발이 모두 등짝에 틀어박혔다.
“커억!”
활을 쏘느라 중력제어가 끊긴 남구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화살 두 발을 등에 꽂고 바닥을 구르던 남자가 용수철처럼 튕겨 떨어져 내리는 남구에게 들이닥쳤다.
쉭-
머리를 바닥에 찧을 듯 거꾸로 떨어지는 남구에게 손을 휘둘렀다.
급히 활대를 세워 막았다.
따악-
‘카람빗 나이프!’
언제 뽑아 들었는지 동물의 발톱 모양으로 휘어진 작은 나이프에 남구의 활대가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밀려난 남구가 몸을 틀며 나뭇잎처럼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착-
갈색 머리 남자가 득달같이 돌진해 들었다.
남구의 눈앞에 카람빗 나이프가 현란하게 그어졌다.
쉭- 쉬시식- 쉭쉭-
‘빠르네! 회피 말고는 다른 행동을 일체 할 수 없을 정도군.’
번쩍이는 칼날이 숨 쉴 틈 없이 남구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젖혀 피하고 날아드는 팔뚝을 툭툭 걷어내며 물러났다.
‘하! 이것 봐라?’
갈색 머리 남자는 거대 게가 바둥거리는 곳으로 남구를 몰아갔다.
남구가 바닥을 박차고 옆으로 크게 물러났다.
갈색 머리 남자는 손잡이 끝에 달린 링에 검지를 걸어 역수로 카림빗 나이프를 잡고 있었다.
나이프가 한 바퀴를 돌아 새끼손가락에 링이 걸리며 손바닥을 벗어나 덜렁덜렁 매달렸다.
곧바로 목에 대롱대롱 걸어두었던 자동 소총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나이프를 한 바퀴 돌리고 자동 소총을 들어 올리는 시간 정도면 반격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스릉- 후우우웅-
남구가 한달음에 코앞까지 접근하며 등에 매달린 참룡도를 뽑자마자 발도술인 양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려쳤다.
카앙-
글탄 도법이 가미된 일격은 무거웠다.
육중한 도신을 가로막은 철로 된 총몸이 그대로 구부러졌다.
크윽! 쿠웅-
엄청난 힘에 짓눌린 갈색 머리 남자가 신음을 토하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칼자루를 잡고 있던 오른손이 칼등을 덮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십자로 엇갈린 도신과 총몸이 소름 끼치는 소음을 발하며 마찰을 이어 나갔다.
가가가가각-
갈색 머리 남자의 팔은 비록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내리누르는 남구의 힘에 밀리지 않고 버텨냈다.
하지만 남구는 도신을 치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속도뿐만이 아니군. 힘도 무지하게 좋구나!’
남구가 새로운 육체를 얻은 후 지금까지 상대해본 자 중에 갈색 머리 남자가 단연 최고였다.
남구의 체내에서 유유히 흐르던 핵산의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숨결에 섞여 든 싸늘한 기운이 호흡을 통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새어나갔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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