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1주년
남구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교양있는 사람인 양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한 장면처럼 냅킨으로 입가를 콕콕 찍어 닦으며 소스가 묻은 입꼬리를 씩 들쳐 올렸다.
‘후후, 머지않아 한 장 더 나오겠지!’
안 나왔다.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래프트 이용권은 그래도 종종 심심치 않게 나오던 아이템이었다.
나오자마자 모두 버려지던 아이템이 정작 필요할 때는 어찌 된 영문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남구는 탄력 있는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서 외롭게 혼자 눈을 뜨자마자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포근한 이불을 열어젖히고 목 디스크 방지용 기능성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벽에 걸어 놓은 야한 달력을 쳐다보았다.
‘하! 벌써 이곳에 온 지도 육 개월이나 지났군.’
소환자 수용소는 아침이었지만 햇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사막 전갈들과 사투를 벌였었다.
남구의 백옥 같은 피부가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빨갛게 익어 있었다.
50 스텟에 이른 가공할 신체 능력 덕분에 점심 때쯤이면 물집이 다 가라앉고도 남을 것이다.
마티나는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언제나 호들갑을 떨며 남구를 대했지만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최소한 팀 단위로 공략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스테이지에 망설임 없이 투입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막 욱여넣는 것처럼 보여 관리자들은 언제나 불안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투입되는 남구를 마지막인 듯 배웅하고는 했다.
하지만 경망스러운 행동거지와는 딴판으로 마티나의 선구안은 꽤 정밀했다.
남구의 능력을 파악하고 최적의 미션을 선택하는 판단력이 탁월했다.
딱 남구의 한계에 맞추어 최대한의 생명 에너지를 벌 수 있는 임무를 집어내었다.
남구는 재앙이 시작한 날로부터 단 1년 만에 과거 자신이 20년 동안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으로 키워 왔던 신체 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구는 이것이 뿌듯함인지 허탈함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이제는 보상으로 받은 온갖 물품들이 수용소 내부를 가득 채웠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네!’
마티나는 결코 남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칭송받기 위해,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생명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 하루가 멀다고 남구를 데스 게임에 투입했다.
그간 남구는 혼자였기 때문에 오로지 개인 미션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보상이 생필품이었다.
데스 게임은 전투 그 자체가 다가 아니었다.
임무가 끝없이 연속되는 상황에서 보다 더 빠르게 육체적 피로를 풀 수 있는 안락함과 극심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정신적 안정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따라서 개인 보상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아이템들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남구는 피로 따위 하루도 안 걸려 회복하는 월등한 신체조건을 바탕으로 짚단 위에서도 꿀잠을 자는 달고 달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구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사용될 보다 강한 수단을 원했다.
개막전은 치렀으나 아직 본격적인 시작은 아니었다.
고트족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들도 고작 소환자 한 명으로 데스 게임을 치르는 사정은 다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유력 가문들만이 한두 명이라도 뽑아와 굴릴 수 있었다.
생명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해 경매에서 지거나 참여하지 못한 그저 그런 가문들은 손가락만 빨며 구경하는 처지였다.
지구에서 재미있는 모습을 보이는 몇몇을 미리 뽑아 온 목적은 생명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기 전 데스 게임에 목말라 있는 대중을 위한 특전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거대 가문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였다.
뽑아 온 소환자가 극소수이기도 하거니와 그들 모두 능력자들이었기에 운영만 잘한다면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켜 막대한 생명 에너지를 끌어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남구와 같은 자들은 특전으로 경매를 거처 값비싼 생명 에너지의 대가를 지불하고 미리 뽑아 올린 경우라 한 명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족속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 지금쯤 사망한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고트족처럼 엄청난 이득을 본 족속은 드물었다.
막대한 생명 에너지만 경매에 쏟아 넣고 일찌감치 소환자가 죽어 버려 본전도 찾지 못한 족속들이 수두룩했으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위해 너나없이 특전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마티나는 또다시 남구와 1:1 결투를 붙일 가문을 사방팔방 수소문하여 접촉했지만, 첫날 치러진 개막전 이후로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몸값이 높았던 오광수를 일주일 동안이나 가지고 논 인물이었다.
직접 본 자들이나 소문을 들은 자들이나 남구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하여 마티나는 어쩔 수 없이 몬스터 토벌 임무에 주로 투입했다.
덕분에 여태껏 매일 사선을 넘는 강행군을 해왔다.
남구는 생사의 고비를 간신히 넘겨 가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 무리를 어떻게든 해치우고 매번 임무를 달성해 냈기에 현재 마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팬레터와 각종 선물이 고트족 창고에 수북이 쌓여 처치 곤란이었다.
남구가 팬의 선물로 받은 촉감 좋은 실크 재질의 파란색 파자마 바람으로 역시 팬에게서 받은 침대인지 의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크고 폭신한 의자에 다가가 궁둥이를 붙여 앉았다.
털썩- 끼익-
그러고는 짙은 색상의 회장님 책상에 턱 다리를 꼬아 올리며 생각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소환 철이 도래했구나!’
매일같이 데스 게임이 치러질 것이고 선택 장애가 올 정도로 채널도 무수히 생겨날 것이며 그에 따라 마족들은 그토록 원하던 사람이 떼로 죽어 나가는 그림을 마음껏 볼 수 있을 터. 그리고 원 없이 환호할 것이다.
‘오늘 오겠군. 아니, 어쩌면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겠네!’
