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결전 (2)
마왕은 권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한쪽 팔걸이에 체중을 실은 채 진입하는 인간들을 무심한 눈으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구의 눈동자는 느긋한 마왕의 동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왕 마라야스, 너를 직접 보게 되는구나!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 여유는 뭐니? 최후에도 가오는 포기할 수 없다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똥폼 잡을 만한 한 수가 있다는 건가?’
선두에서 앞서나가던 은성이 득달같이 마왕을 향해 튀어 나갔다.
휘젓는 양손의 궤적에 따라 번쩍이는 섬광이 쌍으로 바람을 갈랐다.
쌔액- 쌔애액-
은성의 주력 스킬 윈드 커터가 굉음을 울리며 곧장 마왕의 목으로 들이쳤다.
솟구쳐 오른 권좌 밑, 좌우에서 마왕을 옹위하고 있던 수하 둘이 은성에게 마주 튀어나갔다.
굉음을 울리며 날아드는 윈드 커터를 각자의 검으로 대번에 쳐냈다.
팡- 파앙-
막아낸 두 수하가 강풍에 휩쓸린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펄럭펄럭 나부끼며 저 멀리 주르륵 미끄러졌다.
은성이 달려들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은성의 뒤를 따르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가공할 윈드 커터를 무위로 돌려버린 두 수하 역시 한참을 밀려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간 은성의 미간이 깊숙한 내천자를 그리며 찌그러졌다.
뒤를 따르던 대원들의 얼굴도 온통 자글자글하게 일그러졌다.
멋들어지게 생긴 검을 들고 권좌 앞을 가로막은 두 수하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그 뒤로 기다란 지팡이를 짚은 마왕의 수하도 볼살을 푸들거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모두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전 내에서 오직 마왕 마라야스만이 기존의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새빨간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뭐지? 이건?’
남구의 눈동자가 바람처럼 휘돌며 대전 안을 훑었다.
‘결계!’
대전의 바닥과 벽과 천장 전체에 새겨진 실처럼 가는 선상을 따라 붉은 기운이 흘러 다녔다.
마왕의 눈동자에도 그 붉은 기운이 번득번득 휘몰아쳤다.
남구는 글탄 마법진만을 생명 포인트 투자 없이 공짜로 익힌 몸이었지만 비슷한 결을 가진 대전의 결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네 피가 섞인 확장 마법진!’
마왕이 발휘하는 스킬을 이곳 대전에 새겨진 마법진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이끌고 있었다.
어떤 스킬인지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마왕의 붉은 눈에서 펼쳐지는 스킬을 마법진이 대전 공간 전체에 광역으로 또 집중적으로 증폭하여 흩뿌려댔다.
‘마왕의 수하가 왜 세 명만 남았는지 알만 하군.’
이 공간에서 버틸 수 있는 자들만 남았을 것이다.
은성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공격대 대원들도 붉게 물든 눈동자를 희벅덕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개새끼야 죽어!”
퍼억- 으아악!
누군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곧 너도나도 옆 사람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여태껏 목숨 걸고 곁을 지켜주며 함께 싸워온 전우들이 철천지원수처럼 서로의 몸뚱이에 날붙이를 쑤셔 박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갑자기 온갖 스킬이 난무하며 비명과 욕설이 핏줄기와 함께 대전 안에 가득 차올랐다.
‘환상을 보는 것인가?’
남구가 목청을 높였다.
“다들 물러서!”
대전 안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곧바로 뒷걸음질 쳤다.
남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이지 마! 일단 들어서면 끝장이야!”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보며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들어찼다.
대전 안은 붉은 거미줄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먹이가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구가 입구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던 대원들을 멀찍이 물렸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예솔을 비롯한 호위진을 뒤로 하고 홀로 망설임 없이 뚜벅뚜벅 마법진이 가득한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뒤 없이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던 몇몇이 남구에게 붉게 변한 눈동자를 번뜩이며 고개를 돌렸다.
남구가 그들에게 오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입구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꽈과과과광-
뒤섞여 날뛰며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던 수십 명이 핏줄기를 기다랗게 뿌리며 입구를 통과해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넓은 복도에 산 사람과 시체와 토막 난 신체 일부가 한데 뒤엉켜 산더미를 이루었다.
-끄으윽! 아악! 내 다리! 내 팔! 크아악!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빠진 사람들이 서로 얽혀버린 팔다리를 풀지 못하고 바둥거리며 고통에 찬 비명만을 외쳐댔다.
멀쩡했던 사람들도 벽과 충돌한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골절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주문을 외는 목소리와 함께 힐링의 빛줄기가 쭉쭉 뻗어 나와 산더미처럼 쌓여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졌다.
대전 앞 복도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죽는다고 신음을 뱉어내는 뒤엉킨 동료들을 차근차근 수습해 나갔다.
남구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은성의 발밑 돌바닥이 바스러져 깊숙이 파여 있었다.
‘아이고, 넌 버텼니?’
남구의 무지막지한 중력제어에 은성만은 굳건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높은 권좌에 올라 앉은 마왕이 남구를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남구도 앞을 가로막은 은성의 어깨너머를 넘겨다 보며 마왕의 붉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마왕 마라야스의 미소는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쳐질 만큼 사악해 보였다.
상어같이 촘촘히 박힌 이빨이 가느다랗게 열리는 입술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곧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깔렸다.
“큭큭큭큭!”
