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마계의 해안가
온통 검은색 털에 뒤덮인 몬스터가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껏 자세를 낮추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순간 몬스터와 예솔이 똑같이 우거진 수풀로 홱 고개를 돌렸다.
흑표범과 닮은 몬스터는 검은 털을 바짝 세우고 지체 없이 후다닥 꽁무니를 내빼버렸다.
부스럭부스럭 수풀을 헤치고 네 발로 걷는 목도리 스몰 드래곤 무리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서 한쪽 다리를 꼬고 올라탄 여유로운 남구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었다.
덩치가 가장 커다란 목도리 스몰 드래곤에 올라탄 남구의 뒤에서 아홉 마리나 되는 사납고 흉측한 형상의 드래곤 무리가 천천히 등장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은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무리생활에 특화돼 있었다.
단 한 마리의 이탈 없이 무리는 남구가 탄 우두머리의 꽁무니를 따랐다.
안도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다행이야! 딱 맞춰 왔어!”
“진짜 너무 무서웠어.”
크리에이터였다던 이탈리아 여자가 우두머리에 올라탄 남구를 하염없이 멍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공룡에 탄 모습 완전 그림이다. 영상에 담고 싶어.”
이내 볼멘 목소리로 남구를 향해 외쳤다.
“다시는 우리 두고 딴 데 가지 마세요.”
남구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어서 떠날 준비나 해!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지!”
“치이!”
한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덕분에 이제는 여자들도 남구를 꽤 편하게 대했다.
남구의 한마디에 움찔거리며 무섭게만 여겼던 처음과는 많이 달랐다.
코피를 흘리며 얌전해진 드래곤 무리 주변으로 여자들이 주춤주춤 모여들었다.
흉측한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외형에 주춤거리던 것도 잠시였다.
남구의 등장과 함께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린 여자들이 목도리 스몰 드래곤를 구경하며 공룡과 닮았다는 둥 웬만한 몬스터는 얼굴만 봐도 무서워서 그대로 도주하겠다는 둥 재잘재잘 품평회를 열었다.
멀찍이 떨어져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려보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보며 신기해했다.
터키 여자가 마치 바캉스라도 떠나려는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우리 바다 보러 가는 거예요?”
“하!”
남구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터키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얘들아! 마계의 바다 궁금하지 않아?”
예솔이 해맑은 목소리로 장단을 맞추었다.
“너무 궁금함!”
앞말을 강조하며 길게 늘이는 예솔의 애교 섞인 말투에 모두의 얼굴에서 피식피식 미소가 번져 나갔다.
남구가 타고 앉은 목도리 스몰 드래곤 위에서 일행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텐션 뭐야? 이 발랄함은 대체 뭐지? 어린애들은 어린애들이구만. 방금 몬스터한테 잡아먹힐 뻔한 애들이 맞기는 한 거니? 아우! 여자애들이 떼거리로 있으니까 영 적응이 안 돼.’
지하에만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인지 남구가 곁에 있어서인지 잠시 현실을 잊은 채 마냥 밝은 분위기였다.
들것에 누워있는 여자들마저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남들은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이 미지의 여정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며칠이 걸릴 수도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차례차례 또는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마계의 정글에서 여자들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며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고난의 여정을 남구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 했다.
일행에게 남구의 닦달이 이어졌다.
“너희 뭐하니? 수다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서 마음껏 떨어. 자! 빨리빨리 움직여. 환자부터 태워야 할 거 아니야.”
자기는 귀여움을 떤 적이 없다는 듯 절대 웃고 떠든 적이 없다는 듯 돌변한 예솔이 하나하나 지시하며 여자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예솔이 나서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보다 예솔이를 더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환자들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예솔이 한 명씩 곁에 붙였다.
2인 1조를 만들어 둘씩 같이 타게 했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에 올라탄 남구의 일행은 비상식량 겸 짐꾼인 가축까지 이끌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줄지어 정글을 헤쳐 나아갔다.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다.
자리를 잡고 불이 피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등 위에서 이루어졌다.
한순간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환자 때문에 달릴 수는 없었지만 꾸준한 속도로 쉬지 않고 나아갔다.
남구가 서두르는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쉬어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남구는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중간 예솔에게 진행 방향을 일러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남구가 단독행동을 하려 하자 경기를 일으키던 여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보내고 싶어 했다.
다시 나타날 때는 주로 생전 처음 맛보는 맛있는 과일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눈을 꼭 감고 말했다.
“으아, 이거 너무 맛있잖아?”
먹방계에서 알아주는 인지도를 구가했다는 말은 아무래도 진실 같았다.
“아아! 마치 설탕을 잔뜩 뿌린 부드럽고 폭신한 구름을 입 안에 쏙 넣은 느낌이야! 사르르 녹는 게 어쩌면 이렇게 달콤할까?”
‘방송 찍니?’
이탈리아 여자는 표현력만큼이나 식탐도 독보적이었다.
독이 든 열매를 따려다가 남구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었다.
‘뭐 빠지게 지켰는데 아무거나 주워 먹고 뒈지면 진짜 곤란해!’
남구는 불안감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막 주워 먹으면 안 돼! 피똥 싸고 죽는 수가 있어.”
“아이참! 알았다니까요.”
일행 중 유독 남구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먹성 하면 예솔도 빠지지 않는 인사였다.
미루어 봤을 때 물만 먹어도 살이 쪘다는 말은 순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예솔은 맛 표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입안에 쑤셔 넣을 뿐이었다.
