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장날
견고하게 서 있는 목책을 발견한 여자가 사력을 다해 달리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목책 발판에는 목책을 넘어오려는 몬스터를 대비해 곧은 나무를 깎아 만든 투창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뾰족한 끝부분이 핏물에 절어 붉게 물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솔이 투창 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자는 뒷전인가 봐!”
우거진 정글 속에서는 여자가 몬스터에 잡아 먹히든 말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여전했다.
남구의 비틀린 입술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풋! 뭐 때문에 싸우는고 있는지 잊은 건가? 치고받느라 정신이 없구만.”
예솔도 한심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멍청이들! 여자가 달랑 한 명 남았는데 죽으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람?”
끼이익-
남구가 시위를 당기며 한마디를 툭 날렸다.
“병신 짓 하고 있는 거지!”
파지지직-
끊어질 듯 당긴 시위에 푸른 뇌전이 바작바작 몸집을 키웠다.
커다란 몬스터의 그림자가 달리는 여자와 그 일대를 넉넉하게 뒤덮어 버렸다.
눈앞에 그림자가 지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절규했다.
“히이익! 살려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은 몬스터가 송곳 같은 이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타액이 주룩주룩 떨어져 내리는 아가리를 찢어질 듯 열어젖혔다.
퉁- 쐐애애애액-
사색이 되어 목책을 향해 위태롭게 달리는 여자를 푸른 뇌전이 스치듯 돌아들었다.
퍽-
여자의 머리 위에서 곧장 떨어져 내리던 쩍 벌어진 아가리에 타원을 그리며 돌아든 전격 화살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빠지지지직-
푸른 뇌전이 몬스터의 커다란 몸뚱어리 전체에 휘몰아쳤다.
감전되어 빳빳하게 굳어버린 몬스터는 울부짖지도 못했다.
쐐쐐애액- 쐐액- 쐐쐐쐐애액-
살대에 기다랗게 맺힌 붉은 광채가 레이저 빔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수히 허공을 갈랐다.
퍼버벅- 퍽- 퍼버버벅-
번쩍거리는 푸른 뇌전에 휩싸인 몸뚱어리에 붉은 점박이가 촘촘히 박혀 들었다.
집채만 한 대형 육식 몬스터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알록달록한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미친 여자처럼 반라에 산발하고 달리던 발걸음이 넓게 드리운 몬스터의 그림자를 벗어났다.
‘점화!’
꽈아앙-
치솟는 화염과 함께 한쪽 볼이 뭉텅이로 터져 나갔다.
부서진 이빨 조각들이 강렬한 햇살에 반짝거리며 흩날렸다.
휘이이익-
기우뚱 씰그러진 몬스터의 가슴팍에 바람을 가르고 한참을 날아온 투창이 꽂혀 들었다.
퍼억-
크아아아아앙-
전신을 타고 흐르던 뇌전이 사라지자 천지를 울리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와! 남구야! 나 맞췄어.”
투창이 꽤 먼 거리를 날아 정통으로 꽂히자 폴짝 뛰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 예솔을 남구가 힐끔 쳐다보았다.
‘하! 격세지감이구나! 그래,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지. 완전히 달콤·살벌해졌군.’
몬스터의 울부짖음과 폭발음에 남자들끼리 서로 싸우던 소리가 멈추었다.
곧 세 남자가 서로 뚝 떨어져 멀찍이 거리를 두고 수풀을 헤치며 모래사장으로 튀어나왔다.
‘어? 저놈은?’
전신을 다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육중한 가오린 연 모양의 철제 방패가 성한 곳 없이 우그러져 있었다.
모서리 부분은 온통 이가 빠져 마치 톱날같이 우툴두툴했다.
갑옷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볼 빨간 놈! 용케 살아 있었군.’
볼 빨간 남자의 지금 몰골은 25명이면 족하다는 얼토당토않은 포부를 밝히던 처음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긴장과 조급함에 허덕였다.
부위마다 떨어져 나가고 찌그러지고 깨진 철재 방어구의 표면에는 상처 입은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핏물과 싸웠던 상대의 혈액이 뒤죽박죽 범벅이 되어 울긋불긋 불들어 있었다.
볼 빨간 남자와 대치한 두 남자의 몰골도 피투성이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여자는 볼 빨간 놈 소유로군. 시작할 때 두 명의 선택을 받았었는데 결국 한 명만 남은 모양이지? 나 아니었으면 저 한 명마저 지키지 못했겠어.’
