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종 친 학교는 (9)
매점으로 몸을 돌린 남구의 시야에 한 떼의 아이들이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하고 엉거주춤한 자태로 몸서리를 치는 광경이 들어 왔다.
남구는 복도 끄트머리에서부터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중앙 계단을 향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아이들은 남구가 다가올수록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서부터 점점 매점 형광등에 영향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남구가 피를 갈구하는 지옥의 악마 같아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구가 자신들을 힐끗힐끗 쳐다볼 때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아이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어댈 뿐이었다.
‘하기는 거울로 내가 나를 봐도 무섭긴 하겠다.’
핏물을 후드득후드득 떨구며 걷는 남구의 뒤쪽에서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은성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탈진해버린 은성을 무시하고 매점을 향해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남구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노트와 책을 말아 어설프게 테이프로 몸 이곳저곳에 대충 붙여 놓은 방어구들이 바닥으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서로 얼싸안고 비벼대며 주춤주춤 물러서느라 떨어지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계단 밑 매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공포에 질린 얼굴로 책과 노트를 떨구고 있는 아이들의 곁을 남구는 멈추지 않고 지났다.
보검이라도 되는 양 마대자루나 빗자루를 꼭 쥔 아이들의 모습에 남구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흐흐, 풋!”
아이들이 그 웃음에 경기를 일으켰다.
꼭 아이들을 비웃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과거, 남구도 저 무리 안에 끼어 있었다.
두려움에 떨어대는 것으로 치자면 지금 경기를 일으키는 저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저리 쓸모없는 방어구라도 간절하게 원했었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저런 것마저 마련하지 못한 과거의 남구는 불안해 죽을 것 같았었다.
책이나 노트를 말아 두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테이프가 떨어져서 그것마저 하지 못했었다.
따였던 남구에게 우선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그냥 옷 속에 책과 노트를 밀어 넣었었다.
지금도 그런 아이들이 꽤 보였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몸에 감아 놓는 게 목숨을 지키는 일이라 느껴졌었지.’
하다못해 빗자루라도 들고 싶었지만, 수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격세지감이군! 그때는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내 과거와 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을 비웃고 있다니!’
남구가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는 아이들의 곁을 스쳐 지나며 썩은 미소를 슬쩍 흘리더니 매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승아를 비롯한 반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도 남구에게 겁을 집어먹어 섣불리 매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남구는 아이들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생수를 뜯어 머리와 얼굴에 흠뻑 뿌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
그 자리에서 2리터 생수통을 끝장내버린 남구가 햄버거를 데우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남는 손으로는 소시지나 어묵 따위를 들고서 하나밖에 없는 입속으로 쑤셔 넣기 바빴다.
‘아아, 정말 끝내주게 맛있군!’
화학 첨가제가 듬뿍 담긴 음식이 너무나 그리웠었다.
‘젠장! 세상이 벌써 망해 버려서 짜장면은 못 얻어먹겠네. 진짜 그리웠는데.’
남구가 햄버거를 베어 무는 데 전념하며 눈동자만 돌려 예솔이 기절한 듯 자는 곳을 살폈다.
비어버린 캔 음료와 빵 봉지가 주변에 흐드러지게 널려있었다.
입가에는 채 떨어지지 않은 부스러기들을 잔뜩 붙이고서.
‘그래도 죽고 싶진 않았는지 먹고 자는군. 언제 일어나서 먹었지?’
손 가는 데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저것 대충 집어삼킨 남구가 한시름을 돌렸다.
“후유, 이제 좀 살겠네!”
급히 요기를 마치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유리 창틀 너머에 방황하고 있는 아이들을 넘겨다 보았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 자신과 체격이 가장 비슷한 한 아이를 불렀다.
“어이, 김수철!”
“네? 저, 저요?”
수철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그래, 이리 와 봐!”
“히익!”
경기를 일으키는 중에도 자신의 이름을 어찌 아는지 의문이 잔뜩 배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걸핏하면 남구를 툭툭 건드리며 꽤 못살게 굴던 일진이었다.
남구를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괴롭혔던 친구였으며 후에는 크리처 무리를 합심해서 물리친 친구이기도 했다.
