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모래사장의 성채
피부가 익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태양 빛이 모래사장을 뜨겁게 달구며 쏟아져 내렸다.
열기의 아지랑이를 뚫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히히!
-호호호!
모래마저 타들어 갈 듯한 땡볕 아래에서 도무지 극한의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 시원해!”
일본 여자와 태국 여자가 고운 모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일본 여자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상으로부터 대략 50m.
20명은 충분히 들어가 살만한 대형 오두막이 달랑 굵직한 나무 한 그루에 의지한 채 마치 공중 부양이라도 한 것처럼 매달려 있었다.
모래사장과 밀림이 맞닿은 경계에는 엄청난 규모의 대형 파라솔을 쳐 놓은 듯 오두막의 그림자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늘막 아래에서 오두막을 올려다보던 일본 여자가 따뜻한 모래에 발을 묻은 태국 여자에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무 위에 저런 큰 집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저 오두막이 만들어지는 걸 바로 옆에서 보았으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못 만드는 게 없는 거 같아. 앉은 자리에서 뚝딱뚝딱 다 만들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50m까지 마법을 날리는 사람은 드물다며?”
“응! 거의 없대.”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두막을 높은 나무 위에 지은 것도 모자라 뾰족뾰족하게 깎은 두껍고 키 큰 아름드리 통나무를 이용해 일대에 철통같은 목책을 세웠다.
목책 위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발판까지 만들어 높은 위치에서 밖을 경계할 수도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졌다 뿐이지 견고한 성벽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목책의 바깥쪽은 군데군데 피가 튀어 있었다.
멋모르고 덤벼온 대형 몬스터가 목책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고 남구와 예솔에게 집중 공격을 당해 죽은 흔적이었다.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오지에서 이토록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가롭게 모래찜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남구가 자리를 비워도 튼튼한 성벽과 높이 떠 있는 오두막이 그녀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주거지는 화수분같이 하루가 지나면 또 무엇인가가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터전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견고해졌다.
태국 여자가 자신의 볼록 튀어나온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점심 메뉴는 꽤 맛있었어. 너무 과식 했나?”
일본 여자가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살이 야들야들 한 게 정말 입에서 살살 녹더라. 그 스테이크, 어떤 고기로 만든 거야?”
잠시 생각하던 태국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이히히, 나도 몰라!”
“호호호!”
태국 여자가 겸연쩍게 웃자 일본 여자도 따라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맸던 두 여자는 마음껏 고기를 먹고 달구어진 모래에 등을 지졌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행의 짐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내려온 고마운 야크는 벌써 모두의 뱃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근래 침입한 몬스터가 많아서 요즘은 매끼 고기를 먹고 있었다.
어떤 몬스터의 살코기를 이용했는지 그날 요리 당번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다.
그야말로 좀비 출현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안정감이었다.
조금 전 풍미가 느껴지는 몬스터 스테이크를 2인분이나 뚝딱 해치운 태국 여자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 이곳에 끌려온 지 얼마나 됐을까?”
일본 여자가 잠시 생각하는 듯 허공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지하 터널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해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이곳 해안가에 온 지는 한 달 조금 넘었지?”
“한 달 만에 이렇게 튼튼한 요새를 지은 셈이네? 그것도 혼자서.”
“우리는 아팠지만 다른 여자애들은 좀 도왔잖아?”
“그걸 도왔다고 해야 하나?”
“그, 그런가?”
“손도 안 대고 물건을 옮기니까 도움도 거의 필요 없는 거 같아. 뚝딱뚝딱 정말 빨리 만들어.”
일본 여자가 태국 여자의 몸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요즘 몸은 좀 어때?”
태국 여자도 제 옆에서 모래찜질 중인 일본 여자의 안색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되물었다.
“많이 좋아졌어. 넌?”
“나도 많이 나았어. 해독초인가? 이거 먹고 나서부터는 회복이 빨라졌어.”
