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룰렛 이용권
[룰렛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긍정의 의지를 감지한 시스템은 곧바로 룰렛을 돌렸다.
마치 파친코의 슬롯머신을 모방한 듯 보상 아이템의 각종 사진이 한 줄로 빙그르르 계속 돌았다.
돌아가던 룰렛이 멈추었을 때 보이는 사진의 물품이 보상 아이템으로 주어졌다.
보상은 이렇듯 무척이나 단순하게 진행됐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아이템은 그렇지 않았다.
같은 사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스템이 제공하는 보상 아이템은 그 종류와 수량에 한계가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는 무수한 사진이 남구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아우! 정신 사나워.’
개막전을 관람한 관객들도 지금 남구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을 제어구를 통해 똑같이 보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보상을 일정한 형식과 절차 없이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그냥 막 던져 줄 수는 없었다.
모두가 열광하는 축제를 그렇게 성의 없이 마무리할 수는 없는 일.
보상 또한 스테이지를 지켜본 관객들의 또 하나의 볼거리였기에 나름대로 흥미를 유발할 방법을 동원한 듯싶었다.
보통은 여러 스테이지 중 각자가 원하는 곳을 선택하여 골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개막전의 명목하에 독점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마티나는 상당한 이득을 챙겼을 것이 틀림없었다.
룰렛 시스템에는 꽝도 있었다.
돌아가던 룰렛이 멈추었을 때 시스템은 큼지막한 크기로 ‘꽝’이라는 글자를 왕왕 출력해 왔다.
그럴 때면 제어구를 부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당한 시기에 스톱을 외쳐주세요]
남구는 외치지 않았다.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스톱!’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현재 남구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일단 양말이라도 좋으니 꽝만 나오지 마라!’
어떤 사진인지도 짐작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팽그르르 돌아가던 이미지가 서서히 그 속도를 줄였다.
보상 아이템의 사진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서도 보였고 칫솔이나 면도기 같은 생필품도 보였으며 도검류와 총기도 보였다.
룰렛은 사람들이 환장하는 스킬 습득 마법서의 이미지를 간당간당 힘겹게 넘겼다.
‘썩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남구의 눈앞에 한 장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멈추었다.
‘이건!’
임펙트를 주기 위함인지 오직 당첨된 사진만이 큼지막하게 출력되었다.
사진의 이미지는 검은색 등산화였다.
[축하합니다. 솔로모니사(社) 특수작전용 산악 전투화 PRO-201에 당첨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보상 아이템 중에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즐비했다.
꽝과 다름없는 아이템이 허다하게 나왔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 당첨된 아이템이 남구는 꽤 만족스러웠다.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으흠, 그래도 맨발로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남구의 등 뒤 철창 너머에서 마티나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보상받는 법은 또 어떻게 알았어?”
마티나와 그 뒤에 병풍처럼 늘어선 관리자들은 남구의 뒤통수를 마냥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떠들어 댔지만 남구의 신경은 오로지 한 곳에 있었다.
남구가 포탈 마법진이 위치한 실내 정중앙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곧 휘몰아치는 광휘와 함께 보상 아이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족속들은 지구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보상 제공의 목적으로 여러 물품도 공수해 왔다.
‘오호! 새것이군! 게다가 최신식.’
종종 누가 쓰던 중고 물품을 보내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전투화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것이었고 기능성과 착용감이 뛰어난 특수부대용 최신식 전투화였다.
한 달 정도는 신어야 간신히 길이 드는 그런 딱딱한 군화가 아니었다.
포장도 없이 배송된 전투화를 바로 신어 보았다.
‘하! 착용감이 그만이군. 역시 치수도 딱 맞아.’
정말로 불특정 다수의 물품 중에 무작위로 뽑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주고 싶은 것을 구색만 갖추어 주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남구는 묵묵히 새로 얻은 아이템을 신고 제어구를 또다시 주시했다.
보상받는 영상까지 생명 에너지를 타고 송출됐기에 룰렛 이용권은 복귀한 직후 바로바로 사용해야 했다.