“남구야! 더 없어?”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볼이 빵빵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으흠! 이제 거의 다 왔어. 도착하면 야크 고기 먹자!”
예솔이 일행의 짐을 한가득 지고 있는 커다란 야크를 힐끔 돌아보았다.
쩝-
‘몬스터니? 보통은 살아있는 놈한테 입맛을 다시진 않는데 말이야! 그 귀여운 얼굴로 어떻게 그럴 수 있니? 하긴, 별별 것을 닥치는 대로 다 잡아먹고 살았다고 했지.’
다시 앞을 돌아보며 말하는 예솔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이제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거 같아.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말을 마친 예솔이 진행 방향을 주시했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넓은 이파리를 활짝 펼치고 하늘 높이 자라나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졌다.
앞에 어떤 전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구는 거의 다 왔다고 말했지만,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똑같은 풍경만이 계속 이어졌었다.
우거진 정글의 수림이 앞으로도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남구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금방 어두워지겠는데?’
남구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충분히 적응 했을 테니까 속도를 좀 올려볼까?”
남구의 바로 옆에서 목도리 스몰 드래곤을 타고 있던 예솔도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일행 모두가 2인 1조로 묶인 그룹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일본 여자와 태국 여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솔이 남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속도를 내도 될 것 같아.”
“그래, 어두워지기 전에 후딱 가보자고, 이랴!”
무른 땅에 큼지막한 발자국이 더욱 넓은 보폭으로 찍혀 나갔다.
자칫하면 남구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남구의 뒤를 열심히 따라붙느라 모두 입을 닫았다.
속보가 이어졌고 조용한 가운데 쿵쿵거리는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육중한 발소리만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정글의 밤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어슴푸레해졌다.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의 발소리만 진동하는 가운데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씩 웃으며 옆에서 열심히 드래곤을 몰고 있는 예솔을 돌아보았다.
예솔도 곧장 남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후, 예솔아, 들려?”
예솔의 반달 같은 눈웃음이 떠올랐다.
“응, 신기해! 이런 우거진 밀림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다니!”
“으흐흐! 짠 내가 진동하는군.”
“아! 바다 냄새!”
파사삭-
남구와 예솔이 그간 갑갑했던 수풀을 헤치고 탁 트인 풍광으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경계까지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박차는 걸음마다 푹푹 파이며 거침없이 밀려 나갔다.
때를 맞추어 먼바다에서 철갑처럼 비늘을 두른 대형 고래 형상의 몬스터가 거친 파문을 일으키며 수면 위로 높이 튀어 올랐다.
예솔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환영 인사라도 하는 거 같아!”
일행 모두가 수풀을 헤치고 모래사장에 진입했다.
목도리 스몰 드래곤을 타고 일렬로 늘어선 일행은 하나같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수중 몬스터가 펄쩍펄쩍 뛰노는 광활한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광에 마왕마저 휴가지로 삼는다는 곳이었다.
여태 지하 터널에 갇혀 지내던 일행에게 탁 트인 바닷가의 노을 진 풍경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눈앞에 보이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일행은 감격에 겨워 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계라고 다를 게 없네?”
“생명의 핵을 운용하는 탓에 마계라 불릴 뿐이야. 똑같은 행성일 뿐이지.”
조용한 어조로 일러주는 남구를 예솔이 바라보았다.
남구만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남구가 핵산의 기운을 온몸 구석구석 말단까지 가속했다.
오감을 활짝 열고 날 선 감각을 줄기줄기 풀어냈다.
까만 눈동자가 섬광처럼 움직이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좀 더 돌아봐야겠지만 감각에 걸리는 게 없어. 일착이군.’
목도리 스몰 드래곤 무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죄다 몸을 숨겼다.
일행을 제외하고 인근에 느껴지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지하터널에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왜 다른 팀은 안 보일까?’
남구가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었다.
‘하긴,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험준한 밀림 속에 가려진 길을 찾아내기 쉽지 않겠지! 섬 꼭대기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도보로 오려면 상당히 고전 할 거야.’
모래사장은 섬 전체에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했다.
해안선 대부분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벤트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남구는 오히려 터널 안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환자가 회복해 최소한의 거동은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더욱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크리 섬은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남구의 시선이 마치 공동묘지인 양 비석들이 즐비하게 군집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눈꺼풀을 좁히고 안력을 동원하여 허리 높이의 비석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각각의 비석마다 해당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50개! 제대로 찾아왔어. 최종 목적지는 바로 저곳이군.’
모래 위에 각종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비석만이 멀뚱히 서 있을 뿐 이동 마법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포탈 발동 조건은?’
터널 안에서의 시스템이 이곳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리란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생존한 팀이 다 모여야 포탈이 발동하겠지.’
석실에서의 포탈 발동 조건과 동일할 것이다.
‘몇 팀이나 이곳으로 올까? 여자들은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솔로가 올까? 커플이 올까? 여기까지 와서도 여자를 놓고 또 생사결을 벌여야 하나?’
장관이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남구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예솔이 입을 열었다.
“남구야! 아직 끝난 거 아니지?”
‘은성이는 살아 있을까? 운명이 바뀌어서 알 수가 있나?’
생각을 털어버린 남구가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종지부를 찍고 싶군.”
목소리에는 결의가 가득 묻어났다.
‘어딘가에서 보고 있겠지? 마왕 새끼야?’
더는 잡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각종 위험에 대비하며 움직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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