일본 여자가 녹색 물이 담긴 페트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태국 여자도 모래에 꽂아 두었던 페트병을 들어 올리고 같이 찰랑찰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맞아! 이게 진짜 효과가 좋은 거 같아!”
갑자기 표정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근데 녹색인 게 좀 마음에 안 들어. 난 녹색만 보면 경기할 것 같아. 그 빌어먹을 고블린 새끼.”
일본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태국 여자도 따라 웃었다.
“이히히!”
생사고락을 같이해서인지 돈독해진 둘은 한 명만 웃으면 여지없이 웃음이 전염되었다.
이제는 농담처럼 웃어넘길 만큼 둘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일본 여자가 웃음을 그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끌려 와서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죽기 직전에 살아나서 좋다고 해야 하나?”
태국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천운이지! 그 많은 사람 중에 살아서 여기 도착한 사람은 지금까지 우리가 다잖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일본 여자가 비스듬히 누운 채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남구 사마는 또 지붕 위에 올라가 있겠지?”
태국 여자도 덩달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요즘엔 뭐 더 안 만들고 저기 올라가서 경계만 하던데?”
올려다보는 일본 여자의 눈동자에 경탄의 빛이 차올랐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태국 여자가 목을 빼고 우거진 정글을 넘겨다봤다.
“살아 있는 사람이 저 정글 어딘가에서 아직 헤매고 있다는 얘기겠지? 포탈이 안 열리니까.”
“남구 사마 말대로라면 그렇겠지.”
“여태 정글 안에서 살아 있다니! 누군진 모르지만 참 끈질기다.”
일본 여자가 올려다보던 고개를 바로 하고 태국 여자에게 눈을 맞췄다.
“여기 끌려온 남자들은 모두 엄청나게 강하잖아.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겠지! 하지만 여자들은 많이 죽었을걸?”
태국 여자가 몸서리쳤다.
“흐윽! 죽은 얘들 생각나! 끔찍해!”
일본 여자가 해독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촉촉한 입술을 열었다.
“남자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몸은 하나니까 여자들은 대부분 죽었을지도 몰라. 네 말 대로 우린 정말 운이 좋았던 거지.”
“그러니까! 남구는 어떻게 반나절 만에 여길 찾아왔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해독 주스도 만들어 주고. 이런 걸 다 무슨 수로 알았을까?”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신이 있다면 남구 사마 같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 고블린이 생각나 몸서리치던 태국 여자가 갑자기 들떠 수다를 늘어놓았다.
“사이비 종교 하나 만들어도 될걸? 신도들 엄청라게 늘어날 거야. 내가 살던 곳에 교주는 누구나 사이비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엄청 잘 먹고 잘살았어.”
“남구 사마 잘 꼬드겨봐! 지구에서 사이비 종교 하나 만들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겠다.”
“푸훗!”
“호호호!”
예솔이 기다랗게 늘어진 넝쿨을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와 모래사장에 사뿐히 착지했다.
착-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어머!”
“아이, 깜짝이야!”
예솔이 둘을 손짓해 불렀다.
“어서 집으로 올라가! 사람들 오고 있어.”
“어! 정말?”
“에에? 빠, 빨리 올라가자!”
모래 찜질을 하고 있던 두 여자는 오두막 밑 그늘막에서 서둘러 벗어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휘저었다.
둘은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꺅!”
“히익!”
발판에 발이 닿자마자 태국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보여 주면 신도들이 엄청나게 열광할 텐데.”
“호호호, 내 말이!”
남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뭔 소리야?”
태국 여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히히, 몰라도 돼요.”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가듯 일본 여자도 웃어 젖혔다.
“호호호!”
남구가 무섭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좀 살만해졌다 이거지? 빠져 가지고. 긴장해! 누군가 오고 있어.”
놀이기구를 탄 아이같이 해맑게 웃던 웃음소리가 순간 쏙 들어갔다.
“알, 알았어요.”
“흡! 네, 네!”
남구에게 당겨져 오두막에 안착한 둘을 올려다보던 예솔이 주위를 둘러싼 목책에 올라 밖을 내다보았다.