쌓아두거나 쟁여 놓을 수가 없었다.
영상이 종료되는 즉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룰렛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또 한번 가보자고.’
룰렛은 어김없이 돌았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룰렛을 바라보는 남구의 표정은 눈앞이 어지럽다는 불평불만도 없이 처음보다 많이 밝아 있었고 기대감까지 살짝 어려 있었다.
개인이 제공 받은 룰렛 이용권은 전장에서 쓸만한 아이템이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생필품을 포함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주로 나왔다.
지난 시즌 쓰고 남은 세리야 대륙 것도 재고 처리 용으로 나오곤 했다.
미션 성공 보상은 참여자 각자에게 주어지는 개인 보상과 팀에게 주어지는 단체 보상으로 나뉘었다.
통상적으로 개인 보상은 50 LP와 룰렛 이용권이 한 장씩 주어졌다.
그에 반해 단체 보상은 아이템 룰렛 이용권 달랑 한 장만이 주어졌지만, 개인에게 주어지는 룰렛 이용권과는 궤를 달리했다.
하얀색이 아니라 황금색으로 표시됐다.
팀원이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단체에 딱 한 장 주어지는 이 황금색 룰렛 이용권이야말로 주로 마법서를 비롯해 전장에서 쓸만한 무기와 방어구들이 나왔다.
단체에 달랑 한 장만 주어지는 아이템으로 인해 네가 갖니 내가 갖니 소유권을 다투다가 살인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었다.
이곳은 은성이 모두를 한 손에 휘어잡고 있었고 다수의 친구가 주축이 되어 은성을 떠받쳤기에 그런 일이 드물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혼재했던 다른 곳은 싸움은 물론이고 암살도 자주 일어났었다.
[적당한 시기에 중지를 외쳐주세요]
‘멈춰!’
남구의 눈앞에 떠오른 이미지는 하얀색 속옷이었다.
‘음, 뭐 그래, 조금 아쉽지만, 지금은 속옷도 필요하지!’
이곳에서 제공된 펑퍼짐한 의복은 아무리 통이 넓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거칠었기에 속옷이 절실했다.
신체 능력 상승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남구의 고개가 중앙 포탈로 향했다.
휘몰아치는 광휘와 함께 역시 포장도 없이 삼각팬티 한 벌이 실내 정중앙 바닥 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왕방울사(社) 남성용 언더웨어 젠틀리 왕방울 클래식에 당첨되었습니다]
‘흠?’
순식간에 배달된 보상 아이템은 시스템에 떠오른 그림처럼 하얀색이 아니었다.
누런색이었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것이다.
남구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썩을! 팬티도 중고를 가져오다니!’
남구는 손도 대지 않고 중력제어를 펼쳐 남이 입던 팬티를 들어 올렸다.
곧바로 한쪽 구석에 둥둥 떠 있는 제어구 밑으로 날려 버렸다.
남구가 제어구를 노려봤다.
‘소각!’
자기가 제공한 아이템이 아까운 듯 시스템은 확인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정말로 소각하시겠습니까?]
‘그래, 완전히 분쇄해 버려.’
제어구 밑 구석 바닥에서 마법진 문양이 떠올랐다.
늘어나 주글주글한 누런 팬티가 휘몰아친 광휘와 함께 찬란한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팬티가 사라지자 마법진 문양도 함께 지워졌다.
저곳에 새겨진 진은 쓰레기통이자 화장실의 역할을 했다.
예외 없이 누구나 칸막이도 없는 저 진위에 엉덩이를 훌러덩 드러내 놓고 볼일을 봐야 했다.
이 족속들에게 인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죽으로 칸막이라도 만들어 놔야겠군.’
“오호호호호호호!”
“크하하하하하하!”
“에헤헤헤헤헤헤!”
“우하하하하하하!”
쥐꼬리만큼도 인권을 기대할 수 없는 족속들이 철창 너머에서 좋아 죽겠다는 듯 폭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등 뒤로 마티나를 비롯해 관리자들의 멸시와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지만, 무시와 괄시에 인이 박인 남구는 티끌만큼의 심적 동요도 없었다.