남구가 제 몫을 해내면서부터는 사이가 괜찮아졌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남구가 수철보다 더 강해지면서 감히 건드릴 수 없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구의 눈빛만 봐도 수철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관계가 개선됐었다.
“뭐해? 안 와?”
“힉! 가, 가요.”
수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남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주변 아이들은 명복을 빌어주는 표정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남구는 화장실로 수철을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너덜너덜 걸레가 다 된 새빨간 교복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수철은 사형수가 단두대에 목을 집어넣기 직전의 모습으로 땅만 보고 벌벌 떨기만 했다.
얼마 못 가 단수가 되겠지만 지금은 물이 나왔다.
과거에 남구를 포함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참을 생존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였다.
꼼꼼하게 샤워를 마친 남구가 수철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벗어.”
땅만 바라보고 있던 수철의 눈이 바닥 타일 세 장 정도는 마땅히 들어갈 만큼 커다래졌다.
휘둥그레 눈을 뜬 수철은 무법천지가 된 세상에 자신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어버렸다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어쩌자고 남색인 놈에게 된통 걸려 버렸다.
그 많은 친구 중 하필이면 잘생기지도 않은 자신이 걸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도 지지리 없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탓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빨리 벗으라고.”
“히이익! 네, 버, 벗을게요.”
꼼지락꼼지락 옷을 벗으며 수철은 생각했다.
‘흐윽! 죽는 것 보다는 낫겠지. 그래도 샤워는 하고 볼일을 봐 다행이구나!’
피투성이의 몸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소름 돋게 끔찍했다.
죽지 못해 옷을 벗어 나가던 수철이 힐끔 남구의 알몸을 보았다.
수철의 눈은 다른 의미로 부릅떠졌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아니? 짜, 짱이다!”
피가 씻겨나간 남구의 육체는 이탈리아산 최상급 백색 대리석을 재료로 한 다비드상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유려한 곡선의 균형 잡힌 몸태 안에서 꿈틀거리는 뚜렷한 근육 조각의 생동감에 저도 모르게 황홀해졌다.
같은 남자가 봐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자태에 두려움은 어느새 홀연히 날아갔다.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아니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자태에 이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취향을 학교 화장실에서 깨달아 버렸다.
찬란한 육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어느새 교복을 훌러덩훌러덩 벗고 있었다.
수철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벗었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가다듬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남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샤워할 거야?”
“샤, 샤워요?”
남구는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며칠째 계속 입어 누렇게 찌든 수철의 속옷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자신이 벗어놓은 피에 절은 교복을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기며 수철에게 말했다.
“빨아!”
“허억!”
마음의 준비는 하였으나 수철은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무릎을 꿇은 채 목표를 주시했다.
주체할 수 없이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톡 튀어나온 목울대가 꿀렁였다.
“흐읍! 꼴깍!”
수철은 이제 자기도 자기 마음을 모르게 되어버렸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게 벌렁거렸다.
“최대한 빨아 봐!”
“커어억!”
수철은 너무 놀라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남구는 몸에 딱 맞는 올 하나 안 나간 멀쩡한 수철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빨아도 찌든 피가 빠지진 않겠지. 네 속옷도 그냥 버리는 게 낫겠다. 근데 샤워도 안 할 거면서 속옷은 왜 벗고 지랄이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무릎을 꿇어앉은 수철의 발치에 벗어놓은 피에 찌든 옷가지를 던져 놓고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텅-
서둘러 화장실 문밖으로 나왔다.
빨리 매점에 가서 이것저것 먹고 싶었다.
싸늘한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수철의 눈앞에는 자신의 누런 속옷과 갈기갈기 찢어져 새빨갛게 피에 절은 헝겊 조각들만 널려 있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오는 남구의 모습에 반 아이들은 찢어질 듯 눈이 부릅떠졌다.
모두 눈을 떼지 못하고 깔끔한 교복을 갖춰 입은 남구의 진행 방향을 따라 천천히 고개가 따라 돌았다.
참혹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몇몇 여자아이의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하아!”
“헤에!”
“꿀꺽!”
“어머머!”
“누구지?”
“숨어 있었나 봐!”
“다행이야!”
“정말 잘 됐다.”