볼 빨간 남자는 유일하게 남은 제 소유의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몬스터를 향해 달려 나갔다.
두 명의 남자는 등을 보이며 달려 나가는 볼 빨간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여자를 노리는 거대 육식 몬스터를 잡기 위해 협공하지도 않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그저 남의 일인 양 손 놓고 구경만 했다.
볼 빨간 남자가 몬스터를 해치운 다음을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2차전을 대비하던 그들의 눈에 별안간 신기루 같은 모습이 들어왔다.
광활한 모래사장에 삐죽삐죽한 목책이 마치 성벽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나무 위에 지어진 오두막은 고개가 아플 정도로 젖혀야 볼 수 있었다.
한쪽 귀가 날아간 남자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하늘 높이 매달린 오두막을 올려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저, 저거 뭐지?”
“한참 전에 도착한 놈이 있었군. 아주 성채를 지어 놨네! 허 참,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데?”
대답한 검은 머리 남자가 목책 위에서 얼굴과 상체 일부만 드러낸 남구와 예솔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지 게슴츠레하게 좁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쟤 기억나?”
남구의 질문에 예솔이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저 검은 머리 남자, 지금은 없지만, 총을 가지고 있던 놈이야.”
“아! 그래? 사실 난 그때 너한테 정신이 팔려서 다른 남자들은 자세히 못 봤어.”
‘이 상황에 그런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하는구나!’
남구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크흠! 여자들이 6명이나 저 남자를 선택했었지! 지금은 다 죽었나 보군.”
“그래? 자기 혼자 살아남았네?”
“여자들을 못 지켰다고 약하다 생각하면 안 돼. 공격에 특화된 탓이야. 그 번개같이 빠르던 칼 소리의 주인이 바로 저놈이었군.”
예솔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려 검은 머리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으음! 손잡이가 예쁘게 생긴 검이네? 펜싱 칼처럼 가늘고 길다. 찌르기용 검을 쓰는 건가?”
남구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찌르기가 주력이야. 레이피어, 불어로는 에뻬라고 부르지!”
영어 한마디 못 하던 남구가 불어를 언급하는 의외의 모습에 예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발이 저린 남구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툭 말을 뱉었다.
“시스템이 무기명하고 성능 같은 거 시시콜콜하게 다 알려주니까. 난 거의 모르는 무기가 없어.”
“아! 그렇구나! 귀가 잘린 남자는 상당히 긴 창을 들었다.”
“원래 저 창을 가지고 있던 놈은 다른 놈이었어. 저놈은 조그마한 나무 방패랑 칼을 차고 있었지. 지하 터널에서 얻은 전리품인 모양이군. 한쪽 귀랑 바꿨나?”
예솔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누가 무슨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다 기억해?”
“생존 본능이랄까?”
“잔머리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까 진짜 똑똑하다.”
에솔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구를 돌아보며 질문을 이었다.
“저 창은 이름이 뭐야?”
남구의 막힘 없는 브리핑이 술술 흘러나왔다.
“저건 파르티잔이란 창이야. 찌르기 파워를 높인 거지만 베기도 가능하지! 창날 밑에 두 개의 돌기로 방어도 가능해!”
“와, 다목적 창이구나! 정말 모르는 게 없네?”
“풋! 다들 무기랑 방어구들이 아주 최상급이구만. 명품 아닌 게 없네?”
남구는 수용소에서 단체전 보상으로 나온 다른 사람들의 스킬과 무기와 방어구 등을 전혀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각 족속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이곳에 투입된 인원들은 모두 아이템을 독점했을 것이다.
10명씩 나뉘어 지하 터널에 투입된 각 조의 최종 생존자이니만큼 이벤트를 거치면서 맞선 상대의 아이템까지 획득하여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곁에 딱 달라붙어 있던 예솔의 청아한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 공룡 같은 몬스터 다 죽어 가.”
몬스터는 얼굴 한쪽이 폭발해 터져 나갔고 가슴에 투창이 박혀 들었지만 상대하는 볼 빨간 남자의 상태도 멀쩡하지 못했다.
볼 빨간 남자는 상처 입은 몸으로 뙤약볕 아래서 하염없이 구슬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빨간 볼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태양의 강렬한 직사광선에 철재 방어구도 그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발이 푹푹 빠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사력을 다해 재빠르게 움직이느라 거친 숨을 하염없이 토해냈다.