뾰쪽뾰쪽한 이빨만 제외한다면 치켜 올라간 사나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꽤 잘생긴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두 개의 뿔이 굵직하게 자라나 있었으나 뿔 달린 놈들을 워낙 많이 자주 보아왔던 남구로서는 익숙했다.
화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남구도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비틀어 올렸다.
“풋! 어이가 없네? 뭘 쳐 웃고 지랄이야? 남의 정신 좀 가지고 논다고 네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남구의 비아냥에도 마왕 마라야스는 비릿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만 더욱더 치켜올렸다.
마왕은 소름 돋는 미소만 짓고서 아무런 대꾸도 비아냥도 공갈도 협박도 힐난도 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로 까만 눈동자를 마주할 뿐이었다.
남구를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가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광채를 번쩍거렸다.
남구의 까만 눈동자에도 붉은 기운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응?’
주변 배경이 전환되며 환상인 듯 실제인 듯 17살의 남구는 마왕성의 대전이 아니라 쇳소리가 짤그랑거리는 고문실에 구속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 몸에 난 상처는 대부분 고문 때문에 생긴 거였군.’
거꾸로 매달린 저 아이는 자신이 아니라고 냉철한 이성은 말하고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느낌이 들었다.
남구 자신이라 똑똑하게 느껴졌다.
비릿한 혈향과 쇳내와 쇳소리와 야비하게 웃으며 채찍질하는 고문관들의 남루한 모습과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까지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생생했다.
구속되어 거꾸로 매달린 아이는 다름 아닌 남구가 차지한 육체의 본래 주인이었다.
남구가 처음 육체를 얻었을 때 감탄하며 보았던 너무도 잘생긴 앳된 미소년의 얼굴을 한 아도니수스였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닌데?’
하지만 오감은 이성을 부정했다.
제 기억이 확실하다고 남구의 모든 감각 기관이 인정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마왕 마라야스의 목소리가 골치가 아프도록 울려 퍼졌다.
[큭큭큭, 여기까지 온 답례는 해야겠지! 기억제어를 풀어 주마!]
기억제어로 제한되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17년간 마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모두 돌아오고 있었다.
‘하! 이럴 수가! 난 아도니수스였어.’
아도니수스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은 남구라는 병약하기 짝이 없는 멀고 먼 타 행성의 갓난아기의 몸으로, 육체는 마법진에 재워져 육체 쟁탈전의 제물로 바쳐졌었다.
[병신과 다름없는 인간의 몸뚱이에 가두었는데 제 육체를 찾아 용케 여기까지 기어 왔군! 훌륭해! 크크크!]
마왕은 아도니수스가 죽지 않고 계속 고통받길 원했다.
그래서 아도니수스의 영혼을 가둘 육체를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남구라는 이름의 갓난아기는 미성숙한 몸으로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 절망적이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갓난아기의 몸에 기억을 봉인한 아도니수스의 영혼을 쑤셔 넣었다.
또한 아도니수스의 껍데기만 남은 육체는 마족이라면 누구나 더없이 치욕적으로 생각하는 육체 이양의 형벌을 가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도니수스는 제 육체를 찾아 마왕의 앞에 버젓이 우뚝 서 있었다.
마왕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하하하하하!]
마왕의 웃음소리에 남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마왕 마라야스! 고맙다고는 못하겠군. 넌 모르겠지만 네가 선물한 그 나약한 육체로도 난 아득바득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두 번째 인생에서 결국 내 몸을 내가 찾은 셈인가?’
남구는 아도니수스이자 정신부터 육체까지 온전히 마계의 마족이었다.
그저 기억이 지워진 채 자신을 남구라는 지구의 인간으로 의심의 여지 없이 믿고 살아왔을 뿐.
‘후후, 어쩐지! 인간의 나약한 정신력으로는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하지!’
모든 것의 퍼즐이 얼추 맞추어졌다.
‘과거로 역행해 다시 남구의 어린 시절 몸으로 되돌아갔을 때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약해져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어.’
남구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무엇인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육체를 얻고 나서 내 몸처럼 느껴졌던 연유도 확실한 인과 관계가 있었군. 내 잔악무도한 본성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도 알만 하구만.’
글탄족의 대장군 베드로가 몸뚱이만 취했을 뿐인 자신을 어째서 정당한 상속자로 인정하고 주군인 양 그토록 깍듯하게 대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실제 주군이었기 때문에 받들어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부모의 최후도 형제의 죽음도 가문의 멸망도 그때 느꼈던 감정 한 오라기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 아비와 마왕과의 최후의 결전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라이벌이었던 글탄족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고 육체 이양의 형벌이라는 최고형으로 치욕까지 안겨주며 철저하게 파괴해버린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혈혈단신 인생에 인제 와서야 울컥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들끓었다.
순간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삐쭉 솟으며 머리가 차게 식었다.
비틀인 입술을 뚫고 웃음이 셌다.
“으흐흐흐!”
‘네 환영 마법에 잡아 먹히길 바란 거였군. 그래서 기억을 되돌린 거야. 기억을 되살리면 내가 이성을 잃고 피를 토하며 미쳐 발광이라도 할 줄 알았냐?’
남구는 그간 잃었던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 가며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오러 윈드 커터를 막아내고 있었다.
쌔애액- 팡- 파아앙-
남구의 눈에 비친 은성이 제 아비로 보였다.
은성도 자신을 누군가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남구는 아비의 형상을 한 자가 은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은성아! 내가 마왕의 형상이라도 하고 있나 보지?’
아무리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를 차게 식혀도 점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갔다.
정신없이 회피를 이어 나가던 남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정신방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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