곧바로 남구가 예솔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50m 높이에서 완전무장을 갖추고 떨어져 내렸어도 워낙 가볍게 착지하여 넝쿨과 나무못으로 단단히 고정된 목책의 바닥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썩을 놈들! 눈깔이 삐꾼가? 왜 이렇게 늦게 와?”
투덜거리는 남구를 예솔이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야? 안 보이는데?”
남구가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저기, 나무 흔들리는 거 보이지?”
예솔은 짙은 속눈썹이 기다랗게 자라난 쌍꺼풀진 눈을 가늘게 좁히고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뚫어져라 넘겨다보았다.
우거진 수풀이 바닷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멀찍이 넘겨다 보던 예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거랑 구별이 돼?”
“너무 멀긴 하군. 순수 감각만으론 잡아내지 못할 거야. 넌 아직 내력의 도움을 못 받으니까.”
예솔이 귀를 쫑긋거렸다.
“어? 이제 들린다.”
밀림 속에서부터 날붙이의 마찰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치열한 전투의 여파로 우거진 수풀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수풀의 흔들림은 점점 모래사장을 향해 이어졌다.
-챙! 챙챙챙! 차자자장!
-꺄악!
남구가 흔들리는 수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병장기를 든 놈이 셋! 서로 붙었군. 삼파전인가? 아니야, 이 대 일 같은데? 싸우는 놈 모두 근접 무기를 사용해!”
단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쇳소리로 세세한 전황까지 파악하는 남구를 예솔이 놀란 눈으로 우러러보며 말했다.
“여자들도 있는 거 같아.”
남구가 지나가듯 말했다.
“여자는 한 명뿐이야.”
예솔의 눈이 커졌다.
“뭐? 그럼 다 죽었다는 얘기네?”
남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싸우는 놈들이 같은 조인지 각각 다른 조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쟤들이 속한 조의 여자들은 다 죽고 단 한 명만 남았다는 의미지!”
“다른 조 아닐까? 여자가 한 명밖에 안 남았는데 인제 와서 싸우진 않을 거야. 같은 조였다면 벌써 결판이 나도 났겠지.”
“최소 2개 조, 최대 3개 조! 솔로 둘이서 편을 먹고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있던 놈을 습격 중이야.”
“한 명뿐이니까 더 치열하게 싸우겠다.”
“사생결단이지!”
“막바지인 걸 느끼고 있을 거야.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겠지?”
남구가 밀림 속을 더욱 주시하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모래사장 인근까지 거의 다 왔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비틀비틀 수풀을 헤치고 모래사장으로 뛰어나왔다.
‘한 달 동안 정글에서 고생 꽤나 했구만.’
머리카락이 물에 불은 미역처럼 엉겨 붙도록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넝마가 다된 옷을 걸쳐 반라와 마찬가지인 처참한 몰골이었다.
뛰쳐나온 여자를 발견한 예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휴! 꼴이 말이 아니다.”
“거지가 따로 없군.”
“본인 피는 아닌 거 같아.”
핏물을 함빡 뒤집어쓴 여자는 발바닥이 타들어 갈 정도로 달구어지고 푹푹 파이는 모래 탓에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비틀비틀 허우적거렸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며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여자가 수풀을 헤치고 나온 지점에서 곧 꺾인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흐드러지게 비산했다.
파사사삭- 크아아앙!
밀림을 벗어난 드래곤이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모래사장으로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여자의 뒤를 쫓는 드래곤은 육식 공룡의 형상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초식 공룡처럼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두꺼운 근육질의 두 다리로 달구어진 모래더미를 움푹움푹 제쳐내며 여자의 꽁무니를 쏜살같이 따라붙었다.
급한 마음에 탁 트인 모래사장으로 빠져나온 여자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정신없이 휘돌렸다.
단 한 곳을 제외한다면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래사장만이 넓게 펼쳐진 해안가에서 목책은 눈에 쉽게 들었다.
견고하게 서 있는 목책을 발견한 여자가 사력을 다해 달리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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