‘정말로 익숙한 웃음소리군.’
단지 쓸모없는 아이템이 나와서 아쉬울 뿐이었다.
남구가 그다지 좋지 못한 표정으로 재차 제어구를 노려봤다.
‘마지막 한 장! 잘 좀 부탁하자! 응? 하긴, 개인 지급용 룰렛 이용권에 뭘 기대해!’
마지막 보상 과정 역시 똑같은 절차로 똑같이 진행되었다.
또 똑같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영상이 눈앞에 출력됐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당첨 아이템의 이미지가 멈추었다.
‘헉! 이, 이건!’
두루마리 한 장이 돌돌 말려 있는 이미지가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남구가 눈앞에 출력된 이미지를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축하합니다. 드래프트(draft) 이용권 1매에 당첨되었습니다]
‘떴다! 드래프트 이용권!’
식민지에서 원하는 인물을 콕 집어 소환할 수 있는 권한 아이템이었다.
이런 종류의 보상 아이템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방금 버려진 누런 팬티와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훨씬 더 원했다.
아무리 초토화된 지구라 하더라도 데스 게임의 게임 말로 살아가야 하는 이곳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마계에 소환당하면 숨어 살 수조차 없었다.
이곳은 데스 게임에 한 번 출전할 때마다 매번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면 죽고 이겨도 죽을 때가 있었다.
그야말로 죽거나 살거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이런 패턴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이 죽어 나갔다.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뿐이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곳에 지인을 소환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보상 아이템 드래프트 이용권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취급받았다.
남구의 한쪽 입꼬리가 귀밑까지 치솟았다.
지금 당장 사용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박 부장과 삼식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흐흐흐, 아이템 셋 중 둘은 건졌으니 이거 쏠쏠하구만!’
“오호호호호, 그래도 하나 건졌네?”
마티나의 앙칼진 웃음소리와 함께 철창이 열렸다.
드르르르르륵- 차캉-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라앉힌 남구가 뒤를 돌아보았다.
병색이 완연한 말라깽이 여자아이가 둥그런 뚜껑이 덮인 음식들이 가득한 커다란 쟁반을 힘겹게 들고 들어 왔다.
배식을 담당하는 세리야 출신 여자아이였다.
‘너도 오랜만이구나!’
여자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남구 앞에 준비된 식사를 부들부들 팔을 떨어가며 내려놓았다.
아이가 나가자마자 마티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이번에 아주 잘했어! 앞으로 그렇게만 해! 네가 하는 만큼 언제나 보상이 뒤따를 테니까.”
염소수염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간사한 목소리로 아첨을 떨었다.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그야말로 우리 고트족이 기사회생했습니다. 이게 다 아가씨의 참신한 운영 능력과 번뜩이는 용병술 때문 아니겠습니까? 모두 고트족을 우러러볼 것입니다.”
“오호호호! 그래, 네가 타르보다 보는 눈이 좀 낫구나!”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아무렴요.”
남구는 둘의 입에 발린 대화 따위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이미 개봉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어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꽤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왔었지만 남구는 스테이크 한번을 얻어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은성과 은성의 팀원들이 먹는 모습을 꿀떡꿀떡 침을 삼키며 바라보기만 했었다.
‘쩝쩝, 그나저나 고기를 질리게 먹고 왔는데도 참 맛있네? 스테이크는 이런 맛이었군. 요리사 손을 탄 게 확실히 다르긴 달라.’
스테이크와 곁들여진 길쭉한 모양의 파릇파릇한 줄기를 앞니로 똑똑 끊어가며 한입에 몽땅 넣었다.
‘이게 아스파라거스라는 거로군.’
맛이 너무 좋아 허겁지겁 욱여넣느라고 입가에 소스가 잔뜩 묻었다.
친절하게도 접시 옆에 냅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남구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교양있는 사람인 양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한 장면처럼 냅킨으로 입가를 콕콕 찍어 닦으며 소스가 묻은 입꼬리를 씩 들쳐 올렸다.
‘후후, 머지않아 한 장 더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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