남구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그대로 매점 문을 열어젖혔다.
몸을 반쯤 밀어 넣었을 때 무엇인가 잊은 듯 그대로 발을 멈췄다.
“아 참!”
남구는 다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치며 계단을 밟고 1층으로 올라가면서 지나가듯 말했다.
“배 안 고파?”
사뿐사뿐 두 칸씩 계단을 밟으며 순식간에 올라가 버렸다.
남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겨진 아이들은 앞다투어 부리나케 매점으로 뛰어들었다.
서른 명이 다 들어가기에는 다소 협소했지만, 갈증과 허기짐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아이들은 막무가내로 발 디딜 틈 없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지하로 내려온 남구의 어깨에는 최신 유행을 반영한 멋진 디자인의 커다란 검은색 백팩이 걸려 있었다.
매점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몸을 부대끼며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내줬다.
난장판이었다.
서른 명이 먹어 치운 음식물 껍데기가 온 사방에 널려 있었다.
탈진해 뻗어있던 은성이 들어와 묻혀놓은 핏자국이 매점 바닥 전체에 흥건했다.
어느새 깨어난 예솔도 일어나 앉아 작고 도톰한 입속에다 무엇인가를 잔뜩 집어넣고 있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을 보자 다른 반이라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한결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남구는 아이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생수통이 쌓여 있는 진열대로 이동했다.
챙겨온 백팩에 2리터짜리 생수통부터 집어넣으며 보지도 않고 수철에게 말했다.
“수철아, 컵라면 종류별로 끓여 놔!”
다 찢어졌고 빨아도 여전히 피에 찌들어 있으며 싸늘한 날씨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넝마를 걸친 수철이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면서 울상으로 컵라면을 챙겼다.
남구의 교복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빨아도 핏자국이 빠지지 않았다.
북새통을 이룬 매점 안에서 핏물을 사방에 묻히고 다니던 은성도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그 주변만 아이들이 없었다.
수철이 끓여 놓은 컵라면을 예솔과 같이 마주 앉아 호호 불어가며 입속에 넣었다.
남구는 아쉬운 대로 짜장 컵라면부터 먹었다.
예솔이 컵라면을 세 개째 비운 남구에게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부스러기와 라면 국물이 잔뜩 묻은 예솔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남구야, 고생 많았어. 죽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나도 돕고 싶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어.”
남구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으로 예솔의 미소와 말에 화답했다.
이내 컵라면에 코를 박고 눈썹이 휘날리게 젓가락질을 했다.
후루룩-
예솔이 남구의 저 삐뚜름하게 쪼개는 조소를 처음 봤었을 때는 무척이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썩은 미소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면으로는 잔혹하게까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흉측한 저 미소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마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이돌 뺨치게 잘생겨져서 생각이 바뀐 건 절대 아니야!’
예솔은 남구의 외모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했다.
그사이 화장실에서 씻고 돌아온 은성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흥미롭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반 아이들은 은성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바뀌어버린 반장 은성이 버젓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떠들며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구까지 몸이 바뀌어 있었다.
재앙과 멸망이 바로 눈앞에 현실로 닥쳐온 것을 모두가 체감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적응력을 발휘하여 닥쳐온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생존할 수 없었다.
은성은 그동안 겪었던 일과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생각을 같은 반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가감 없이 공유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목소리를 높이며 힘있게 말했다.
“그래서 우린 뭉쳐야 살아! 같이 움직여야 해! 일단 학교 어딘가에서 아직 살아있는 친구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겠지. 그리고 모두 우리 집으로 가자! 충분한 방어기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신기하구나!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과거와 똑같이 얘기하는군.’
과거에는 창을 넘어 들어온 은성이 교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반 친구들에게 은성은 히어로였다.
은성의 말을 거부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은성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었다.
한 아이가 한껏 톤을 낮춘 목소리로 옆에 있는 친구에게 소곤거렸다.
“우리가 경찰이야? 119구조대야? 무슨 힘이 있다고 다른 애들을 구해?”
속삭임을 들은 친구는 마찬가지로 땅만 쳐다보며 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자기는 저렇게 강한 몸을 얻었으니까 상관없겠지. 우린 다 죽을 거야!”
‘이거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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