“허억! 허억!”
하지만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우듯 쉴 새 없이 몬스터를 난도질했다.
붕- 붕- 부웅- 촤악- 촤아악-
인근 모래사장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핏줄기에 붉은색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잡아먹힐 뻔한 여자는 몸을 피해 멀찍이 물러나 헐떡거렸다.
볼 빨간 남자는 탈진 상태였으나 쏜살같이 들이치는 쩍 벌어진 아기리를 방패로 되받아쳐 밀어내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
대가리를 들이밀 때마다 얻어맞는 충격에 거대한 몬스터가 비틀거렸다.
예솔이 다 죽어가는 몬스터를 보고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냥 놔뒀으면 우리가 잡았을 텐데 LP 아깝다.”
남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작 한 마리 LP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인터셉트라는 게 있잖아.”
“인터셉트?”
“만고의 진리가 있지!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긴다.”
예솔이 당최 알 수 없다는 듯 강아지처럼 갸웃거렸다.
너덜너덜 전신이 도륙 난 몬스터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절뚝이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삽으로 퍼 올리듯 뿌려지는 모래를 고스란히 덮어쓰면서도 볼 빨간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고 거칠게 숨만 쉴 뿐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화!’
꽈아앙-
화살이 박혀있던 가슴팍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틀어박혔던 투창의 뾰쪽한 창끝이 내부에서 산산이 부서져 살점이 섞인 핏줄기와 함께 몸 밖으로 파편을 쏟아냈다.
심장이 터져버린 몬스터는 포효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거대한 몸뚱어리를 고목이 넘어가듯 서서히 모래사장에 처박았다.
쿠궁-
목책 밖의 모든 시선이 남구에게 꽂혀 들었다.
몬스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너덜너덜하게 볼이 터져 나가 있었기에 방금의 폭발이 남구의 스킬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3 LP 획득]
‘젠장! 덩치에 비해서 너무 짜네!’
[생명 포인트 : 20145 LP]
‘그래도 모래사장에 도착한 뒤 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3610 LP나 모았으니까.’
여자들의 눈에는 그저 나무 꼭대기에 올라 뚝딱뚝딱 집을 만들어 버리고 시시때때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척척 잡아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남구는 필사적으로 생존을 이어 나간 것이었다.
단지 얼굴에 고된 티가 나지 않은 것뿐이었다.
“어? 남구야! 저 남자들 바로 덤빈다.”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진 남구의 망막에 또다시 시작된 세 남자의 혈투가 또렷하게 상을 맺었다.
‘음! 귀가 날아간 놈은 아직 창 놀림이 어색하군.’
그에 비해 검은 머리 남자의 칼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에뻬의 송곳 같은 칼끝이 볼 빨간 남자의 갑옷 사이를 스쳐 지났다.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연속 동작이 엄청난 속도로 쏟아졌다.
‘자연스러워! 위화감이 전혀 없군.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구만.’
공격을 이어가다가도 슬쩍슬쩍 거리를 두고 쉬고 있었다.
그런 전투 방식은 창을 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솔로몬의 판결대로 여자를 뚝 잘라 절반씩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일.
볼 빨간 남자를 누가 처치하든 여자를 누가 차지하든 어차피 저들끼리의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껏 서로를 경계하는 둘의 전투 방식 덕분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볼 빨간 남자는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볼 빨간 남자는 정글에서부터 두 남자에게 집요하게 쫓겼고 모래사장으로 나온 후에는 여자를 잃을뻔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몬스터를 상대했으며 몬스터가 쓰러지자마자 또다시 득달같이 달려드는 두 남자에게 공격받느라 목책 위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살필 경황이 없었다.
세 남자의 역량과 스킬과 스타일을 면밀하게 관찰하던 남구가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거이거! 한 달 넘게 잠잠하더니 오늘이 장날이구만.”
이 대 일의 목숨을 건 승부를 침까지 꼴깍꼴깍 삼켜가며 집중해서 관전하던 예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구를 돌아봤다.
“장날?”
남구가 턱짓하는 방향을 따라 예솔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향했다.
높게 자라난 나무 꼭대기에 올라 모래사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염탐하는 자가 있었다.
이로써 10명씩 묶였던 각 조의 생존자가 모래사장에 모두 모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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