재앙이 닥친 날로부터 오늘이 딱 1년 되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무작위 소환이 시작됐다.
책상 위에 놓인 펭귄 모양의 예쁜 캐릭터 탁상시계를 들여다봤다.
짙은 색 회장님 책상과 캐릭터 탁상시계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남구는 인테리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구가 기거하는 1호실은 지구의 모던함과 세리야의 엔틱과 마계의 빈티지가 혼재해 무척이나 독창적인 디자인을 뽐내고 있었다.
‘아우! 배고파! 밥 줄 때가 됐는데?’
도르르르르-
‘음, 오는군.’
식사 운반 카트의 조그마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멈추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이어졌다.
드르르르륵- 차캉-
철창이 열리고 오늘도 다름없이 배식 담당 여자아이가 옅은 빨간색 머리를 푸석하게 흐트러트린 채 들어왔다.
남구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토마호크군.’
남구가 발을 걸친 책상에 빨강 머리 여자아이가 접시를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안녕? 페이!’
페이는 이곳 마계에 끌려온 소환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리야인이었지만 세리야 대륙은 구경도 못 해본 아이였다.
당연하게도 부모는 모두 데스 게임 중 사망했기에 고향이 마계라고 할 수 있는 고아였다.
이곳은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허드렛일을 하며 꽤 살고 있었다.
오늘따라 페이의 손이 분주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뚜껑 덮인 접시의 가짓수가 많았다.
남구가 은으로 만든 뚜껑을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허례허식이었지만 문화적 열등감이 있는 마계의 족속들은 격식을 차릴 때면 꼭 뚜껑을 사용했다.
식사를 올리던 페이의 눈꼬리가 가자미처럼 찢어져 남구를 째려봤다.
남구가 책상에 올려놓았던 발을 살포시 내렸다.
페이의 앳된 음성이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케이크도 있어요. 1주년이라 조금 더 신경 썼대요.”
“풋!”
남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뚜껑이 덮여 있어 음식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페이는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남구도 무심하게 툭 말을 뱉었다.
“케이크, 너 먹어!”
“안 돼요. 지난번에 한 입 얻어먹고 엄청 맞았어요.”
남구의 눈동자가 번개처럼 철창으로 향했다.
관리자가 철창에 어깨를 기대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페이가 고인 침을 꿀떡 넘기며 메뉴를 읊었다.
“토마호크 스테이크예요.”
남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전 스테이크라고는 먹어 본 적도 없는 남구였지만 이제는 뚜껑을 열기도 전에 또 페이가 말을 하기 전에도 이미 어떤 메뉴인지 대번에 알아맞혔다.
끼니마다 돌아가며 나왔지만, 메뉴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살짝 스치는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각종 채소와 빵과 수프를 올려놓은 페이가 빨갛게 익은 남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웰던이네요. 얼굴이 완전히 익었네? 이번에는 더운 곳에 갔었나 보죠? 혼자 들어가서 다치지도 않고 잘도 살아오네요?”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한마디 걸지 않던 아이였지만 육 개월이 지난 지금은 곧잘 말을 붙여왔다.
남구가 아이의 당돌한 얘기에 한쪽 입꼬리를 씩 비틀어 올렸다.
“왜? 죽었으면 좋겠어? 배식하기 귀찮아?”
페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너, 이제 좀 바빠질 거야.”
페이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요?”
남구가 철창 밖을 향해 턱짓했다.
푸석한 빨강 머리를 휘날리며 돌아본 페이의 눈이 더욱더 땡그래졌다.
“저 사람들······. 생김새가 좀 달라요.”
‘지구,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란다.’
수십 명이 펑퍼짐한 누런 거적때기를 걸치고 염소수염의 인솔하에 떼로 몰려들었다.
다들 경황없는 눈빛으로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연신 좌우로 고개를 휘저어댔다.
낙인찍힌 상처의 고통으로 하나같이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몇몇은 제어구에 심장을 당했는지 축 늘어진 채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았다.
“어머! 저, 저 가볼게요.”
도르르르르르-
눈치가 빤한 페이는 서둘러 배식대를 밀고 철창을 빠져나갔다.
아이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서 들어가!”
퍽- 으아악!
관리자들이 사람들을 발로 차고 목덜미를 잡아채며 철창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환된 사람들은 다섯 명씩 나뉘어 지정된 각각의 호실로 던져졌다.
남구만이 다른 세계에 있는 듯 육즙이 번들번들 흐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완전히 익어버린 남구의 얼굴과는 다르게 불그스름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가 김을 모락모락 올리고 있는 1호실로 네 명이 철창을 통과해 차례차례 굴러들었다.
퍼억- 아아악!
빠악- 크아악!
뻐억- 커억!
휘리릭- 흐으윽!
드르르르륵- 차캉-
1호실 바닥에 나뒹군 사람들이 굉음을 울리며 닫힌 철창 너머를 고통과 두려움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소환된 사람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지만 남구가 있는 1호실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철창 밖에서는 소환된 사람들이 여전히 차이고 얻어맞으며 구겨지다시피 각각의 호실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각양각색의 짐승 가죽이 깔린 1호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중얼거렸다.
“으으, 여기는 대체.”
“이제는 하다 하다 뿔 달린 놈들도 다 보는구나!”
“이 옷, 피부가 쓸려서 너무 아파!”
“흐으흐윽!”
‘오늘이 지나면 반 이상 죽어 나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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